[스페셜1]
<행복>의 두 배우, 황정민·임수정 인터뷰
2007-09-18
글 : 김혜리

황정민,“관객은 나쁜 놈이라 하겠지만, 영수는 불쌍한 인간이다”

-촬영 중인 현재(2006년 11월2일) 당신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야 내일 촬영분량을 어떻게 찍느냐다. 한번 찍었던 장면인데 감독님이 모자라다 싶은가보다.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할 것 같다. 영수가 옛 애인 수연(공효진)의 집에 갔다오고 나면 내가 감정이 더 힘들어질 것 같다.

-예전 인터뷰에서 자신에겐 냉소적인 면이 없다고 했다. 영수를 연기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나.
=<바람난 가족>을 찍고 나서 냉소적인 면을 표현하는 데 자신이 붙었다. 내 안에 그런 요소가 없는 줄 알았는데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이 그걸 보여주고 난 뒤 불가능하지 않다고 느꼈다.

-첫 키스를 촬영한 오늘은, 은희(임수정)에게 화내는 장면을 찍은 날보다 한결 편안해 보인다. 그날은 몹시 초조했는데….
=오늘 장면은 “같이 살자”고 막 말을 꺼내는 행복한 시기니까. 반면 그 장면은 1년쯤 살고 나서 딴생각이 슬금슬금 나는 상황이라 힘들었다.

-허진호 감독과 당신은 다른 남자다. 연애하는 남자의 행태에 대해 해석이 다른 부분이 당연히 있을 거다.
=감독님은 좀 폼을 잡는다. (웃음) 나라면 조금 더 뜨겁게 열정적으로 다가가겠지. 그 점에서는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이가 황정민과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재고 갈 수는 없고 시선은 관객에게 맡겨놓는다. 나는 지금 은희라는 착하고 좋은 여자를 만나 빗장을 다 연 것도 아니고 어사무사한 느낌이다. 약해져서 기대고 싶고 누군가가 붙잡아주길 원할 때 은희가 나를 받아준 거다.

-역시 사랑 이야기였던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을 연기할 때와 어떻게 다른가.
=<너는 내 운명> 때는 도연이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촬영하지 않고 준비할 때 도연이를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하는 애절한 감정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행복>에서 영수는 석중과 달리 연애의 권력 관계에 있어 강자라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여자를 막 대하는 건 아니지만 은희를 바라보는 영수 마음속엔 ‘너는 내 스타일이 아냐’ 하는 생각과 ‘세상에 이런 여자도 있구나’ 하는 호기심이 있다. 다만 자신할 수 있는 점은 있다. 영화가 개봉하면 많은 관객이 영수를 나쁜 놈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영수는 불쌍한 인간이다. 못 살겠는 것을 어쩌겠는가. 미안하고 답답하지만 나도 잘 살고 싶으니까. “내가 나쁘지만, 널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 그런 진심이 표현되면 관객도 이해할 거다.

-영수라는 캐릭터 안에 들어갔다는 안도감이 언제부터 들었나.
=내가 지금 영수인지 늘 불안하고 불안하다. 이 남자는 잡힐 듯하다 달아나고 이제 좀 쉽겠다 싶으면 또 달아난다. 어떻게 하면 더 영수다울지 온통 그 생각뿐이다. 차라리 황정민을 연기하라면 얼마나 좋을까!

-임수정씨와는 원래도 알고 지낸 사이일 텐데 영화를 시작하고 느낌이 달라졌는가.
=워낙 가까웠는데, 예전에 수정이와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임수정,“은희를 연기하기에 내가 너무 어린 건 아니다”

-<행복>의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이야기라고 이해했나.
=영화제에서 만난 이병헌 오빠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정서가 비슷하지 않느냐고 말하더라. 통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행복>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처럼 담담할 수는 없는 이야기다.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나서 가질 수 없음을 깨닫는 강렬한 애틋함이 있다. 박찬욱 감독님이 <행복>을 시작하는 내게 나루세 미키오 감독 영화를 추천해주셨다. <부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산의 소리> 등 네편을 보았다.

-은희는 병이 깊은 여자다. 많이 앓아본 기억이 있나.
=<장화, 홍련> 촬영 당시 걸렸던 무시무시한 독감이 제일 아팠던 기억이다.

-몸이 아프다는 건 정신을 포함해 자신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 상황에서 왜 어떻게 은희가 영수를 돌본다고 생각하나.
=은희는 아프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그녀에겐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피식피식 던지는 그녀의 대사에서 가슴에 확 꽂히는 감정을 봤다. 아픈 은희는 아파하는 영수를 위로하는 법을 안다. 여자들은 자기가 아파도 옆에 돌볼 아픈 이가 있으면 생활력이 강해지지 않나. 엄마들이 그렇다. 지독히 가난하고 어려워도 내 자식, 내 남편은 퍼주고 돌본다. 그렇다고 특히 고마워해주는 것도 아닌데. 물론 그럼으로써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하니까’다.

-당신은 배우로서는 동안이고 그러다보니 극중 캐릭터로서는 나이에 비해 조숙한 인물로 분하는 묘한 조건이다.
=고마운 점이다. 하지만 원숙한 여자의 아름다움은 차원이 다르니까, 언젠가 시간이 깃든 아름다움이 나를 찾아올 때를 내심 기다리고 있다. 조급해하지는 않겠다. 은희를 연기하기에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이는 못 속인다. (웃음)

-배우 경력이 쌓여가면서 영화 보는 시선에 변화가 있나.
=2005년 무렵부터 영화를 볼 때면 “어떻게 찍었지?”라는 궁금증이 생기면서 화면 안에서 카메라를 찾게 됐다.

-현장에서 잠깐 보기엔 영수 연기가 좋은 쪽 위주로 감독이 테이크를 고르는 것 같은데, 감독한테 서운하지 않나. (웃음)
=정말이다! 은희도 죽겠는데 자꾸 은희에게 영수 곁에 있어주고 영수를 위로해주라고 하신다. “은희가 이러저러하게 해주면 영수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꾸 그러신다. 시나리오에서도 은희는 영수라는 한 남자의 삶에 짧지만 강하게 스쳐간 여자다. 은희는 자기 미래를 알 수 없는 처지지만 그렇기에 지금 현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지금 사랑하고 지금 사는 일이 그녀에겐 가장 중요하다.

-은희는 말하자면 죽음과 오랫동안 친구처럼 살아온 여자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내가 슬픔이나 분노를 특별히 많이 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또래만큼 겪은 정도일 거다. 물론 풍족하게 자란 편은 아니고 혼자 지내는 시간도 많았다. 힘들 때면 말하기보다 생각하고 글을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누군들 안 그런가.

-은희는 이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랑이다”라고 확신하고 애착하는데.
=은희도 영수가 첫사랑은 아니다. 나한테도 진짜 사랑해본 기억이 20대 초반에 있다. 앞으로 또 사랑을 하겠지만 미래에 더 큰 사랑이 와도 그때 만났던 사람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거다.

-황정민씨만큼 던지고 받는 리액션이 활발한 배우와 공연하는 것은 처음 아닌가 싶다.
=<장화, 홍련>의 ‘근영양’은 리액션을 자극했다기보다 그 존재감만으로 날 움직이게 만든 배우다. 황정민 오빠와는 같이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누가 액션이고 누가 리액션인지 가릴 것 없이 주거니받거니한다. 서로 생각을 공유하며 역동적으로 함께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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