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은 이명세가 꾸는 꿈이다. 꿈답게 여러 가지가 자유롭게 출입한다. <형사>의 연장선에 있는 표현들이 즐비하며 여기 종종 과거의 작품과 주인공이 불려온 듯한 인상도 있다. 꿈과 기억이라는 소재를 따라 시간과 무의식의 문제가 개입하며, 고집스런 실험의 폭이 넓어지면서 어느 전작보다 현란해 보인다. 이명세 감독 본인은 이 현란함이 곧 혼돈이며 그 혼돈은 의도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혹은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을 영화가 담고 있기에 혼돈스럽게 보이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해몽의 몫은 보는 사람에게 남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첫 상영이 끝난 다음날,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라운지에서 그의 해몽을 먼저 들었다.
-반응들이 어떤가
=토론토영화제 상영 때도 그랬지만, 여성과 남성의 반응이 다른 것 같다. 남성들은 지적인 싸움을 하는 건지 더 못 받아들이는 것 같다. 여성들은 그냥 감정대로 간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일부러 내용을 모호하게 숨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고나니 그렇게 설명하는 게 최선이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말로 하면 간단하게 풀 수 있다. 한 작가에게 여자가 찾아오고 그 여자는 첫사랑의 여자이고, 유령이고 등등. 하지만 그 과정들이 전개되는 플롯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영화다.
-그렇다면 그 플롯을 짤 때 고민한 부분은 뭔가.
=시나리오를 쓸 때나 연출할 때 이제 감독들은 관객이 이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고 예상하면서 해야 한다. 대신 관객이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끊임없이 데리고 가야 한다. 아니, 그러고보니 예측이 안 돼서 화들 나는 건가? 여하간 꿈이라는 것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좀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꿈이라는 게 복잡한 것도 있고 음험한 것도 있지 않나. <M>에서 풀려고 했던 꿈의 요소는 무엇인가.
=이건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같은 이야기다. 그런 신혼부부가 신혼 초에 겪는 백일몽일 수도 있는 거다. 혹은 술 먹다가 기억이 끊기는 것일 수도 있고. 나도 경험이 있다. 내가 제대하던 날이다. 그날 나는 내가 술에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있던 사람은 취한 내게서 안 좋은 모습을 봤다고 하더라. 나중에 얘기해준다고 했는데 그 뒤로 못 만났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내가 의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맞는지 내가 맞는지, 그 기억의 저편에 뭐가 있는지, 이렇게 뭔가 떠오르는데 이게 실제인지 아닌지 모를 때 기억을 조립하게 되는 거다. 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 기억은 어디로 가 있는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가 있는가. 그런 혼돈에 대한 얘기다. 그런 생각이 이런 포장을 싸고 나타난 거다.
-영화란 전달의 의무가 있는 것이라 혼돈을 혼돈으로 표현하면 안 되지 않나. 그 혼돈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상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주인공이 혼돈스러운 것처럼 관객도 혼돈스러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사랑 에피소드가 열리면서 여성들은 달려가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서부터 블록에 걸리는 것 같았다. 연출자는 어떤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나. 나는 주인공만 혼란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은 느낌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오히려 인물의 연기와 관객의 감정을 격리시키는 부분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니다. 이번 영화는 같이 가는 방법으로서 한 거다.
-이연희가 맡고 있는 여자주인공 미미 역할은 활동적인 캐릭터다.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기까지 하는. 어떤 연유에서 이런 캐릭터가 나왔나.
=캐릭터의 덜렁거리는 면모를 좀더 오버시킨 거다. 연희가 갖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캐릭터다.
-영화에 첫사랑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있나.
=나는 첫사랑의 비밀을 알면 모든 인간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이란 지난 시간으로 들어가는 열쇠와도 같은 거다. 그때의 기억과 정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나이가 들면 정열이 어디 쉬워지겠나. 그리고 첫사랑은 추억을 떠오르게도 한다. 나도 요즘은 자장면을 맛이 아니라 추억으로 먹는다. 우리 아버지는 미군부대 요리사였다. 내가 미국에서 생활할 때 칠면조 냄새를 맡을 때마다 이게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바로 어릴 적 내가 맡았던 아버지 냄새였던 거다. (이 영화를 보고) 그런 비슷한 식으로 첫사랑의 기억이 떠오르면 된다. 우리의 기억이 움직이면서 뭔가를 만드는 거다. 나는 색감이든 뭐든 장치를 만들어놓고 관객이 그런 걸 찾길 바라는 거다. 어떤 순간에 접점이 마련되기를 바라면서.
-강동원은 말하기를, 어려운 연기를 시키는 게 아니라 어려운 말로 연기를 시킨다고 하더라.
=하긴 (박)중훈이도 내가 말을 어렵게 한다고 하더라.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 영화의 모든 숏에서 캐릭터는 다 다르다. 이게 내 영화 연기론이다. 어제 술을 먹었고 지금도 술기운이 안 빠져서 지금 나는 사진을 찍을 때도 평상시와 다르게 긴장이 전혀 안 된다. 이럴 때는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 아닌가. 이런 경우라면 배우들에게 바람 빠진 풍선을 생각해보라고 말할 거다.(어깨를 들었다 내리면서) 그럼 이렇게 간단하게 하면 된다.
-민우(강동원)가 하는 대사 중 한 장면 안에서 예스와 노의 의미를 번갈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인가.
=말이 갖고 있는 속성도 비슷하다는 거다. 주인공이 갈등하는 모습을 표현한 대사들이다.
-강동원이 갖고 있는 미소년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오히려 그 점을 벗어나 캐릭터화한 것은 어떤 결단처럼 보였다.
=동원이도 처음에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좋아하더라.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어색한 면도 좀 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선입견이다. 동원이는 좋은 몸과 말의 리듬을 가졌다. 만약 이게 나와의 첫 작품이고 다음이 <형사 Duelist>였다면, <형사…> 연기가 어색해 보였을 것이다.
-빛, 움직임 등을 많이 강조하는데 그것과 함께 배우들이 뭔가 사물화 혹은 정물화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내 영화를 말할 때 사람들이 가끔씩 하는 말이긴 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가 갖고 있는 소재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지. 내가 찍는 방식은 다 똑같다. 영화의 소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다. 아직 낯설어서 그런 것 아닐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처음 시사했을 때도 영화를 제법 본다는 사람들조차 다들 당황했다. 배우들도 가끔 당황한다. 이번에도 가구점 촬영이라고 해서 왔는데 거기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공효진이 당황하더라. 논리적인 사람들이 더 당황한다. 동원이 같은 경우는 그걸 좀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고.
-일식집을 배경으로 해서 강동원의 역할 바꾸기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자아와 타자라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면이다.
=데자뷰 같은 거다. 이 영화에서 그곳이 가장 현실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늘 보는 공간에서 그런 일(데자뷰)이 일어나는 걸 통해 꿈인지 생시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자세히 보면 그 장면은 카메라가 아니라 벽 자체가 물러나고 닫히면서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은 그럴 수 없는 것 아닌가. 일반적인 공간에 기이함을 불어넣고 싶었다. 소리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사운드 디자인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일식집에서도 선풍기가 돌아가면 바람을 맞는 사람의 목소리가 떨리는 효과를 사용했다.
=일단은 어렸을 때 선풍기에 대고 장난하는 느낌 같은 것이다. 그리고 대사가 아니라 그 순간 주인공이 압박받는 느낌이 중요하다는 거다. (민우와 함께 앉은) 출판사 편집장 목소리는 돼지울음처럼, 약혼자 은혜(공효진)의 아버지인 송영창씨 목소리는 속물처럼 들리게 하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사운드의 유희처럼 보이기도 하던데.
=뭐 그럴 수도 있고. 여러 가지다. 발전하는 사운드 시스템을 활용해본 것일 수도 있는 거고. 화면 따라서 이번에는 소리도 옮겨가지 않나.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과 화면에서 보는 것이 똑같으면 좋겠다는 거다. 전시회장에서도 전시를 위한 최적의 공간을 위해 전시품을 배치하지 않나. 나쁜 전시회장은 만드는 것만 생각하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전시는 그런 걸 감안한다. 작품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정서가 움직일 수 있는 배치를 생각한다. 문자 텍스트 쓴 것도 마찬가지다. 화면 속에 박력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한 거다. 글자라는 것도 그림이니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쓴 말풍선하고 비슷한 거다. 글자 크기도 안배했고, 검은색과 흰색의 교차도 생각하면서 했다. 신경 많이 쓴 거다. (웃음)
-배우들이 사물화, 정물화된다고 좀전에 말한 게 바로 전시장의 전시품처럼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보여지는 것 말고 그 다음을 잘 모르겠다. 그게 좋은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염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갖고 있는 분위기 그 자체가 소재인 거다. 나로서는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보여지는 걸 바라는 거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수렴하는 중간자로서, 거리를 조절하는 역할자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