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액션영화 명장면] 홍콩 무협의 기품, 되살리거나 낄낄대거나
2007-10-25
글 : 오정연
<와호장룡> vs <킬 빌>

아주 오랫동안 홍콩 액션영화는 명백한 오리지널리티를 소유한 장인이자 동시에 다양한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었다. 산업으로서의 홍콩영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와호장룡>과 <킬 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홍콩 액션영화를 향한 애정을 고백했다. <와호장룡>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무협소설 속 진부한 문구를 현실화했다. ‘홍콩영화=이소룡과 성룡의 B급 쿵후영화’라고 생각했던 미국과 유럽의 관객은 그 철학적인 액션 시퀀스들에 열광했지만, 리안은 사실 오랫동안 잊혀졌던 홍콩 무협의 기품을 되살린 것이다. 이미 1960년대 후반 호금전의 영화에는 대나무숲을 수직 활강하는 무사와 속세의 무게를 벗고 경공술을 구사하는 고승이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용(장쯔이)과 수련(양자경)이 지붕과 돌담을 타고 넘다가 몇번의 합을 주고받는 추격신의 뛰어남은 유려한 액션 안무에 있지 않다. 끊임없이 날아오르려는 용과 그를 끌어내리려는 수련의 시도는 둘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리무바이(주윤발)와 용의 대나무숲 액션. 12일에 걸친 촬영을 위해 무술감독 원화평은 정교한 와이어 액션의 극치를 선보였고, 촬영감독 피터 파우의 카메라는 특수한 크레인에 올라탄 채 인물을 따라 하늘을 날아다녔다. CG는 와이어를 지우고, 배경을 그려넣는 데만 사용됐다. 신들린 손과 발의 놀림을 극대화하기 위해 초당 24프레임의 속도를 22프레임으로 낮추고 화면의 속도를 약간 더했지만, 다른 홍콩 무협영화와 달리 그보다 빨라지지는 않았다. 인물의 화려한 동작을 과시하려면 풀숏에 어울리는 1.85:1의 화면비를 택했겠지만, 리안은 2.35:1를 택했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 사이로 무한한 감정을 담은 표정이 클로즈업으로 배치됐다. 하나의 컷이 달성해야 할 목표는 항상 명확했기에 15대의 카메라쯤은 일상적으로 동원하는 할리우드의 액션영화와 달리 두대 이상의 카메라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작은 균형에도 반응하며 수시로 몸을 숙이는 대숲 위에서 두 남녀의 추격신은 다가서고 싶은 욕망을 감춘 채 이들의 기꺼운 희롱이 된다. 리무바이의 여유는 용을 제압하는 칼 끝이 아니라 백척간두에서 뒷짐진 채 머금은 미소를 통해 전달된다. 리무바이에게 끌리면서도 지고 싶지 않은 용의 안간힘은 대숲 사이로 엿보이는 눈동자의 흔들림으로 표현된다. 강호의 현란함 속에 감춰진 깊은 철학과 미묘한 감정은 그렇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영상으로 완성됐다. 이후 <영웅> <연인> <야연> <황후花> 등 대륙의 위용과 기세를 표현하는 일련의 대작이 품은 욕망에는 <와호장룡>의 그늘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협의 철학을 계승한 <와호장룡>과 달리 원화평을 무술감독이 아닌 무술고문으로 영입한 <킬 빌>은 무협의 표피를 낄낄대며 베낀다. 이소룡 추리닝을 입은 금발의 우마 서먼이, 사무라이의 검을 들고 중국의 객잔을 본뜬 도쿄의 클럽에서, 핏물이 강을 이룰 때까지 벌이는 액션 시퀀스. 쿵후영화와 사무라이영화와 이탈리아 고어영화와 마카로니 웨스턴과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이종교배한 타란티노의 기조가 극명하다. 그러나 영화사에 존재했던 숱한 B급 장르를 엮는 이음새는 치밀한 완벽주의자의 그것이었다. 절단된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임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지만, 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되기 직전 플로어와 복도와 화장실로 이어지는 우마 서먼의 움직임을 꼬박 하루 동안 현란한 무빙으로 찍어낸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의 카메라는 누가 뭐래도 A급의 그것이다. 굉장히 공들여 만들어진, 영화사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국적 액션 시퀀스는 위악적인 유희에 가깝다. 60년대 쇼브러더스의 무협물이 실은 일본의 사무라이 액션에서 유래했음을,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이 명백하게 존 포드의 서부극에 빚지고 있음을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좋다. 적극적인 혼성모방이 또 다른 장르의 정신을 구축했음을 홍콩 무협과 마카로니 웨스턴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킬 빌>은 ‘모방을 통한 창조’에 유달리 능한 액션 장르에 대한, 타란티노의 주관적이며 흥겨운 연대기 혹은 박물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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