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오늘 <씨네21> 왔다고 갑자기 너무 성질을 안 부리시는 것 같아∼. 이거 너무 우아하잖아요.” 차수연이 귀엽게 선방을 날린다. 스탭들이 따라 웃자 겸연쩍어진 전재홍 감독, “오늘은 우아하게 가자고요” 하며 점잖은 너스레를 떤다. 얼마 뒤 이천희의 지원사격. “(<씨네21> 취재진을 향해 최대한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근데 오늘 몇시까지 계세요? 가지 마세요~~ 오늘은 안 맞았거든요.” 이거 무슨 일인가. 감독과 배우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가? 취재진만 없으면 폭력이 난무하고? 아니,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렇지 않다. 틈만 나면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는 <아름답다>의 젊은 3인방이 손님을 핑계 삼아 현장 분위기를 띄우는 순간이다. 연방 배우들을 쫓아다니며 “좋다! 멋있다!” 도닥거려주는 전재홍 감독이나 틈날 때마다 재밌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즐겁게 촬영하는 이천희나 거리낌없이 당당한 차수연이나, 일산 호수공원 옆 한 오피스텔에서 촬영 중인 10월23일 <아름답다> 8회차 현장은 젊음의 혈기로 즐겁기만 하다.
총 11회차 중 이날 낮시간의 주요 촬영은 강간사건이 일어난 뒤 후유증으로 골방에 숨은 은영(차수연)을 순경인 은철(이천희)과 형사가 찾아오는 장면, 은영의 자살 시도 장면, 그리고 은영을 사랑하게 된 은철이 그녀의 집 앞에서 쪼그려 기다리는 장면 등이다. 촬영기간이 짧으니 매회 집중도가 요구된다. 게다가 강간이라는 소재가 부담되지는 않는지 슬쩍 물었더니, “예전부터 이런 강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었는데 오히려 너무 빨리 찾아와서 부담될 뿐 좋은 기회”(차수연)라고 씩씩하기도 하고, “아니 다들 그거 말도 잘하데. 나는 못하겠던데…. 강간장면 찍으니까 나가세요… 막 이러고…”(이천희)라며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패기의 현장답게 혹은 김기덕 감독의 제자가 만드는 영화답게, 이곳에서 아예 구석 자리로 밀려 홀대받는 게 두 가지 있다. 모니터와 감독 의자. 카메라와 배우 사이를 줄기차게 오가는 전재홍 감독에게 의자는 필요없고 모니터를 보지 않으니 그 역시 필요없다. “왜 감독이 모니터를 보는지 이해가 안 돼요. 카메라 위치에서 배우를 보는 게 감독이죠. 제가 스크립터는 아니잖아요. 보다시피 저는 컷 하고 나서 언제나 배우에게 달려가서 체크하거든요.” 또 하나 없는 게 있다면 두 번째 테이크. 저예산영화 현장은 많겠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원컷 원 테이크’(원신 원컷이 아니다!)가 원칙이다. “네 테이크 가는 거 정말 오늘 처음 봤다”(이천희)고 말할 정도. 그러니까 은영의 방 안을 돌아다니는 은철의 뒷모습쪽으로 카메라가 서서히 트랙을 따라 이동하는 장면. “감독님, 카메라가 쿨럭거렸는데 한번 더 가죠.” 잠시 체크해본 뒤 감독 왈,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괜찮아요. 컷 하나 더 찍어서 해결할게요”. 과연 김기덕 문파답게 순발력이 좋다. 그러고보니 이 현장의 모토가 있다면? 영화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현장은 활기차게 그리고 때때로 우아하게. 이런 거 아닐까?
요즘 어때요?
“굉장히 저예산영화인데도 작으면 작은 대로 투자 성사시키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김기덕필름 이름을 걸고 힘들게 구한 거다. 요즘 한국영화가 어렵다보니 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우리 현장도 다 몇년씩 숙련된 스탭들이다. 어쩌면 충무로가 어려우니까 우리가 지금 이 고급 인력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배우들도 개런티를 많이 낮춰 준 걸로 알고 있다. 적은 예산에 필름으로 찍는 것이 무리수가 있긴 하지만 스탭들의 자발성이 힘이 된다.”-송명철 프로듀서
전재홍 감독 인터뷰
“<숨> <시간> 연출부 안 했다면 이런 현장 진행 못했을 거다”
-김흥수 화백의 외손자라고 들었다(방 안에는 김 화백이 차수연의 사진을 보고 그려주었다는 그림도 소품으로 배치되어 있다).
=맞다. 실은 내가 처음 김기덕 감독님 만나고 싶어할 때 연락처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셨다. (웃음)-<시간> <숨> 때 김기덕 감독 연출부를 했다.
=원래는 어렸을 때부터 성악을 전공했고, 경영학도 같이 공부했다. 뉴욕에서는 단편영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2년 사이 거의 13편을 찍었다. 뉴욕필름아카데미도 좀 다녔는데 배운 건 거의 없었다. 그러다 김기덕 감독님의 <빈 집>을 보고 완전히 팬이 됐다. 김 감독님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활>이 칸에 갔을 때 그곳에 갔다. 내가 영화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그분뿐이라는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단편을 보여드렸더니 “네 영화는 특이해” 그러시더라. 연출부 수업 허락받고 바로 뉴욕 생활 접은 뒤 한국에 와서 연출부 시작했다. 김 감독님 집에 가면 몰래 국제영화제 트로피 한번씩 쥐어본다. 나도 이렇게 돼야지 하면서. (웃음)-<아름답다>는 김기덕 감독의 원작을 갖고 만들었다.
=5장 정도의 시놉시스 형태였다. 그걸 받아들고 한 일주일간은 아름다움이 뭔지 고민했다. 아름다움의 시작이 뭔가 하고.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들 중에는 실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기괴함이 담긴 그런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들이 많다. 과연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움을 방어할 무엇이 없어졌을 경우 어떨 것인가, 그런 생각도 해봤다. 이 영화에서는 강간범 성민을 깨끗함으로, 은영을 아름다움으로, 은철을 죽음으로 놓고 한번 보고 싶었다. 김 감독님이 주신 시놉시스에서 내 나름대로 은철 역할을 새로 만들어서 넣고, 엔딩도 좀 바꿨다.-본인 각본이 아니고 김기덕 감독의 원작으로 데뷔한 이유는 뭔가.
=왜 신인감독들이 처음 영화 만들면 다 자기 얘길 하지 않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독은 시나리오작가가 아니다. 김 감독님에게 내가 공부할 만한 걸 하나 달라고 먼저 부탁드렸다. 감독님께서는 “그런 의도라면 너하고 가장 멀어 보이는 소재로 주겠다”고 해서 받은 거다.-현장 운용 면에서도 많이 배웠겠다.
=과감히 포기할 건 포기하면서 대안을 찾는다. <숨> <시간> 연출부 안 했다면 이런 현장 진행 못했을 거다. 다만 김 감독님과 차이가 있다면 나는 배우들과 미리 리허설을 많이 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