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리안] “<색, 계>는 연기에 관한 내 자전적인 논문과 같다”
2007-11-15
사진 : 이혜정
<색, 계>의 리안 감독을 만나다

<와호장룡>(2000)으로부터 7년 뒤 리안 감독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1930∼40년대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며 펼쳐지는 <색, 계>는 일제강점기의 격동의 세월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몸에 짙게 새겨진 ‘색’과 ‘계’의 흔적을 그린다. 이처럼 <색, 계>는 그가 7년 만에 다시 시도한 중국어영화지만 필름누아르적인 무드에서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그만의 면모 또한 녹아 있다. 이렇게 영화를 둘러싼 궁금증에서부터 양조위는 물론 <색, 계>로 데뷔한 탕웨이에 이르기까지 리안 감독은 영화에 대해 꼼꼼한 주석을 달아줬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7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인사동에서 맛보았다는 된장찌개를 다시 먹으러 갈 생각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먼저 <색, 계>는 당신의 이전 영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노출과 묘사의 수위를 보여줘서 큰 논란을 낳고 있다.
=아마 내가 중년의 위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웃음) 과거에는 사랑에 대해 보수적이고 평범한 관점을 지녀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젊었을 때 표현하지 못한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정사신이 그 괴로운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면, <색, 계>는 ‘색’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3, 4년 전 엘렌 창이 쓴 28페이지 분량의 단편소설을 읽다가 애국주의와 섹슈얼리티를 조합하는 방식에 큰 충격을 받고 영화화를 꿈꿨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어 자매 같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사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 직전에 영화가 NC-17 등급을 받아 무척 마음이 무거웠는데, 베니스에서 수상하게 되면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렸다. 무엇보다 심사위원 7명 모두가 감독이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로드리고 프리에토 촬영감독과 함께했다. 그와는 이제 두 번째 작품을 함께했는데, 야외촬영이 많았던 <브로크백 마운틴>과 비교하면 <색, 계>는 실내장면이 주를 이룬다. 두 사람은 어떻게 작품에 접근했나.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굉장히 뛰어난 촬영감독이다. <아모레스 페로스>(2000)를 통해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8마일>(2002)이나 <알렉산더>(2004)를 보면 알겠지만 액션이 많은 영화들에서 특히 뛰어나다. 아마도 할리우드에서 핸드헬드를 가장 잘 찍는 촬영감독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당신도 알겠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색, 계> 모두 격렬한 움직임과는 거리가 멀다. (웃음) 맨 처음 그와 <브로크백 마운틴>을 함께한 건 그가 굉장히 민첩하고 빠른 속도로 정해진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해내는 촬영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즈음 그는 움직임이 많은 영화도 좋지만 정말 집요하게 캐릭터를 담아내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했었다. 아마도 <색, 계>는 그런 그의 바람이 가장 밀도있게 담긴 작품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런 방식이 어떻게 영화에 적용됐나.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물론 당시의 상하이와도 다른 순수한 시대의 홍콩을 담아내는 것, 그러니까 식민지 남부 중국의 느낌을 살려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전쟁과 혼란으로 가득 찬 필름누아르의 공간으로서의 상하이다. 로드리고 프리에토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바로 필름누아르의 고정관념을 버리자는 거였다. 그래서 보통 누아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명암의 대조를 드러내기보다는 색채를 많이 넣어서 그림자를 최소화하려 애썼다. 그리고 북유럽 덴마크의 한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느꼈던 어떤 잔잔한 옐로 톤의 빛이 있다. 그 빛의 느낌을 주된 정서로 끌어가다가 나중에 양조위가 건네는 다이아몬드 반지의 보라색과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촬영 내내 갖고 있었다. <색, 계>의 촬영에 대해서는 미국의 영화지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에서도 심도있게 다뤘다. 그렇게 촬영에 대해서 호평을 많이 들었는데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공이 크다.

-<색, 계>는 결국 ‘색’과 ‘계’를 떠나서 연기자를 꿈꿨던 한 연기자 지망생이 아마추어의 때를 완전히 벗고 자신의 최고의 연기를 완성하고 산화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색, 계>를 향한 대부분의 관심이 섹슈얼리티에 집중되고 있지만 나 역시 이 영화는 삶에 있어서의 연기와 연극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홍콩에서 오디션을 거치고 리허설을 마친 아마추어 배우들이 더 큰 무대인 상하이로 떠나는 것이다. 왕치아즈는 자신의 연기를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실험한다. <색, 계>는 연기에 관한 내 자전적인 논문과 같다. 그 누가 사람의 성행위 자체가 공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쾌락도 연기해야 하고 거짓 오르가슴도 표현한다. 왕치아즈가 겪는 혼란은 결국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일이 점점 자신의 실제가 돼가고 있음을 깨닫고 받게 되는 충격과도 같다. 더불어 나중에 광위민이 왕치아즈를 바라보는 눈길은 승승장구하는 동료배우를 바라보는 부러움일 수도 있다. 영화도 결국 인생의 축소판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와 왕치아즈에 투영해 자신을 보게 될 거다. 영화에서 여러 번의 정사신이 있지만 어떤 장면을 두고 연기를 하는 거짓행위인지 진짜 사랑하는 것인지 분간하기는 힘들다. 사랑도 결국 연기일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홍콩을 떠나려던 왕치아즈 일행이 있는 곳으로 차오(전가락)가 오는 순간이었다. 불청객을 맞닥뜨린 그들은 굉장히 어설프게 차오를 한번씩 칼로 찌르게 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에서의 처형식을 떠올렸다.
=그들은 철저하게 아마추어 킬러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어색해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더구나 그 순간이 바로 그들이 아마추어 연극이 아닌 실제 연기를 펼쳐야 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그들이 이제 상하이로 가서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아마추어 연기자들임을 너무나 여실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후 그들의 험난한 운명을 미리 암시한다고나 할까. 말한 대로 <순응자>에서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그 장면 이후 그들은 절대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그리고 베르톨루치의 경우 정사신을 찍으면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와 왕치아즈의 첫 번째 정사신은 무척 가학적이다. 그것이 혹시나 이의 변태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해서 걱정했는데 이후에는 아니었다. (웃음) 첫 정사신을 그렇게 연출한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를 드러내야 했다. 어떤 사람이 그 관계에서 더 우월한가를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또한 그 속에는 전쟁에 대한 분노와 시대에 대한 노여움도 담겨 있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이는 언제나 사랑을 비난하고 부정하는 캐릭터다. 더구나 그는 공공의 적이기 때문에 그런 동물적이고 사디스틱한 면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그는 맨 처음 왕치아즈가 자기를 유혹하려 하면서 자기 위에 서려고 할 때 더욱 열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후 점차 변해가게 된다.

-양조위는 이전에도 <씨클로> <상성> 같은 작품들을 통해 악역을 연기한 적 있다. <색, 계>의 양조위도 연기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그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데, 이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참조하기도 했나.
=양조위는 이미 자기만의 확고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배우다. 왕가위의 페르소나라 해도 되고, 허우샤오시엔의 페르소나라 해도 틀리지 않다. 나 또한 그들 모두와 달라야 했다. 로드리고 프리에토 촬영감독이 나를 만나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드리고 프리에토에게 나는 이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양조위를 만들자고 말했다. 그래서 피자 라이트 혹은 킬러 라이트라고 하는 방법을 써서, 전구를 여러 개 단 반사판으로 주인공의 얼굴을 더욱 악마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다 딱 한번 선한 양조위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왕치아즈에게 반지를 주면서 쳐다볼 때의 눈빛만큼은 정말 진심어린 선한 눈으로 보여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어떤 여자든 ‘이 남자를 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만큼. 그리고 양조위는 단 한번도 만다린으로 연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 다른 언어를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캐릭터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렇게 언어와 더불어 양조위에게 움직임이나 걷는 모습 등 그 시대의 딱딱한 공무원 같은 느낌을 요구했다. 그런 식으로 연기 지도를 하고 보니 어느 날은 양조위가 과거 우리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웃음) 아버지가 그런 공무원이셨는데 양조위에게서 그 모습을 본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양조위만의 매력이란 무엇인가.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악인의 모습이다. 모두가 증오하는 공공의 적이지만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는 인물을 만드는 데 있어 양조위 말고 다른 선택이 있을까? 악역이지만 항상 두려움을 지니고 있고 양심의 가책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사실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섬세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양조위밖에 없다. 그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그가 악역을 연기하더라도 언젠가 마음이 바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웃음)

-<와호장룡>이 홍콩의 무협영화 전통을 따르면서도 한편으로 멀리 이탈했던 것처럼, <색, 계> 또한 과거 홍콩에서 인기를 끌었던 캐세이 스튜디오나 쇼브러더스의 고전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와호장룡>에 내가 어린 시절부터 봤던 무협소설과 영화들의 영향이 은연중에 반영됐다면, <색, 계> 또한 어린 시절 열렬히 좋아했던 캐세이 스튜디오의 뮤지컬이나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캐세이 스튜디오는 쇼브러더스가 패권을 차지하기 전까지 홍콩 상업영화의 대부분을 만들었던 곳인데, 이후 광둥어 영화들이 홍콩 극장가를 장악하기 전까지 꾸준히 만다린으로 그런 뮤지컬과 멜로영화들을 만들었다. <색, 계>를 만다린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데는 그런 영향이 크다. 영화의 전반적인 무드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그 당시의 기억이 큰 역할을 했으며 양조위나 탕웨이에게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특히 양조위에게는 캐세이 스튜디오의 멜로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역의 모습을 많이 얘기했다. 그외 영어권 필름누아르 영화들 중에서는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로라>(1944)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니콜라스 레이의 <고독한 영혼>(In A Lonely Place, 1950)에 등장하는 험프리 보가트의 어두운 내면을 많이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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