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와 안개의 집>의 바딤 페렐먼 감독이 충무로국제영화제를 찾은 것은 신작인 <인 블룸>이 상영작으로 선정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곧 리메이크할 한국영화 <파이란>의 주역들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이뤄졌다. 그는 10월29일 “우리 모두의 보물 같은 배우”라는 최민식을 만나 소주를 거나하게 들이켰고, 다음날에는 <파이란>을 연출한 송해성 감독도 만났다. 송해성 감독은 새 영화 <멜로스>(가제)를 준비하고 있는데다 갑작스러운 허리의 통증까지 발병했지만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하겠다는 할리우드 감독이 신기하면서도 기특했고, 최민식까지 “꼭 만나보라”고 권유했던 터라 이 자리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어색해할 사이도 없이 상대에게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송해성: (최)민식이 형과 통화했는데, 오늘 바딤 감독을 만난다고 했더니 ‘어제 자리가 너무 좋았다’면서 ‘바딤 감독님이 우리 과야’, 이러더라. (웃음)
바딤 페렐먼: 허허. 고맙다.
송해성: 오늘 <모래와 안개의 집>을 보고 나왔다. 그것을 보면서 민식이 형이 얘기한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 할리우드에서 이렇게 진중한 영화를 찍었던 사람이 <파이란>을 리메이크한다니 굉장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니까 보통 할리우드영화와 다르더라. 카메라 움직임도 서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바딤 감독이 미국 출신이 아니라서(바딤 페렐먼은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10대 시절 이탈리아로 이주했다가 캐나다에 정착했다) 비주류의 삶에 대한 느낌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도 톱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어떻게 그런 비주류 감성의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만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바딤 페렐먼: 사실 데뷔작에 이 정도 배우를 기용한다는 것은 할리우드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결국 내가 모두 출연하고 싶도록 하는 각본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난 보통의 할리우드영화에는 관심이 없다. 할리우드의 주류와는 다른 영화를 만들면서 생각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모든 것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명백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는 나의 사적인 통찰이 담기지 않은 영화는 굳이 찍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최민식이 우리가 ‘같은 과’라고 말했던 이유는 우리 셋 모두 마음에서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가슴으로 영화를 만들고 최민식은 가슴으로 연기를 한다.
송해성: <모래와 안개의 집>은 보통 할리우드영화와 달리 보고나서 굉장히 속이 상하게 되는 영화다. 그렇게 속이 상했다는 면에서 <파이란>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웃고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집에 가면 뭔가를 깨닫게 되고 소주라도 한잔 먹어야 하고. 그런 느낌에서 이 영화가 <파이란>과 닮은 정서를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됐다.
바딤 페렐먼: 그게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정직하고 진실하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멜로드라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멜로를 나쁜 의미로 쓰는데 내 생각에 멜로드라마는 높은 수준의 드라마다. 더글러스 서크를 생각해보면 된다.
송해성: 2월쯤부터 들어갈 새 영화의 제목을 <멜로스>라고 붙였다. ‘멜로스’(melos)는 그리스어로 노래라는 뜻인데, 요즘에는 멜로영화라는 식으로 한정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제목을 갖고 찍어야 하는 것은 단순한 멜로영화가 아니라 삶을 노래하고 인생을 노래하는 영화이다.
바딤 페렐먼: 누가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속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장소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송해성: 페렐먼 감독처럼 진심을 갖고 영화를 찍는다는 게 할리우드에서는 힘든 일일 텐데,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한 작품이 실패하면 다음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지는 냉혹한 전쟁터 같은 할리우드에서 그런 대단한 자신감을 발휘하니 말이다.
바딤 페렐먼: 할리우드의 본질은 비즈니스다. 당연히 살아남기란 정말정말 어렵다. 나는 까다로운 감독, 어려운 감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는데 그건 별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 돈을 대는 사람들에게는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 하나도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송해성: 결국 할리우드에서 감독으로 성공하려면 까다롭게 굴어야 하나보다. 지금 한국의 유명한 감독이 오랫동안 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페렐먼 감독의 말대로 까탈스럽게 굴라고 전해줘야겠다. (웃음)
바딤 페렐먼: 리안 같은 감독도 <헐크>를 그렇게 만든 것을 보면 할리우드는 만만치 않은 곳이다. 파트너인 제임스 샤무스가 제작사 대표인데도 영화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었잖나. 결국 할리우드 ‘상어’들의 생리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둘 중 하나란 얘기다. 돈을 벌거나 비평적인 찬사를 얻거나.
송해성: 음, 미국에서 준비하는 감독에게 꼭 들려줘야 할 말 같다. (잠시 침묵) 이 말을 내가 꺼내기는 좀 그렇지만, <파이란>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게 됐나.
바딤 페렐먼: 2년 전인가 됐는데, 프로듀서가 <파이란> DVD를 내게 줬다. 나는 보통 DVD를 컴퓨터에 틀어놓고 딴 일을 하곤 했는데, <파이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 30분인가 지났나. 내가 그 영화를 계속해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집중해서 봤다. 그리곤 엄청 울었다. 바로 프로듀서에게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겠다고 했더니 충격을 받더라. 사실 그때는 일거리가 굉장히 많이 몰려들 때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뭔가 리메이크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 좋은 영화는 더더욱 리메이크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 경우에는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메이크를 결정한 뒤에는 주변에서 영화의 이야기를 좀 바꾸자는 의견을 많이 제시했다. 파이란이 죽은 뒤에 강재가 복수를 한다든가. 하지만 나는 설정을 뉴욕에 온 러시아 아가씨로,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가 개입되는 정도로만 바꿀 생각이지 원작의 틀은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다. 그 아름다움이나 진심에서는 <파이란>과 같은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아, 그리고 당신도 <모래와 안개의 집>을 리메이크하려면 얼마든지 해라. (웃음)
송해성: 아, 그거 정말 하고 싶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파이란> 때도 강재를 죽이는 것을 갖고 굉장히 말이 많았다. 그렇게 죽이지 말고 좋은 데 가서 행복하게 파이란을 기억하면서 살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보니까 마지막 대목에서 베라니(벤 킹슬리) 가족이 죽고난 뒤 결국 캐시(제니퍼 코넬리)가 혼자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것을 봤을 때 동료의식을 많이 느꼈다. 왜 그렇게 해야 했나.
바딤 페렐먼: 어제 만난 최민식도 당신이 ‘강재는 죽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하더라. 나는 거기에 100% 동의한다. 그것만이 강재와 파이란이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송해성: 그게 바로 남들이 강재를 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했던 말이다. 야, 그런 것을 다 알다니 우린 참 세계관이 비슷한 것 같다.
바딤 페렐먼: <모래와 안개의 집>의 베라니도 아내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이가 없는 마당에 아내를 홀로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해성: 나는 그 가족의 죽음도 그렇지만, 캐시 혼자서 살아가야 할 상처가 힘들게 보였다. 이를테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가 죽은 뒤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가져가야 할 상처와도 비슷해 보였다.
바딤 페렐먼: 캐시 또한 처벌받아야 했다. 베라니 가족이나 캐시나 둘 다 잘못을 저질렀는데 베라니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벌을 받았고, 캐시가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둔다면 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지 않겠나. 그리스 비극과도 같다. 또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거나. 그 영화에는 파이란 같은 순수한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파이란>에서 파이란은 천사처럼 순수한 존재이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강재는 말 그대로 그 순수의 경지를 향해 한 단계씩 올라가지 않나.
송해성: 페렐먼 감독이나 나나 핸섬하게 생긴 사람들인데, 왜 세계관은 이렇게 비극적인 걸까. (웃음)
바딤 페렐먼: 사실 내 여자친구는 나를 ‘비극술사’(tragician)라고 부른다. ‘비극’(tragedy)과 ‘마술’(magician)을 합쳐서 말이다. 만약 내가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내면 죽은 토끼가 나올 거라고 놀린다. 만약 왜 비극적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굉장히 어두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이탈리아로 이민갔을 때는 벤치에서 잠을 청하면서 말 그대로 거리의 삶을 살았다. 그게 14살에서부터 16살 정도까지였는데 절망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았다. 그런 탓에 첫 영화인 <모래와 안개의 집>은 분노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일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뒤집으려 했다면 두 번째 영화인 <인 블룸>에서부터는 조금씩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송해성: 나는 두 번째 작품에서도 희망이 잘 안 보이던데. (웃음) 나 또한 <파이란>을 만들 때 분노를 많이 가졌었다. 왜냐하면 전작(<카라>)이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실패했기 때문에. 그 다음 작품에 대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내 가슴속의 이야기를 까발리자고 시작한 게 <파이란>이다. 결국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비평적으로는 어떻게 건지는 게 있어서 지금도 이렇게 밥을 먹고…. (웃음)
바딤 페렐먼: 사실 내 분노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모두를 벌한 것 같다. (웃음)
송해성: 최민식씨는 한국의 대표배우 중 한명인데, 당신 영화에 캐스팅할 의향은 없는지.
바딤 페렐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영광일 것이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벤 킹슬리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물이다. 어제 누군가와 인터뷰하는데 <파이란>을 리메이크한다면 강재 역에 숀 펜 정도가 어울릴 것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외려 숀 펜이 망신당할 거라고 말했다. 이건 진심이다. 사실 강재 역을 찾는 게 참 문제다. 파이란 역할은 <인 블룸>의 에반 레이첼 우드를 생각하고 있어서 별 고민이 없는데, 남자배우는 잘 모르겠다. 하비에르 바르뎀 정도? 아니면 베니치오 델 토로? 잘 모르겠다. 이게 할리우드의 현실인데, 톰 크루즈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박스오피스에서 나름대로 먹히는 배우를 캐스팅했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영화를 만들도록 내버려두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으면서도 박스오피스에서 영향력이 있는 배우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렵다.
송해성: 그게 한국이나 할리우드나 영화감독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창작자로서 갖고 있는 열정과 고민이 항상 자본이라는 요소와 대립된다는 것.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바딤 페렐먼: 만약 내게 비결이 있다면, 그 역할에 딱 맞는 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의 제니퍼 코넬리나 <인 블룸>의 우마 서먼이 그렇듯이 좋은 배우이자 박스오피스에서도 위력있는 배우들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참 힘들 것 같다.
송해성: 이렇게 유명한 배우들과 작업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 혹시 할리우드에서 할리우드스럽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당신의 진심을 배우들이 이해하는 것인가.
바딤 페렐먼: 내가 알기로 배우들은 이런 영화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오히려 문제는 이런 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방법이란 좋은 각본을 쓰는 것밖에 없다. 그들은 이런 영화에서 큰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물론 시작은 어려웠다. 내가 <모래와 안개의 집>의 시나리오를 썼을 때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사람을 한명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어떤 에이전트의 조수에게 전달하고 CF를 찍으러 뉴질랜드로 떠났다. 돌아왔더니 휴대폰에 26개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더라. 스튜디오, 에이전트, 배우들…. 결국 정말 가슴으로 시나리오를 쓰면 얼굴을 맞대고 굳이 만나지 않아도 다 전달이 되는 것 같다. 어차피 시나리오 안에 다 드러날 테니.
송해성: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면 할리우드의 유명한 감독들이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하는데, 그런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대체 언제, 얼마나 터뜨려야 저렇게 하나, 하고 부러워한다. (웃음)
바딤 페렐먼: 나조차 그런 파티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 삶을 사는 건 대개 촬영감독들이더라.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그들이다. 줄리아 로버츠도 촬영감독과 결혼하지 않았나. (웃음)
송해성: 아차, 어제 최민식씨가 집에 돌아가서 당신에게 선물을 못 준 게 아쉬웠나 보더라. 그러면서 자신이 아끼는 <파이란>의 포스터와 O.S.T에 사인을 해서 전해달라고 했다.
바딤 페렐먼: 오, 이런!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 오히려 내가 최민식씨에게 <모래와 안개의 집> DVD를 선물하고 싶은데, 선물을 받게 되네.
송해성: 나도 주라! (웃음)
바딤 페렐먼: 돌아가서 당신에게도 보내겠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