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경기가 있었던 때는 2004년 8월29일 일요일 저녁이었다. 계속되는 동점에 연장, 재연장 그리고 마지막 승부 던지기까지 정말 아테네의 선수들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한국의 시청자 또한 손에 땀을 쥐며 마음 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996년에도, 2000년에도 우리는 그랬다. 이전까지 1988년 서울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연이어 2연패를 달성한 여자핸드볼 대표팀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핸드볼 강국인 덴마크에 져 은메달을 따냈고(‘머물렀고’라는 표현은 삼가고 싶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도 준결승전에서 덴마크에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해 4위에 머물렀다. 아시아로 한정하자면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부터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까지 5연패라는 경이적인 업적을 달성했으니 실력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뭐든지 하나라도 잘하는 게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게 한국사회라지만, 그들은 그렇게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도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여자핸드볼은 언제나 세계무대의 무서울 것 없는 강호였지만 국내에서만큼은 ‘비인기종목’이라는 설움에 시달렸다. 바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덴마크에 멋지게 설욕하고 다시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금메달을 딴다 해서 핸드볼이 인기종목이 될 일은 요원했지만 선수들은 뛰고 또 뛰었다. 그것이 그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4년에도 덴마크의 벽은 높기만 했다. 이후 감독이 카메라 앞에서 비인기종목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멘트를 잇지 못하고, 선수들이 엎드려 우는 동안 우리는 그저 채널을 돌리는 것으로 그날의 경기를 마무리했다. 여느 경기처럼 새벽에 열렸다면 그냥 분한 마음에 잠을 청하면 되었건만, 그날은 좀 달랐다. 그 오랜 경기가 끝나고도 시간은 채 오후 8시가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쉽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약속 시간에 맞춰 외출을 했다. 핸드볼이 만년 비인기종목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날의 기억은 쉽게 잊혀져갔다.
다음날인 8월30일 아침, MK픽처스의 심재명 대표는 무심코 직원들에게 말을 던졌다. “어제 여자핸드볼 결승전 봤어? 죽이지 않아?” 모두가 즐거이 한마디씩 보태면서 대화는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 심재명 대표는 구체적으로 임순례 감독에게 여자핸드볼 선수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흔쾌한 수락이 이어졌다. 사실 MK픽처스의 전신인 명필름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만들고 난 뒤 언제나 명목상으로 ‘차기작 준비’ 상태였던 임순례 감독은 임상수 감독도, 최호 감독도, 김현석 감독도, 김응수 감독도 떠난 MK픽처스 사무실에서 가장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감독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 <무림고수>를 준비 중이던 그는 고수에서 선수 이야기로 급선회하게 된다. 김균희 PD는 “아저씨가 아줌마로 바뀌고, 삼류밴드가 핸드볼 선수로 바뀐 ‘아줌마판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터프한 남자 작가, 여성 스포츠영화에 합류하다
그해 겨울, 임순례 감독이 연출하기로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기획 작업에 들어갔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이야기지만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개별 스토리는 전면적인 새 구상에 들어가야 했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심재명 대표와 주제, 소재는 물론 국내외 스포츠영화를 분석한 자료들을 탁자에 펼쳐두고 장르와 컨셉에 대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주고받았다. 봄이 되면서 MK픽처스 기획팀은 정리된 내용을 가지고 시나리오작가를 찾았다. 김균희 PD는 “남성 작가들은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에, 여성 작가들은 스포츠영화라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작가 섭외가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며 “한 지인의 소개로 나현 작가를 소개받아 만났는데 첫 만남이 잊혀지지 않는다. 유도 선수 버금가는 기골 장대한 체격과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 과연 이 터프한 남자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재치있는 입담에서 소시민의 정서를 잘 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지금이야 <화려한 휴가>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목포는 항구다>와 <돌려차기>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극장가에서 참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돌려차기>에 대한 애착이 컸던 그는 다시 한번 스포츠영화에 도전해보고 싶다며 <우생순>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우생순>의 시나리오는 책상 혹은 인터넷 검색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선수 인터뷰가 관건이었다. 나현 작가는 “나 역시 그 경기를 TV로 보고 감동받았지만 시나리오로 쓴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며 “핸드볼 규칙은커녕 코트에 몇명이 뛰는지도 몰랐다. 나 역시 오늘날 핸드볼이 비인기종목이 되는 데 일조한 장본인이었던 셈”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생순>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만 했던 시나리오다. 그는 김균희 PD와 함께 핸드볼협회에 출근부를 찍으며 10년간의 기사들을 샅샅이 찾아서 읽었고, 국장님과 술잔을 기울이며 핸드볼 선수들의 비사를 들었으며, 실제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선수들의 생활을 취재했다. 김균희 PD는 “화면에서 너무 자주 보던 선수들을 실제로 마주하자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오버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고 말하고, 나현 작가는 “임오경, 오성옥, 문필희, 우선희… 만약 내가 열혈 핸드볼 마니아였다면 그 만남은 마치 축구광이 피구, 지단, 호나우두, 토티 등을 만난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더불어 첫 만남부터 김균희 PD는 노장 선수들의 마지막 인사에 큰 감동을 먹고 돌아섰다. “핸드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도와주겠다.”
그런데 사실 임순례 감독은 이전에 만든 두편의 장편영화인 <세친구>(1996)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세친구>는 박경희 감독과 공동 집필). 어떻게 보면 <우생순>은 그에게 잘 맞지 않는 옷일 수도 있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듯한, 진득한 사람의 냄새를 풍겨왔다는 점에서 그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완성된 시나리오 초고를 본 임순례 감독은 꽤 흡족해했다. “아는 친구에게 읽어보라고 했는데 내가 쓴 줄 알았대요”라는 게 시나리오에 대한 감독의 평가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연으로 모여 어떤 과정을 통해 아테네까지 향하게 됐는가를 극화하는 게 중요했다”는 나현 작가의 생각이 주효했던 부분이다. <우생순>은 실화를 다룬 이야기인데다, ‘결승전에서 졌다’는 절망적 사실만큼은 변형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생순>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다다르기까지 아줌마 선수들과 신진선수들이 함께 만들어갔던 웃음과 눈물의 기록이다.
‘여자 <실미도>’팀처럼 맹렬히 훈련하다
2006년 7월 임순례 감독과 김균희 PD는 다시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시나리오를 위해 선수들을 인터뷰한 뒤 꼭 1년 만이었다. 그 사이 <우생순>은 지난한 퇴고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김균희 PD는 무엇보다 “스포츠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 올 봄엔 조카들과 도쿄돔에 이승엽 경기도 보러 갔어”라는 임순례 감독의 얘기에, 보기와는 다르게 스포츠에 대한 감독의 내공이 꽤 상당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그것은 중요한 얘기다. 따지고 보면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우생순>은 마이너리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음악과 핸드볼이라는 꽤 전문적 영역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가 영화적 테크닉은 간결하게 처리하면서도 실제 그런 테크닉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배우들이 실제 음악 연주를 아마추어 이상으로 해내야 했듯, <우생순>의 배우들 역시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했다. 게다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퇴락한 클럽의 밴드지만 <우생순>의 그녀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핸드볼팀이 아니던가.
배우 조련을 위해 선택된 사람은 바로 청소년대표 출신인 이대진 코치였다. 영화계 최초로 ‘핸드볼 슈퍼바이저’라 명명된 그는 액션영화의 무술감독처럼 경기장면의 합을 짜는 일부터 배우들을 트레이닝하는 일까지 핸드볼과 관련된 모든 일을 책임졌다. 그와 동시에 문소리, 김정은, 엄태웅 등 주조연 배우들이 모두 결정됐고 지난해 2월에는 황기석 촬영감독도 합류했다. 그리고 드디어 3월부터 3개월간 이대진 슈퍼바이저의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여배우들의 훈련이 시작됐다. 주 4회, 하루 7∼8시간 동안 스피드, 점프력 등 기본기를 다지는 체력 훈련과 영화 속에서 활용될 드리블, 패스, 슈팅 및 고난이도의 세트 플레이, 페인팅 모션 등 핸드볼 훈련을 병행해 진행했다.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여배우들이라 트레이닝 초반에는 구토와 어지러움 증세를 수시로 호소했으니 ‘완전 여자 <실미도>야’라는 배우들의 탄식도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점차 배우들의 몸과 액션이 만들어지면서 3D 콘티가 제작됐다. 수차례의 테스트 촬영을 통해 배우들의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과 동선을 파악하고 얻어진 이 콘티는 실제 촬영간의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리고 6월24일 드디어 카메라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열린 그리스의 헬레니코 경기장을 직접 답사하고 전국의 체육관들을 헌팅한 뒤, 가장 유사하다고 판단된 인천 삼산체육관이 바로 그날의 경기장으로 선택됐고 총 4대의 카메라가 배우들의 움직임을 담아냈다. 물론 대규모 관중은 CG로 만들어졌고 실제 유럽에서 따온 생생한 경기장 사운드가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하지만 정작 결승전을 치를 덴마크 선수들을 구성하지 못한 것은 낭패였다. “외국인 선수 섭외가 어려우면 국내에서 운동신경 좋은 외국인들을 선발해 똑같이 핸드볼 훈련을 시켜야 하나 고민했다”며 “거기다 IOC와 소재 사용 권리를 확인하는 일부터 오륜기나 마스코트에 대한 저작권을 확인하는 일까지 법적으로 점검해볼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는 게 김균희 PD의 얘기다. 그런 제작진에게 영화의 매듭을 짓는 것 같은 낭보가 날아들었다. 바로 덴마크 프로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르후스팀이 출연 제의를 승낙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6월 말 실업 오픈대회를 위해 서울을 방문하기에 출연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오르후스팀은 당시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여자핸드볼계의 대들보 최임정, 허순영 선수가 진출한 팀이기도 하고 당시 결승전 승부 던지기에서 거대한 벽처럼 서 있었던 골키퍼 카린 모르텐센이 소속돼 있는 팀이기도 했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기분이라고나 할까. 정말 <우생순>은 2004년의 그날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었다. 더불어 당시 경기 중계를 맡았던, 그리고 이번 영화에도 우정 출연한 최승돈 아나운서와 해설자 강재원 감독도 “우리 선수들 울지 마십시오. 하지만 기쁨의 눈물이라면 마음껏 흘리십시오” 등 화제가 됐던 멘트들로 당시의 명승부를 재현해줬다. 그들 모두의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렇게 완성됐다.
그리스도, 폴란드도, 헝가리도 아닌 한국!
강명찬 제작실장에게 듣는 유럽에서의 촬영이 무산된 사연
올림픽이라는 소재, 아테네라는 공간, 상대선수 및 관중인 외국인 수급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준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우선 외국 로케이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동유럽에서 촬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 이 세 나라가 해외 로케이션 대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올림픽이 열렸던 그리스까지. 하지만 그리스는 여자핸드볼 선수팀이 많지 않아서 우선순위에서 배제됐다. 폴란드가 가장 저렴하면서도 퀄리티가 좋다는 판단을 내렸고, 우츠영화학교를 졸업한 김승규 조명감독의 도움으로 한 업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칸마켓에서 아테네올림픽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을 들은 그리스의 아트 트리(Art Tree)라는 제작사가 공동제작 의뢰를 해왔다.
9월 말, 해외 로케이션 및 공동제작에 대한 조사차 김현철 PD와 그리스와 폴란드를 둘러보는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트 트리는 순제작비의 최대 20% 정도에서 현물 및 현금 투자 건을 논의해왔다.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그리스 필름센터’에서 총지원금의 50%를 지원받고, 국영방송 및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나머지 50%를 충당할 계획이라고 했다. 사실 <우생순>은 한국 배우들이 등장해 한국어로 제작되는 영화라 유럽시장에서 그리스가 공동 제작한 영화라는, 그리스 자국영화로서의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어 개인투자자 및 다른 펀드 소스를 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물론 실제 배경장소이기에 영화홍보와 해외 세일즈에서 도움이 된다는 판단도 들었다. 하지만 투자가 되지 않는다면 동유럽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가도 비싸고, 영화 인프라가 많지 않은 단점이 있었다. 해외로부터 투자를 받는 것도 좋지만 그로 인해 전체 예산이 올라가게 되고, 그들의 현금 투자는 투자 지분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신중한 판단이 요구됐다.
반면 폴란드는 영화 인프라가 굉장히 좋은데 반해 인건비나 체제비 등 전체적인 물가는 동유럽 중에서도 저렴한 축에 속했다. 그리스는 인건비와 체제비 등 처음에 고려하던 것보다 그 이상의 예산이 나와 그리스와의 공동 제작 건이 잘 되지 않는다면 폴란드에서의 촬영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10월 중순경 해외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한국영화의 상황이 추석 이후로 급반전됐다. 가장 미니멈하게 제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올림픽 경기장면은 모두 국내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하고, 아테네 도심과 경기장 외경 그리고 주인공인 미숙이 등장하는 공항만 본 촬영이 모두 끝나고 로케이션을 가기로 결정했다. 아쉽지만 유럽에서의 본격적인 경기장면 촬영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