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문소리는 선택의 순간에 자주 놓인다. 빚에 좇기는 남편과 핸드볼 코트 사이에서, 자신을 위해 돈을 모아준 친구의 우정과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 사이에서. 영화는 여러 인물의 다양한 굴곡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지만 문소리가 연기한 미숙에게 좀더 무게를 둔다. 그리고 이 무게는 ‘연기파 배우’라 칭해지는 문소리의 명함과도 겹친다. <오아시스>의 연기로 주목받기 시작해 <바람난 가족>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가족의 탄생> 등 배우로서 질문을 던지고 하나씩 답란을 채우듯 작품을 쌓아온 문소리는 특정한 이미지로 기억되곤 하는 여배우와 달리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다소 무심한 호평 속에 기억되었다. 올해 처음으로 도전한 TV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대한 잡음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문소리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TV드라마에서 다소 길을 헤맸는지 모른다. 하지만 문소리는 대다수의 여배우들이 거절하는 역할에 호기심을 갖고 도전해왔다. 그리고 이 점이 문소리에게 자꾸만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는 이유다.
-미숙이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순간 버릴 수도 있는데 미숙은 끝까지 붙잡는다.
=(남편을 연기한) 박원상씨와는 연극 <슬픈연극>을 하면서 그냥 둘이 앉아 있으면 콩이요 팥이요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감독님도 그런 게 영화에서 잘 표현될 거라 생각하신 것 같고. 둘은 절대 헤어질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버릴 수 없는 관계다.
-어느 순간 둘의 삶이 비인기 스포츠를 택한 선수의 두 가지 가능한 길처럼 보였다. 미숙이 남편에 연연하는 것도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 같았다. 자기가 남편처럼 되길 겁낸달까.
=그런 면도 있다. 남편의 삶은 사실 혜경의 것일 수도 있고, 정란이의 것일 수도 있는 거니까. 다른 캐릭터들은 영화적으로 가볍게 풀려고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미숙은 그런 게 없다. 내가 농담으로 나는 이 영화에서 우울담당이야, 라고 투정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미숙이란 캐릭터가 어떤 느낌이었나.
=…음…. 좀 많이 나 같다. 많이 입히지 않고 간 캐릭터기도 하고. <박하사탕> 캐릭터가 지금 봐도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어떤 시절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사과> 찍을 때도 좀 그랬고. 영화 8~9년 정도 한 지금 내 모습이 미숙에게 많이 들어간 것 같다.
-비슷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가.
=글쎄, 그냥…. 미숙은 혼자 묵묵히 싸우면서 견뎌왔다. 잔머리 굴리거나 이기적인 판단을 했다기보다 큰 목표를 위해 선택했다. 나도 영화를 하면서 힘든 순간이 있었고, 버리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 그냥 우선 이 산을 넘어가고 보자고 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한 것 같고. 임순례 감독님이 어느 술자리에서 자기는 이런 문소리를 봤고 그런 문소리를 그냥 미숙이로 담고 싶다고 말씀해주셨다.
-일견 연기자 문소리의 과정은 탄탄대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 모든 걸 기댈 데가 없었다. 내가 배우생활 하면서 주변 작업을 잘해주는 매니지먼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전 매니저는 회사가 거의 망해서 일을 안 해줬고, (웃음) 그전에는 혼자 시작했었고. 연기 하나, 작품 하나로 계속 해왔다. 미숙이도 아무것도 없지 않나. 미숙은 자기 핸드볼 실력 하나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많은 선택의 상황이 주어진 미숙처럼 배우 문소리에 대해서도 어떤 무게, 기대가 있는 것 같다. 단지 여배우 문소리라기보다는 ‘연기 잘하는 배우’의 명함이랄까.
=그게 나는 너무 무겁다. (웃음) 어떤 이미지를 팔 수도 없고 만들어서 기댈 수도 없고. 두 번째 영화(<오아시스>)는 여배우로서 거의 막장 캐릭터였고, 세 번째 영화(<바람난 가족>)도 험난했다. 하지만 미숙처럼 그게 살다보면 다 자기에게 힘이 되는 것 같다.
-<태왕사신기>의 캐스팅 논란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우 문소리가 TV드라마, 그것도 판타지 세계에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이질감에 대한 일종의 거부반응이랄까.
=하지만 나는 그게 판타지드라마고, 영화에선 보여질 수 없는 장르라 선택한 거다. 그런 경험이 드라마란 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험이라 생각했던 부분도 있고, 내가 잘 몰라서 모험을 겁없이 하는 경향이다.
-<태왕사신기> 출연의 가장 큰 이유는 뭐였나.
=가장 큰 건 내가 제안받은 캐릭터가 기존 드라마에서 볼 수 없던 거였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나중에 많이 변했지만. (웃음) 촬영 가보니까 많이 변했더라고. 금방 또 변할 거라고 했는데 안 변하더라. (웃음) 처음엔 거의 악의 주축이어서 해보겠다고 한 건데. 드라마라는 게 늘 바뀐다고 하더라. 몰랐지.
-캐스팅 미스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땐 기분이 어땠나.
=뭐 어쩌겠나. 미스라고 해봐야 돌이킬 수도 없는 거고. (웃음) 미스라고 하면 캐스팅한 사람이 잘못한 거지 매가 잘못한 건 아니지. 시청자 게시판 의견에 대본도 좌지우지되지만 그런 걸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캐스팅 미스라는 이야기 안에는 배우 문소리의 연기가 판타지적인 화면과 잘 어울릴까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연기 스타일이 다 너무 다르니까. 누구는 시트콤 연기하고 있고, 누구는 중국 드라마 하고 있고, 또 나는 다른 연기하고 있고. 그걸 김종학 감독님이 잘 조율해주실 줄 알았는데 조율이 잘 안 된 느낌이더라. 연기의 차이, 톤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연기력 논란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그런 상황이 힘들진 않았나.
=뭐 인생이 100개를 해서 100개를 다 잘할 순 없지 않나. 야구를 해도 홈런을 칠 때가 있으면 삼진을 당할 때가 있고. 이런 것들이 내 인생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게 너무 치명적이어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지만 이번의 일(<태왕사신기>와 관련한)이 그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고, 그들의 의견이 정말 내 인생을 돌이켜볼 만큼 진지한 충고나 조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여배우들은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는데 문소리는 연기한 캐릭터의 이미지가 연기파 배우란 이름 안에 묻히는 면이 없지 않다. 특히 TV는 이미지가 더 강하지 않나.
=나는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서 판 적이 없으니까. <오아시스>로 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다 박탈당한 거고, 어떤 이미지에 기대서 갈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드라마쪽에서도 나라는 사람을 어떤 이미지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던 것 같고, 앞으로 드라마를 한다면 어떤 캐릭터를 해야 하나 고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느낌은 그냥 나를 설명하는 것의 일부니까 좋다 싫다고 말할 건 아닌 것 같다.
-얼마 전(1월9일 방영)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고 하더라. 어떤 고민을 말했나.
=거기서 고민 좀 그냥 정해준다. 실제보다 더 나이가 많은 줄 알아요가 고민이었는데, 사실 그게 고민은 아니다. (웃음)
-해결은 뭐라고 하던가.
=10년 뒤엔 더 젊어 보일 거라고. (웃음)
-12월28일 방영된 <놀러와>도 그랬지만 오락 프로그램을 의외로 잘 소화하는 것 같더라. 이제 <무릎팍도사> 나가면 안티도 줄지 않을까.
=(웃음) 그 정도 안티는 있어야 한다. 워낙 안티가 없어서. 안티가 없다는 건 인기가 없다는 것과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