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형제애는, 미친 짓이다
2008-02-07
글 : 문석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19세기 중반 중국을 무대 삼아 세 의형제의 운명적 행로를 그리는 <명장>은 거친 남성영화다. 의리와 맹세, 배신과 복수 등 이 영화의 전면에 자리잡고 있는 요소들은 홍콩영화와 중국영화에서 익히 봐왔던 것이다. 하지만 4천만달러라는 예산이 든 이 초대형 시대극의 감독이 장이모나 첸카이거가 아니라 진가신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남자와 여자의 속 깊은 사랑 이야기를 달콤쌉쌀한 조미료를 곁들여 들려줬던 그가 남자영화라니. 그것도 블록버스터급 전쟁액션시대극이라니. 진가신 감독의 의외의 프로젝트 <명장>을 뜯어본다.

진가신 감독이 장철 감독의 1973년작 <자마>(刺馬)를 리메이크한 대작역사극을 만들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퍼햅스러브>를 중국권에 개봉시키던 2005년 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두 종류였을 게다. 하나는 ‘어머 별꼴, 말랑말랑한 액션영화가 나오겠군’, 다른 하나는 ‘장이모와 첸카이거가 그렇게 부러워?’ 그로부터 2년 뒤 영화가 완성돼 <명장>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면서 그런 비아냥은 적절치 않았음이 드러났다. <명장>은 진가신이 자신만의 독특한 남성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으며, 그가 규모에 도취한 장이모나 첸카이거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추구했음을 보여줬다. 흥행기록 또한 다른 대작에 뒤지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12일 중국에서 개봉한 <명장>은 중국 박스오피스에서 2억위안 이상의 수익을 올린 세 번째 영화가 됐으며, 최종 흥행성적에서는 먼저 2억위안 고지를 점령한 장이모의 <영웅>과 <황후花>를 앞설 것으로 예상된다. 12월20일에 개봉한 <집결호>가 2억위안의 전당에 동참하면서 <명장>이 역대 중국영화 흥행기록 보유자가 되는 건 어려워 보이지만, 1991년 <쌍성고사>로 데뷔한 이래 오직 한길 멜로영화만 고집해온 감독이 만든 액션영화가 이 정도의 반응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신이 살해사건’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명장>은 장철의 <자마>와 마찬가지로 1870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마신이(馬新貽) 살해사건’을 소재로 삼는다. 마신이는 양무운동을 주도한 증국번 아래서 태평천국의 난 등을 진압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던 엘리트지만, 고위 관직인 양강총독으로 부임 중이던 어느 날 자신의 의형제인 장문상(張汶祥)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이 사건의 완전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전으로 내려온 바에 따르면, 또 다른 의형제인 조이호(曹二虎)의 아내를 탐한 마신이가 누명을 씌워 조이호를 죽이자 이에 대한 복수로 장문상이 마신이를 살해한 것이다. 장문상이 사형에 처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록 의형제이긴 했지만 형제끼리 서로를 죽여 마침내 세 형제가 모두 사망했고, 그 중심에 치정이 있다는 점 때문에 후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마(馬)씨를 찔러(刺) 죽였다는 뜻에서 ‘자마 사건’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사건을 골격으로 삼아 상당한 허구를 가미한 <명장>에서 마신이에 해당하는 인물은 방청운(이연걸)이다. 그는 청나라의 장수로서 태평천국을 주창하는 태평군(太平軍)과 맞서 싸우다 1600명의 병사를 모두 잃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열패감 속에서 한 여인을 따라가다 정신을 잃은 그는 여인의 보살핌으로 의식을 되찾게 되고 그날 밤 여인과 정사를 나눈다. 다음날 어떤 마을에서 빵을 나눠주며 장정들을 모집하는 도적떼와 만나게 된 그는 도적들을 이끌던 강오양(금성무, 역사에서는 장문상)과 또 다른 의형제 조이호(유덕화)를 알게 된다. 얼마 뒤 방청운과 조이호, 강오양은 피로써 의형제를 맺고, 청의 군대에 들어가 놀라운 활약을 펼친다. 우애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방청운과 정사를 나눴던 여인은 알고 보니 조이호의 아내인 연생(서정뢰)이었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위험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하지만 구전 역사와 달리 <명장>은 치정극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형이 동생의 아내와 눈이 맞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또 다른 동생이 이들을 응징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축소됐다. 그 대신 이 영화는 남성들이 잘 내세우는 의리, 우정, 형제애 같은 가치의 실체와 본질을 구명하려 한다. <명장>이 남성들, 그리고 그들의 유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소적이다. 영화의 초반부, 세 남성은 의형제로 ‘피의 맹세’를 맺기 위해 무고한 사람 한명씩을 살해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친다. “오늘 이 자리에서 피로써 의형제를 맺는다. 목숨을 걸고 맹세하노니 우리를 해치는 자는 목숨으로 갚을지어다. 우리 중 형제를 해치는 자 또한 목숨으로 갚을지어다.” 보기에 따라 ‘사나이’들의 뜨거운 의리의 맹세로 읽힐 수도 있는 이 문구는 이들의 살인 행동과 결합되면서 어처구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투명장’(投名狀·<수호지>에서 사람의 목을 가져감으로써 비로소 양산박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임충의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말)은 이처럼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결속 혹은 유대를 상징한다.

남성들의 허구적인 유대, 형제애

<명장>은 남성들의 신의와 사랑과 의리를 내세우는 듯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배신과 복수와 비정함에 좀더 강조점을 찍는 영화다. 대의와 명분이라는 포장에 가리워졌던 남자들의 추악한 알맹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진가신 감독이 애초에 구상했던 것은 이런 식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던 초반에 관객으로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영웅본색>에서처럼 일상의 삶에서는 꿈꿀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감정이었다. 80년대 홍콩 갱스터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극도로 과장된 감정 말이다.” 그가 갱스터영화로 방향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범죄자들을 미화하거나 그들의 범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갱스터영화가 금지돼 있는 것. “그래서 생각한 게 시대극이었다. 그리고는 장철의 <자마>를 떠올렸다. 그건 정말로 갱스터영화다.” 그러나 <자마>를 리메이크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그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자료조사를 위해 중국의 역사를 뒤졌는데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의형제가 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서 그것이 형제애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영웅본색>을 진정으로 지지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과 과도하게 단순화된 의리와 형제애의 세계를 싫어해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 내가 만들려고 한 것은 갱스터영화가 아니라 갱스터영화의 패러디이자 안티테제였다.”

남자들의 허구적인 유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큰형 노릇을 하는 방청운이다. 1600명의 병사를 잃고서도 살아남기 위해 시체더미 안에서 죽은 척했을 정도로 생존력이 강한 그는 동생과 그 추종자를 이용할 줄 아는 영민함과 교활함도 갖고 있다. 그가 투명장의 맹세로 도적들과 의형제를 맺은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의리’를 믿어서가 아니라 도적들을 병사로 끌어들여야만 정치적 재기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00명의 군사로 5천명의 태평군을 상대한 서성 전투에서 무모한 전략을 짤 때나 소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이자 개인적 원수인 하괴에게 손을 벌릴 때 방청운의 머릿속에는 정치적 야망만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방청운만 나쁜 놈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진가신 감독은 말한다. “조이호와 강오양,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도적들이 청의 군대에 들어간 것은 방청운의 맹세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방청운을 따른 건 군대에 가면 밥을 주고 돈을 준다는 말 때문이다. 의리와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들의 관계는 결국 서로에 대한 필요에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선과 악의 경계는 애매해진다. 한 성을 함락시킨 뒤 방청운은 아녀자를 강간한 10대 소년 두명을 본보기 삼아 처단하려 한다. 이때 조이호는 “(성을 점령한 뒤) 3일 동안 마음껏 약탈하는 것은 관례입니다. 그 여자들의 가족을 죽이고나서 이제 와서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우리 형제들을 죽인단 겁니까?”라며 반발한다. 이에 방청운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군대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을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싸우는 목적이다.” 어쩌면 그건 방청운의 진심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허울 좋은 대의명분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때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3일 동안만큼은 모든 악행을 용인하자는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방청운과 조이호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기보다 감독의 말마따나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와 신념” 사이의 충돌이다. “방청운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해준다고 믿는 현실주의자이고 조이호는 수단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믿는 로맨티시스트다.”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은 그가 이 영화를 <자마>의 리메이크작으로 출발한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자마>에서 마신이 역할은 장철 감독 영화에서 항상 정의의 편에 섰던 적룡이 맡았는데, “그 누구도 적룡을 악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고? 적룡이니까. 자연히 관객은 그가 나쁜 일을 하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인물의 감정에 방점을 찍은 액션영화

4천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만든 블록버스터영화답게 정소동 무술감독이 만들어낸 초대형 액션장면이 눈길을 사로잡긴 하지만, <명장>에서 진가신 감독이 진정으로 빛을 내고 싶었던 것은 액션보다는 서서히 골이 벌어지는 인물들의 감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달리 이 영화 시나리오를 읽고 <브레이브 하트>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런데 <브레이브 하트>처럼 마지막에 ‘자유를!’이라고 외쳐야 상업적인 결말이 될 텐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관객을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해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감정을 극대화한 표현은 그동안 진가신 감독의 멜로영화가 일관되게 취한 노선이었다. 때때로 그의 멜로영화가 간지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런 과잉된 감정 탓이리라. 액션영화인 <명장>에서도 방청운과 조이호를 중심으로 인물들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감정의 과잉은 드러난다. 심지어 대규모 전투신에서도 마찬가지다. “큰 액션신을 찍던 초기, 나는 그런 장면을 찍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의자에 가만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정소동 무술감독에게 인물들을 클로즈업으로도 찍어달라고 주문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큰 액션신은 크게 찍어야 했다.” 참다 못한 진가신 감독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장에 배치된 8대의 카메라 중 2대를 달라고 했고 배우 2천명 중 200명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곤 긴장하거나 울거나 공포에 질려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핸드헬드로 찍어나갔다.”

결국 <명장>은 전쟁, 액션, 사극, 블록버스터적인 요소라는 다양한 색의 실을 멜로드라마의 방법론이라는 바늘로 꿰어낸 영화인 셈이다. 남성들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를 부정하는 남성들의 액션영화, 또는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대신 “사람은 매일, 매 순간 선인이 되기도, 악인이 되기도 한다”는 논리에 입각한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는 “사랑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거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는 진가신 감독의 모순된 멜로드라마의 세계와 닮아 있다. <명장>이 야릇한 감동을 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균형, 불일치, 부조화가 만들어낸 기묘한 충돌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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