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실 분들은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충분히 경고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건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가 아니라 지난 한해에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를 한달 동안 몰아서 본 다음 중얼거린 질문이다. 제이슨 라이트먼의 ‘10대 소녀의 지옥을 웃기게 그린’ <주노>와 마이클 베이의 ‘10대 소년의 로망을 심각한 척 담은’ <트랜스포머>를 한해에 동시에 보게 되었을 때, 텍사스에 관한 두편의 ‘웨스턴 이후’의 영화라고 할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범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라드>와 조엘 코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다음 뉴질랜드에서 온 앤드루 도미닉이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연출한 ‘웨스턴’ <제시 제임스 암살>을 보게 될 때,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를 동시상영처럼 보았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던지는 <본 얼티메이텀>과 <아임 낫 데어>(와 <스파이더 맨3>까지)를 거의 연달아 보게 되었을 때, <본 얼티메이텀> 각본을 쓴 토니 길로리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마이클 클레이튼>으로 감독 데뷔했을 때, 미국에 관한 두개의 이상한 연대기인 <조디악>과 <아메리칸 갱스터>를 시즌별로 보았을 때, 그런 다음 1980년대 뉴욕을 무대로 한 경찰과 러시아 마피아 사이에 낀 클럽 매니저를 다룬 제임스 그레이의 <우리는 밤을 지배한다>를 보게 될 때, <클로버필드>를 본 다음 집에 와서 다운로드받은 리처드 ‘도니 다코’ 켈리의 <남쪽나라 이야기>를 볼 때, 지지난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 것을 숀 펜이 <인투 더 와일드>에서 거의 이루어낸 것을 볼 때, 그냥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 구스 반 산트가 ‘여전히’ <파라노이드 파크>를 찍고 있을 때, 지금 미국영화는 무엇일까, 라고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는 이야기지만 스필버그가 <우주전쟁>을 찍었을 때 무언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했다. 프랭크 카프라처럼 <터미널>을 찍은 다음 갑자기 존 포드의 <수색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워드 혹스처럼 <뮌헨>을 연출했다. 그러고 난 다음 두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전쟁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제작했다. 올해 (루카스와 함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으로 돌아오지만 지금 준비하는 영화는 <링컨>(!)이다.
할리우드영화가 영화보는법을 바꾸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토픽의 단절이 언제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하지는 못하겠지만, 1999년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가 (미국에서만) 1억달러 블록버스터가 되었을 때 (할리우드식으로 말하면) ‘무언가’ 벌어졌다. 이 쓰레기는 1999년 버전 <네 멋대로 해라>가 되었다(‘의미심장하게도’ 그해에 <매트릭스>가 만들어졌다). 이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비평적 용어란 없다(하지만 온갖 해설은 있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미국영화는 영화를 거의 와해시켰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와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비밀의 형식이라는 것을 마치 잉여인 것처럼 몰아세운 다음 재빨리 거기에 영화와 닮은 새로운 근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과 영화 사이에 어떤 공통의 분모가 있는 집합처럼 보였지만 일단 구멍이 뚫리자 그 속으로 새로운 모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크린이라는 표면에 구멍이 뚫려 통과하기 시작하자 거기서 어떤 상황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술이라기에는 너무 생산적이고, 재생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놀랄 만큼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과 조너선 드미의 <섬씽 와일드>를 언급하고 있지만 난 그 ‘이후’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걸 그냥 포스트모던하군, 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지난 유머다. 내가 할리우드영화를 보면서 점점 기괴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 자체는 금방 이해가 되는데 본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거의 플롯의 구조가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할리우드영화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가? 플롯없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조디악>을 본 다음 <살인의 추억>처럼 플롯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본 얼티메이텀>을 본 다음 이 영화가 아무 인과관계 없이 고작해야 세개의 시퀀스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텅 빈 플롯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지 않는가? 단 하나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두편의 영화의 (놀랄 만큼 창조적인 다음 한심할 만큼 게으른) 반복 <데쓰 프루프>. 아니, 차라리 스포일러의 만연 속에서 그 영화의 플롯이 궁금해서 영화를 보러간 적이 있는가? 심지어 <클로버필드>를 보러 온 관객의 대부분은 어떻게 찍혔는지조차 알고 온다. 그 앞에서 우리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새로운 상황이라면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무엇을 어디서? 왜 보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혹은 의심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 미국영화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고 있다면 당신은 내 논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다.
정보를 통해서, 정보로 영화를 설명하는 게임방 시대의 시네필들
오늘날 영화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영화라는 사건을 가능한 세계의 한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사건-가능, 이라는 하나의 삼각형. 다른 하나는 영화라는 정보를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읽는 것이다. 영화-정보-경험, 이라는 또 다른 삼각형. 전자의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눈에 보이게 줄어들고 있다. 후자의 방법은 거의 모든 영화들이 우리 시대의 광학적 기계장치를 다루는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볼 때 이제는 그것을 보는 직관적 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풍요로운가라는 (다소 상투적인 비유이지만) 유목민적인 산책의 구경보다 그 영화를 둘러싼 정보를 얼마나 더 많이 갖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영화가 더 잘 보이는 네트워크로서의 집단적 전송과 리플이 이 시대의 영화감상을 특징짓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착각하면 안 된다. 오늘날 이 네트워크의 특징은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오로지 사이버 대화가 있다. 정말 있는 것은 전송뿐이다. 전송하고, 전송받고. 베냐민적 영화보기에 대한 맥루한적 영화보기의 승리.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미국영화(의 관객교육 방법)의 승리. 오늘날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둘러싼 정보에 더 열중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트북 세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 게임방 시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 그들은 사실상 재빨리 새로운 영화 보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들은 영화를 본 다음 견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정보의 오류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정보를 경유하고, 정보를 통해서, 정보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화를 더 잘 보려고 혼자서 명상에 잠겨 자기의 생각을 말하려 들 때 새로운 시네필들에게 그 노력이 일종의 영화적 문맹이거나 혹은 부질없이 관념적인 잡담처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 혹은 지식이 이들을 간섭하려들 때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보는 쪽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 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할리우드영화가 있다. 이제 영화를 볼 때 시각적 플롯이나 시간적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코드를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코드를 놓치면 더이상 영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MTV는 새로운 감상방식을 교육했고, 게임은 내용보다 룰이 중요한 플롯을 만들었으며, (펄프 소설과) TV와 팝송과 만화는 영화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멀티플렉스는 거의 테마파크가 되었으며(혹은 그 역을 성립시켰으며), 속편 시리즈물은 영화를 박스 세트로 부풀렸고, 웹은 지구상의 모든 관객에게 각자 자신의 ‘사이버 지면’을 가진 블로그 영화평론가로 만들었으며, DVD 서플은 해설로 해석을 대체하였고, 유튜브는 명장면 발췌의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영화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의 일부가 되었다. <시민 케인>을 잘 보기 위해서는 리뷰를 찾는 대신 이 영화를 백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임 낫 데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번 보는 쪽보다 웹 사이트를 뒤지는 쪽이 낫다. 이제는 검색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선택하느냐가 얼마나 적합한 미학적 용어를 알고 있느냐보다 그 영화의 핵심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이 새로운 영화들의 핵심은 정보를 미학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 미국영화, 말 그대로 정보의 바로크적 네트워크.
우리 주변에 만연한 이상한 태도 중 하나는 할리우드영화가 바보 같다고 그냥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다. 사태는 정반대이다. 바보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위대한가?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어떤 이들은 정보로 이루어진 미국영화가 단지 하부의 뇌만을 자극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부의 뇌를 자극하는 영화만 다루자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머리 안에서 영화가 작동한다면 그때 상부와 하부는 동시에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한쪽없이 다른 한쪽이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표현주의영화들은 필름누아르와 하드보일드와 공포영화와 뒤섞였으며, 러시아 몽타주영화들은 갱스터영화들과 뒤섞였으며,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영화들은 멜로드라마와 뒤섞였으며, 네오리얼리즘영화들은 텔레비전과 뒤섞였으며, 모더니즘영화들은 MTV와 뒤섞였으며, 홍콩영화들은 액션 미장센이 되었으며, (… 등등) 변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미국영화의 ‘지금’을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동시대 영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데없는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상황은 거의 전면적이고 게다가 ‘여기’서 재생산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저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그리고 그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혹은 당신의 컴퓨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동의를 제안하는 것이다. 같은 말의 다른 테제. 나는 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 미국영화의 전술 앞에서 우리가 새로운 유격전을 벌이기 위해 재빨리 함께 새로운 사유의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말하자면 이 글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훈련을 위한 사용자의 가이드북을 만들려는 일종의 예비적인 서론으로 읽혀야 한다. 가벼운 몸 풀기, 너무 헤비하지 않게. 약간 성공적이고 대부분 엉성하지만, (스포일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그렇지만’ 전선의 약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미스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른 영화에서 얻은 경험으로 이해를 요구하는 <미스트>
(그러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모든 것을 안개 속에 가린 상황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쪽은 투명한데 저쪽은 그냥 하얀 벽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슈퍼마켓 유리창 저편을 쳐다보는 것뿐이다. 마지막에 잠시 안개가 걷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를 보고 있으면 첫 번째 질문은 거기서 시작한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게 상관이 없어진 것일까? 여기에는 어떤 유혹이 있다. <미스트>는 영화를 보는 관객을 슈퍼마켓 안에 있는 누구와도 동일하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안개 너머의 ‘그것’과 어떤 연대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상황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듯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을 구경꾼이라고 말하기에도 다소 애매하다. 이때 관객은 슈퍼마켓 안의 희생자들이나 혹은 ‘그것’ 말고 영화 바깥의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바깥의 누군가? 그렇다. 이때 그 누군가는 이미 이것을 본(것의 반복이라고 믿고 있는) 당신 자신이다. 오늘날 제대로 매장하지 않아서 귀환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속의 증후가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이미 우리가 본 영화들의 경험이다. <미스트>는 자신의 부족한 설명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에 떠넘기고, 그런 다음 비슷한 상황을 약간 변주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두명의 군인 시체 앞에서 데이빗이 웨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다그칠 때, “막을 찢자 저쪽 구멍에서 무언가가 나왔어요”라는 대답을 할 때,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그 말은 화면 저 너머의 영화들로부터 당신이 이미 본 것들이잖아요, 라는 대답의 판본으로 읽혔다. 그래서 관객에게 다 설명되지 않더라도 끝내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어떤 우쭐거림 같은 것을 부추기고 있다. 설명되지 않은 설명된 것들, 이라는 어떤 이상한 합의. 우리에게 떠넘긴 설명.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 합의를 끌어내는 일곱 가지 판본이 있다(물론 이것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카모디 부인의 말을 따라 일곱개의 봉인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