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좁은 갱도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다. 불꽃이 튀고, 먼지가 가득 날리는 어둠 속에서 남자는 아무런 동요없이 곡괭이질만 한다.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다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지만, 그 순간 금맥을 발견한 남자는 기어서 산을 내려간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고 10여분 동안 아무런 대사도 넣지 않는다. 다니엘 플레인뷰가 금광을 캐다가 어떻게 석유를 발견하고, 양아들인 H.W.를 얻고, 석유 시추업자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기괴한 느낌으로 전개할 뿐이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남자들, 그들의 등 뒤로 펼쳐진 황무지 그리고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듯한 음울한 음악까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마치 공포영화의 전조처럼, 어둡고 불온한 공기를 화면에 잔뜩 채운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석유 시추업자의 일생을 그린다. 그리고 화사한 땅으로만 알고 있었던 캘리포니아 지역이 한때 미국 석유산업의 중심지였으며 ‘골드러시’ 이상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뒤흔들어놓은 아수라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석유 시추업자로 업종을 변경한 플레인뷰는 서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땅을 사들이고, 석유를 찾는 사업가로 맹활약한다. 리틀 보스턴이라는 지역에 석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플레인뷰는 아들 H.W.와 함께 가서 확인을 한 뒤, 지역민의 땅을 인수하여 석유를 뽑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악착같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남자. 어떤 희생도, 어떤 악조건도 마다지 않는 강인한 남자. 그는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석유뿐이었다. 그에게 석유는, 검은 황금인 동시에 검은 피였다.
그동안 폴 토머스 앤더슨이 그려낸 세계는, 인간의 욕망이 요동치는 현장 혹은 ‘산업’이었다.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드러내는 카지노가 무대다. 대표작인 <부기 나이트>는 70년대 섹스산업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섹스를 보여주기 위해 <부기 나이트>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섹스산업을 만들어낸 인간들이 누구인지를 규명하고 싶어했다. <매그놀리아>는 한 도시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 세계의 전체상을 그려내려고 한다.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통해 폴 토머스 앤더슨은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이 세계의 만화경을 통해 하나의 법칙이나 생각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펀치드렁크 러브>로 잠시 휴식을 취한 폴 토머스 앤더슨은 극단적인 남자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자신의 욕망을 결코 숨기지 않는, 그러면서도 극단적으로 사악해지지 않는 남자의 세계로. <부기 나이츠>가 섹스, <펀치드렁크 러브>가 로맨스를 보여주었다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남자, 그것도 극단적인 마초 남자의 잔혹한 분투를 그리고 있다.
정의와 연민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나의 왼발>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양극단에 놓인 영화다. 모든 것이 박탈당한 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남자와 세상의 모든 것을 얻기 위해 패도의 길을 달려가는 남자. 왼발만 움직일 수 있는 남자가 가진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욕망을 위해 기꺼이 악마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남자의 지독한 인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극단에서도 두 캐릭터는 묘하게 닮아 있다. 세상과 싸울 때 그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처한 자리가 달랐을 뿐 그들의 목표가 달랐을 뿐이다.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캐릭터는 지극히 매혹적이다. 플레인뷰는 땅을 팔라고 설득하면서, 자신의 사업은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한다. 인부들이 가족을 데리고 와서 정착하여 생활을 하고, 땅을 판 사람들도 함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미래를 원한다고. 10살짜리 아들이며 동업자인 H.W.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패밀리 비즈니스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플레인뷰는 결코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 그는 부드러운 대화나 평안한 휴식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싸워서 이기는 것,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뿐이다. 결핍을 느끼면서도,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미망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여성에게도, 종교에도, 그 무엇에게도. 플레인뷰는 그야말로 철혈, 아니 검은 피의 남자다.
그럼에도 플레인뷰의 약점은, 어쩔 수 없이 가족이다. 양아들인 H.W.가 사고로 청력을 잃은 뒤, 알지도 못했던 이복동생 헨리가 찾아온다. 얼마 뒤 플레인뷰는 H.W.를 기숙학교로 보내버린다. 그는 아들을 버렸다. 그건 헨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들 대신 동생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지만, 그래도 가족만은 다르지 않을까, 라고 내심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플레인뷰의 사업을 인수하려는 거대 석유회사의 간부가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폭발한다. 그의 치부를, 그가 가장 가슴 아파했던 말을 듣자마자 플레인뷰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모든 치욕을 감수하고 전의를 불태운다. 해안까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할 땅을 사고, 유니온사와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헨리가 죽은 뒤, H.W.를 데려온다. H.W.는 다시 아들이자 동업자가 된다. 플레인뷰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패밀리 비즈니스였던 것이다. 아무리 계산적이고 편의적인 이유로 H.W.를 데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도 사실 플레인뷰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끈이었다.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
플레인뷰는 냉혹하고, 자신의 이익만이 목적인 사업가다. 교묘한 수법으로 선데이 가문의 땅을 얻었을 때, 석유가 나오면 그들에게 뭔가를 줄 거냐고 묻는 H.W.에게 단호하게 답한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라고. 모든 땅을 사지 않아도 지하에 묻힌 석유를 퍼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플레인뷰는 정의와 연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플레인뷰를 미워할 수가 없다. 플레인뷰는 냉혹한 사업가이지만 사악한 인간은 아니다. 무엇이 진짜 이익인가를 따진 뒤에 나오는, 아주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결정이긴 하지만 인부가 죽으면 최선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마을을 위해서도 일부를 베풀어준다. 플레인뷰를 움직이는 것은 단지 사업적인 판단이다. 가족도, 사랑도, 사업에 우선하지 못한다. 플레인뷰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결국은 합리적인 판단과 끝없는 욕망 때문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돈과 욕망의 사악한 측면이다. 스스로 망가지지 않아도, 아무리 합리적인 판단으로 일관해도 플레인뷰는 이미 늪에 빠져든 것이다. 결국은 플레인뷰도 약한 인간일 뿐이다. 아마도 플레인뷰는 결코, 단 한번도 자신의 약함을 돌아보지 않았겠지만.
권력과 자본, 그것을 쫓는 순수한 악마성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면서도, 공간 자체는 어딘가 시대를 초월한 것 같은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이상향이 아니라 이곳 어딘가에 늘 존재할 것 같은 연옥의 모습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업튼 싱클레어가 1927년에 쓴 소설 <오일!>을 보고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만들게 되었다. <오일!>에는 석유 재벌 에드워드 도헤니 등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만들어낸 아놀드 로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로스의 아들이, 소년 목사 엘라이 왓킨스를 중심으로 한 광신적인 신도들과 공모하여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이야기다. 앤더슨이 잘 알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석유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아수라장은, 그의 관심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앤더슨은 책의 초반 150장에 이끌렸다. 그의 관심은 석유 재벌 자체가 아니라, 석유를 찾아 헤매고 다른 사업자들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또한 이상적인 신앙에 대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원작과 다르게, 폴 토머스 앤더슨은 다니엘 플레인뷰와 엘라이 선데이의 대립을 중심축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앤더슨은 그들이 카인과 아벨의 관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의 믿음 아래에서 존재하는 카인과 아벨의 관계와는 달리 플레인뷰와 선데이에게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플레인뷰와 선데이는, 각각 자본과 종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레인뷰는 종교가 단지 위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시추를 시작하기 전에 축성을 해주겠다는 선데이의 제안을, 플레인뷰는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선데이에게 주기로 약속한 돈도 주지 않는다. 플레인뷰가 보기에 선데이의 교회는 그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기일 뿐이다. 하지만 선데이의 입장은 어떨까? 선데이의 교회는 그저 사이비 종교에 불과한 것일까?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전까지, 모든 종교는 사이비로 간주된다. 인정을 받는 조건은 간단하다. 지나치게 반사회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사회적 권력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플레인뷰가 선데이와 타협을 하게 된 이유도, 선데이의 교회를 거치지 않고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절대로 이상적인 신앙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종교집단이 목표로 하는 것은, 신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자본가가 자신의 왕국을 이루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집단은 어떤 돈이건 상관없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자본가와 손잡고, 자본가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상관하지 않고 종교를 이용한다. 서로의 이해에 따라 자본과 종교는 하나가 되지만, 사실 그들은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다. 플레인뷰와 선데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게다가 석유와 종교라면, 21세기 현재의 세계 정세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중동의 석유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것은 미국의 정유업체이고, 그들은 공화당의 강력한 후원자다. 공화당의 든든한 지원세력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중동에서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중동의 이슬람 왕족, 귀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9·11 테러의 원흉인 오사마 빈 라덴의 가문과 부시 가문의 관계처럼. 하지만 그런 결탁과 달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다. 석유와 종교를 둘러싼 이합집산은 결국 수많은 폭력과 증오를 불러올 운명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석유를 포함한 자본가와 종교의 모순적인 대립에서, 결국은 자본가의 우위를 말해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플레인뷰는 선데이를 폭행하며 자신이야말로 ‘세 번째 예언자’라고 외친다. 교회가 자신을 굴복시켰지만, 결국은 종교까지도 집어삼킨 악마가 바로 플레인뷰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뿐인 승리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플레인뷰의 끝이 도래한다. 그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 이 세계도 종언을 고한다. 그의 세계는 완벽하게, 그의 왕국이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선인과 악인이라는 일반적인 분류로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이다. 이 세계가 그렇듯이, 천박하고 유치한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 비열하고 잔인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날것의 증오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악마성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석유는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인다
미국 캘리포니아 석유산업의 역사
1500년대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미 아스팔트 형태의 석유를 파내 바구니 등의 물건에 방수 처리를 하고 있었다. 이민자들은 1850년 무렵부터 석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 피코 장군이 처음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석유를 증류하여 자택에서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석유를 난방과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1865년에는 주로 농사를 짓던 센튜럴 발리에 첫 유전이 개발되었다. 유전 개발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번영을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석유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땅을 수직으로 파고들어가는 장비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땅을 판다고 해도 그곳에서 석유가 나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게다가 석유가 나온다 해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불이 나면 큰 재해였다. 그러나 골드러시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은 무모한 모험가는 물론 열정과 혜안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캘리포니아로 끌어들였다. 1888년에는 애덤스 넘버 식스틴이라고 명명된 캘리포니아 최고의 유전이 발견되었고, 캘리포니아 석유산업의 가능성이 증명되었다. <자이언트>에서 보았던 것처럼, 유전을 발견하는 사람은 당시 최고의 부자 대열에 낄 수 있었다. 1910년 캘리포니아의 석유 생산량은 대략 7700만 배럴이었고, 전세계 석유 사용량의 70%를 공급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석유산업은 10여년 정도 호황을 이루다가 대공황이 찾아왔을 때에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석유회사들은 해외로 석유를 찾기 시작했고, 다국적 회사로 발전해갔다.
석유가 발견된 유전 지역은 동부에서 몰려든 일꾼과 사업가 그리고 범죄자들까지 뒤엉켜 ‘블랙 골드러시’로 급변했다. 매춘부와 도박꾼이 자리를 잡았고, 향락과 방탕의 기운이 넘쳐났다. 샌타바버라 외곽에 있는 섬머랜드라는 마을은 조용하고 종교적인 마을이었지만, 유전의 발견으로 순식간에 술집, 하숙집, 창녀촌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문화적 충돌이 극심해진 가운데 마을 주민들은 당시 최대 석유업자 중 하나였던 폴 게티의 유전을 파괴하는 등 폭력사태까지 이어졌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보이는 기존 주민, 교회와의 갈등은 당시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