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데어 윌 비 블러드>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 인터뷰
2008-03-11
정리 : 정재혁
“사람들이 어떻게 땅에서 석유를 얻어냈는지 궁금했다”

-업튼 싱클레어의 1927년 소설 <오일!>을 원작으로 택했다. 어떻게 그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됐나.
=책을 처음 본 게 런던 코벤트 가든에 있을 때였다. 그냥 웅장한 느낌의 빨간 글자 제목이 놓치기 힘들었다. 느낌표까지 붙어 ‘Oil!’이라고 써 있더라. <더 정글>을 비롯해서 이전에도 싱클레어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읽고 나니 엄청난 책이었다.

-각색은 어떤 식으로 진행했나.
=각색을 해본 건 처음이다. 물론 예전에 러셀 뱅크의 소설 <룰 오브 더 본>을 각색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처럼 느껴졌다. <룰 오브 더 본>은 정말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대로 좋아하는 부분에 밑줄을 치며 작업했는데 나중에 보니 모든 구절에 밑줄이 쳐 있더라. (웃음) 나중엔 중요한 부분에만 밑줄을 치라고 했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라 그렇게 했다. (웃음) 그냥 옮겨 적었다. 하지만 이번엔 원작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게 절실했다. 일단 책에서 마음의 드는 장면을 훔쳤다. 지금도 각색하던 때 내 책상이 떠오르는데 굉장히 많은 스크랩과 종이, 20세기 석유산업에 대한 자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번 영화는 책 외에도 다른 많은 자료들에서 나온 셈이다. 물론 책이 훌륭한 디딤돌이 되었다. 업튼 싱클레어가 당시 석유 산업에 대해 쓴 구체적으고 핵심적인 정보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걸 영화로 만들지 못했을 거다. 소설이 500페이지가 넘고, 중반부 이후 이야기가 원래 스토리에서 멀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영화는 처음의 몇백 페이지 정도만을 텍스트로 택했다. 우린 정말 원작에 불충실했다. (웃음) 하지만 그게 내가 책을 싫어해서는 아니다. 다만 책은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각색의 범위를 넘어 당신은 항상 연출자보다는 작가가 더 좋다고 말해왔다.
=영화는 각본에서 시작하고 각본에서 끝난다. 각본이 좋으면 연출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각본이 좋지 않다면 연출은 정말 어려워진다.

-처음부터 주인공인 대니얼 플레인뷰 역할을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각본을 쓰는 도중 꽤 빨리 결정하긴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특정 누군가를 위해 각본을 쓰진 않는다. 그건 어떤 누구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하거나 가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대니얼이 출연한 영화를 몇편 봤었고, 그를 배우로서 존중하지만 그를 잘 몰랐다. 그냥 이 영화가 일종의 성스러운 큰 접시처럼 느껴졌고, 주인공인 남자를 잘 그리고 싶었다. 물론 어느 시점 이후부턴 대니얼 역은 대니얼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반 정도 완성된 각본을 보냈다고 하던데.
=그때는 대니얼과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뒤였다. 그가 <펀치 드렁크 러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다. (웃음) 나에겐 일종의 용기였고, 위험도 있는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마음에 들어해서 잘된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내가 그 당시 용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대니얼과는 어떤 식으로 함께 영화를 준비했나.
=각본을 주기 훨씬 전에 두달 정도 함께 뉴욕에서 지낸 적이 있다. 같이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강아지들이 킁킁거리며 서로 탐색하는 것처럼. 그러다 함께 영화를 하자는 이야기가 막연하게 나왔고, 이후엔 나는 캘리포니아로, 대니얼은 아일랜드로 돌아가 자기 일을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아이가 생겼고, 대니얼은 허리를 다쳤다. 인생이란 게 그렇게 갑자기 다른 일이 생기곤 하는 것 같더라. 또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처음 2주일은 정말 시작점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잘 진행이 안 되더라.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웃음) 영화를 찍으면서도 대니얼과 나는 섣불리 ‘피를 부르리라’(There will be Blood)라 말하지 못하고 ‘피를 부를지 모른다’(There might be Blodd)라고 했다. 마지막 촬영분을 보고서야 서로 ‘그래 이제 데어 윌비 블러드라 해도 되겠어’라고. (웃음)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준비하면서 존 휴스턴 감독의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을 반복해 봤다고 들었다.
=그건 좀 과장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좋았던 건 세 남자 사이의 역동적인 대화다. 또 영화의 전통적인, 직접적인 방식의 스토리텔링. 그건 내가 영향받은 요소다. 남자들이 서로 앞다투는 과정, 광기와 망상증을 매우 간단하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서술한다.

-대니얼 플레인뷰는 순수한 기업가이자 웨스턴 자본주의의 개척자지만 한편으론 땅 투기꾼이거나 석유 폭리업자다. 당신은 대니얼에게 도덕, 양심이 있다고 생각했나.
=난 그에게 양심이 있다고 믿는다. 양심은 일종의 슬라이딩 스케일(sliding scale: 주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오르고 내리는 방식) 같은 거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선 무엇이든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세계가 무엇인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선 평가할 수 없다. 내가 작은 역할로 캐스팅하려고 했던 존 카메론 미첼은 영화를 본 뒤 나에게 “사랑과 가족에 대한 모든 걸 제외하고, 부정한 공화국 연맹이 태어나는 순간을 보는 건 훌륭했다. 그 연맹은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죽게 될까”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나는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뉴요커>의 영화 리뷰를 보니 당신을 비관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썼더라. 대니얼의 속성을 당신도 가지고 있나.
=그렇다. 수용하겠다. 물론 예스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건 미친 짓이다. 우리는 모두 살인같이 잔인한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사회화되어 억누르고 있지만.

-영화는 원작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원작 소설이 자본주의와 정치,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라면 영화에선 종교와 비즈니스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그렇다. 내가 처음 책을 본 게 6∼7년 전이었다. 그때 미국은 버블 경제도 아니었고, 원작 속 상황과는 많이 다르니까 이야기가 변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나는 캘리포니아 출신이라 석유가 많이 나는 베이커스필드에 호기심도 있었고, 그냥 사람들이 어떻게 땅에서 석유를 얻어냈는지 궁금했다.

-영화엔 노동과 육체성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되어 있다.
=석유를 찾아내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좋은 텍스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생각, 입장을 결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니얼은 나에게 새로운 걸 만들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라고 자주 묻곤 했는데 그건 매우 좋은 질문이다. 석유를 찾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 이게 중요했다.

-당신의 이번 영화를 이라크, 부시, 자본주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사람들도 있더라.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앉아서 각본을 어떤 의도로 썼든 이미 완성된 영화는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물론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건 이야기 자체다. 서로 싸우는 두 남자의 필수 불가결성. 하지만 여기서 석유와 종교의 이야기를 피할 순 없다. 우리가 정치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건 끔찍하지만, 정치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건 바로 그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의미다. 이건 마치 타이태닉 같다. 타이태닉이 가라앉았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왜, 어떻게 인지는 모른다. <데어 윌 비 블러드>도 어떻게 끝나는지는 다 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 일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태어날 수 있었는지다.

-영화음악의 모든 스코어들이 극단적으로 도전적이다. 당신 영화를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선택한 영화음악에 동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와는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조니가 음악을 만든 다큐멘터리 <보디송>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비오는 오후에 보았다. 그의 음악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보디송>의 음악도 좋았다. 그리고 조니가 작곡한 <Popcorn Superhet Receiver>를 들었다. 사운드가 너무 좋아 반복해서 들었다. 계속 스테레오가 남아 있는 느낌이랄까. 각본을 쓰면서 조니에게 음악을 부탁했고, 그와 메일로 데모를 주고받으며 작업했다. 보통 영화에서 결국 마지막에 함께하는 파트너는 편집감독과 음악감독이다. 조니가 음악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그가 영화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 알겠더라. 그게 매우 도움이 됐다. 나는 그 무렵에도 영화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의 포인트 같은 존재다. 이전까지 만들어놓은 작업의 방향을 부숨과 동시에 새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데어 윌비 블러드>는 당신의 전작들과 스타일이나 연출방식이 다르다. 변화에 대한 의도가 있었나.
=글쎄, 내 스타일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어둡긴 하다. 하지만 난 그게 좋다. 이번엔 그게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일종의 익숙한 영역(comfort zone)을 넘어선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좋은 경험이었다.

(이 인터뷰는 <가디언> <필름메이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 베를린영화제 공식 기자회견 인터뷰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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