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다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홍콩인들이었다. 홍콩영화의 특징은 집이 없다는 것이다. 혹은 집이 있더라도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에게 할아버지의 나라(祖國)란 상상 속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진 한족들의 나라 명조(明朝). 영국 식민지의 도시. 2046년 ‘완전한’ 중국 반환. 그들은 집이 없기 때문에 미국에 갈 때 버려야 할 것이 없었다. 오우삼은 오마주를 먼저 찍은 다음 원본의 나라에 왔다. <페이스 오프>에서 도대체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가를 놓고 좁은 방에서 서로 뒤바뀐 얼굴의 두 주인공이 거울을 마주보면서 총을 겨눌 때 오마주는 거의 어떤 물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진다. 서극과 임영동은 할리우드에 간 다음 그러나 곧 다시 돌아왔다. 할리우드를 방문해서 가장 성공한 홍콩인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무술감독인 원화평일 것이다. 그는 무술영화의 동작과 할리우드 테크놀로지를 (들뢰즈의 유머를 빌리자면) ‘코넥션’(connexion)시켰다. <매트릭스>는 홍콩영화가 할리우드의 욕망하는 기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간단한 예이다. 할리우드에 등록된 무협영화, 사라진 홍콩영화.
왕가위는 미국을 방문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지 않았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미국에서 찍었지만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다(그리고 이 영화는 프랑스 제작사 카날 플뤼의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왕가위가 크리스토퍼 도일 대신 다리우스 콘지를 선택했지만 나머지 스탭들은 모두 홍콩에서 만들 때와 같다(왕가위가 이 영화를 작업하고 있을 때 크리스토퍼 도일은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를 찍었다). 우선 왕가위가 선택한 프레임. 왕가위는 안토니오니의 화면 사이즈를 선택했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2046>에 이은 두 번째 2.35영화이다. 그러나 음악의 동반자는 빔 벤더스의 화면에 슬라이드 기타의 보틀 네크 연주를 더한 라이 쿠더를 초대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와 레슬리가 라스베이거스로 향할 때 이상하게도 <파리 텍사스>를 다시 한번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왕가위가 미국에서 스스로에게 바치는 오마주
다시 보는 듯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본 다음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불만은 이 표현의 반복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영화가 흥미롭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있는데도 마치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건 허우샤오시엔을 볼 때도 그렇고 홍상수도 그렇다. 그 셋의 차이가 그들의 방법의 차이이다. 허우샤오시엔에게서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은 세상을 대하는 그 애티튜드 때문이다. 홍상수에게서 이미 본 듯한 느낌은 장소를 다루는 인상의 매너에서 오는 것이다. 왕가위의 미국은 일종의 데자뷰다. 왕가위는 어딜 가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집이 없는 홍콩. 홈리스로서의 홍콩. 애티듀드와 매너와 데자뷰의 삼항 관계. 여행을 하는 세명의 아시아인의 세 가지 방법.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여행을 하는 세 가지 믿음. 허우샤오시엔은 파리에 간 다음 유교적인 애티튜드로 타인의 삶을 대한다. 홍상수는 파리에서 문득 성경을 붙들고 욕망을 좇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 다음 죽은 아이가(임신 중절) 다른 여자의 배 안에서 부활하고, 그것을 피해서 서울로 도망왔을 때 거짓말과 마주한다. 아내의 배는 비어 있고, 부활은 중단된다. 말하자면 기독교적 순환의 중단. 왕가위는 도교적인 꿈을 꾼다. <중경삼림>의 빈자리에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시작되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끝날 때 <중경삼림>의 마지막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미국에 왔지만 홍콩에서 영화를 진행할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경삼림>에서 두개의 캘리포니아, 그러니까 카페 캘리포니아와 미국 캘리포니아 사이에 놓인 거리는 접힌 다음 펼쳐지고 그런 다음 다시 접힌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는 제르미를 하나의 꼭지점으로 하여 엘리자베스는 그 선을 할 수 있는 대로 늘려본다. 뉴욕에서 처음에는 멤피스까지, 그 다음에는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까지 잡아 늘인다. 이때 그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은 단지 거리의 부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는 길 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길을 떠나지만 로드무비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미국에 와서 길에 홀릴 때 그것은 자기가 떠나온 영토의 감각을 잃는 것이다. 사막 속의 하이웨이. 그 길의 끝없는 끝. 어처구니없는 스펙터클의 사라짐의 미학. 보들리야르는 미국에 대해 쓰면서 그의 책 <아메리카>의 첫 번째 장을 ‘소실점’으로 시작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미국에서 드라이브는 스펙터클한 형식의 기억상실이다”. 이런! 그러므로 왕가위가 길을 따라가면서 기억을 붙들기 위해 애를 쓸 때 사실상 그 노력은 미국이라는 대지의 유혹에 맹렬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들이 미국영화를 닮기 위해 애를 쓸 때 왕가위는 반대의 질문을 한다. 홍콩영화는 미국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홍콩은 미국영화를 자기의 집으로 삼을 수 있을까? 모든 나라의 영화에서 미래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 미국영화와 마주치는 것은 최악의 경우이다. 하지만 그걸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왕가위는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그걸 피한다. 그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만들면서 자기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다. 하지만 왕가위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그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대상의 상실을 경험한 다음 그 관계를 수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왕가위가 처음 하는 일은 자기가 점유한 장소를 거의 부수다시피하는 것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영화가 시작되고 난 다음 25분 동안, 그러니까 제르미의 카페에 엘리자베스가 나타난 다음 열쇠에 대한 사연을 듣고 뉴욕을 떠나기 전까지, 너무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거의 무질서하게 숏을 이어붙인다. 제르미와 엘리자베스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분명히 서로 마주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정면을 볼 때(90도 가상선) 다른 한 사람은 수평으로 본다(180도 가상선). 형식적으로는 성립이 안 되지만 인물이 체험하고 있는 시청각적 드라마 안에서는 진행이 된다. 이때 두숏의 교환체계는 상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적인 것이다. 카페라는 컵. 장소의 부피 안의 밀도. 그런데 이걸 정상적인 방법으로 찍으면 어떻게 해도 서로 붙지 않는다. 왕가위는 방식을 바꾼다. 제르미와 엘리자베스의 어느 숏도 프레임 안의 프레임없이 찍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때 두숏은 상대방의 얼굴을 드러내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 다리우스 콘지는 카페 안의 실내를 찍으면서도 자꾸만 바깥에 나가서 창문을 건 다음 그 유리에 네온사인을 반사시킨다. 그래서 화면 안의 네온사인이 반사광인지 아니면 실내조명 아래 화면 안에서 빛을 만들고 있는지 모호하게 만든다. 2.35 사이즈에서 창문틀은 종종 화면을 나누거나 가로막고, 초점 거리는 짧아서 인물들은 쉽게 지워진다. 게다가 시종일관 들고 찍은 카메라는 거의 숨쉬는 것처럼 흔들리거나 움직인다. 종종 숏과 숏 사이가 디졸브처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그리고 실제로 몇개의 숏은 그렇게 이어붙였다). 그런데 그걸 붙이기 위해서 그렇게 찍은 것일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렇게 찍기 위해서 그렇게 붙이고 있다고 말해야만 이 장면을 설명할 수 있다. 지나치게 테크놀로지의 수사학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자, 다소 시적인 감흥으로 이 신 전체를 다소 지그시 바라보자. 나는 이 카페 자체가 마치 블루베리 파이 위에 얹힌 아이스크림의 환유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진짜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파이와 그것과 같은 모습으로 찍힌 카페가 있다. 장소는 번져나가고, 두명의 미래의 연인, 그러니까 제르미와 엘리자베스의 몸은 거의 흘러내린다. 번져나감과 흘러내림. 감정이라는 컵의 부피. 그것이 흘러 넘쳐난다. 그래서 프레임 위에서 마치 빛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면 사이로 번져나가고, 제르미와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일종의 반사판처럼 보인다. 활동하는 반사판. 차라리 반사판의 동선. 혹은 얼굴은 장소가 만들어내는 면의 일부처럼 다루어진다. 왕가위가 장소 안의 인물을 다룰 때 윌렘 드 쿠닝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카페와 세상 사이를 나누는 유리창을 볼 때 자꾸만 잭슨 폴록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떤 상징이나 은유도 없이 밀도만으로 채워진 프레임. 미국을 명상하는 방식.
그런 다음 왕가위는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낸다. 엘리자베스는 뉴욕의 반대편을 향해서 떠나고, 제르미는 뉴욕에 남아서 그녀를 기다린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는 분신이라고 할 만한 반대의 자리에 간다. 뉴욕으로부터 3906마일. 그리고 185일 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다시 보는 듯하다는 느낌은 이 영화가 왕가위의 이전 영화를 반복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엘리자베스가 멤피스에 갔을 때 바에서 제르미가 했던 역할을 이번에는 그녀가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가 제르미의 자리에 가고 엘리자베스의 자리에 어니가 온다. 그러나 어니와 엘리자베스의 차이는 엘리자베스의 연인은 그녀를 찾아서 레스토랑에 오지 않지만 어니의 옛 아내 수린은 새로운 남편과 함께 찾아온다. 자, 두개의 선택이 있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의 애인이 차라리 나타나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그가 다른 애인을 데리고 그 자리에 나타나는 편이 나을까? 증명1. 왕가위는 하나의 이야기를 두개의 버전으로 만든다. 왕가위의 말을 빌리면 하나는 자기의 버전이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다른 하나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버전이다. 그래서 그는 이 두 번째 이야기를 테네시주의 멤피스에서 찍는 것이 중요했다. 그냥 간단하게 하나는 홍콩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버전이다. 하나는 하여튼 상실한 마음을 안고 멜랑코리에 빠진 채 이미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아직도 사랑하면서, 내 안에 든 상대방을 아직도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미워하면서, 미워하는 상대방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나를 미워하면서, 미워하는 나를 살려내기 위해서, 불면증의 여행을 떠난다. 다른 하나는 그냥 자살해버린다. 엘리자베스가 어니의 교통사고로 위장된 자살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 것은 그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자기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명백히 멤피스의 바는 뉴욕에서 찍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개의 장소는 거의 동일한 장소처럼 찍혔다. 증명2. 이 두 번째 버전의 첫 도입부는 신기하게 찍혔다. 거의 술에 취해 쓰러질 듯한 어니에게 엘리자베스는 계산서를 가져다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이 장면은 나눠 찍었는데 그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그래서 마치 같은 사람을 찍은 것처럼 숏은 상대방을 주고받는다. 말 그대로 분신의 전이. 자신의 자리에 자신과 같은 사람을 호명한 다음 상대방을 쳐다보는 척하면서 자기를 바라보기.
물리적 공간을 시간적인 물화로 만드는 마술
왕가위는 이 둘을 분리한 다음 그 둘 사이를 연결하지 않기 위해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마치 20세기에 만들어진 영화처럼 진행시킨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서로에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지 않으며(아니, 차라리 그들은 휴대폰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아무도 이메일을 하지 않는다(이 영화에는 노트북이나 컴퓨터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르미는 구태여 카페에 놓인 구식 전화기로 멤피스의 모든 레스토랑에 일일이 걸어 엘리자베스를 찾고, 엘리자베스는 이메일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엽서를 써서 제르미에게 보낸다. 다만 레슬리에게 병원에 있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올 때에만 휴대폰으로 받는다. 그런데 그 전화를 받는 장소는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모래사막 위에서다. 근처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없고, 전화를 걸 수 있는 레스토랑도 없다. 말하자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는 디지털의 감각이 없다. 이때 이 문제는 단지 소도구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영화가 통신수단을 제한하면 공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방식이 바뀐다. 이를테면 이 장소와 저 장소를 붙일 때 전화는 두 장소의 숏을 시간적으로 동시적인 인접성의 공간으로 만들어서 하나의 집합으로 만들지만 편지는 두 장소의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지체를 도입함으로써 분리시킨다. 그런데 왕가위는 여기서 엽서를 전화처럼 사용한다. 엽서를 쓸 때 그 위에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덧입혀지고, 엽서는 목소리와 함께 발송된다. 이것을 단지 존재를 대신한 목소리, 그러니까 음성-존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환기해야 할 사실. 왕가위의 영화에서 목소리는 항상 이미지보다 늦게 도착했으며, 그래서 언제나 보이스 오버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사후적으로 만들었다. 시간의 지체. 하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그것이 엽서라는 이유로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지체된 물리적인 공간의 시간적 물화이다. 마술은 여기에 개입한다. 엽서는 금방 도착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엽서를 쓰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그것을 낭송하고 미처 다 읽지 못했을 텐데 이미 그 엽서는 제르미에게 도착해 있다. 제르미는 엽서를 읽고 있고, 아직도 엘레자베스의 목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이때 보내진 것은 엽서지만 그것을 진행하는 방식은 전화를 거는 것처럼 붙어 있다. 그런데 엽서와 목소리의 불일치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시간 감각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와 제르미를 종종 장소가 분리된 채 시간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동시적인 진행을 보는 것처럼 숏을 붙였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낮이면 제르미의 시간은 밤이다. 낮과 밤. 그런데 그게 정말 성립이 될까? 미국이 넓긴 하지만 동쪽 끝 뉴욕에서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까지의 시차는 고작해야 3시간이다. 그런데도 왕가위는 마치 그 둘이 점점 멀어지면서 엘리자베스가 라스베이거스에 왔을 때 마치 그녀가 제르미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이 신기한 거리 감각. 홍상수의 거리가 유물론적이라면 왕가위의 거리는 정서적이다. 이를테면 <해피 투게더>의 한 장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휘는 고향 홍콩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전화를 건다. 그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홍콩을 보여줄 때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는 거꾸로 뒤집힌 채 느리게 거리를 달려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면 홍콩은 그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종종 우리가 지구 위에 산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엘리자베스는 5603마일이나 멀리 떠나서 두개의 죽음을 본 다음 뉴욕으로 되돌아온다. 그때 두개의 죽음은 끝내 자기를 남편으로 믿었던 한 남자의 죽음과 세상을 믿지 못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딸을 기억한 한 아버지의 죽음이다. 두번 모두 남자가 죽었고, 두번 모두 여자가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죽음과 함께 살아남기.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과 함께 살아야 한다. 수린은 어니가 남겨놓은 외상을 갚으면서 계산서를 바에 붙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어니를 사람들이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그 말은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레슬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던 재규어 자동차를 다시 돌려달라고 말하면서 그건 아버지가 준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죽은 자와 함께 살아가기. 말하자면 이 두개의 죽음은 엘리자베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아무 메시지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왕가위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식 생활방식 안의 공허. 한번은 죽은 상태로부터 죽은 존재에로. 또 한번은 죽은 관계로부터 죽은 대상에로. 텅 빈 멜랑콜리. 두번의 죽음 모두 슬픔은 있지만 비극의 정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번 모두 그런 다음 슬픔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런데 두번 모두 도망치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 수린은 멤피스를 떠난다. 레슬리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난다. 엘리자베스는 반대로 돌아온다.
지구라는 컵을 채울 수 있는 왕가위만의 시선
두 가지 질문. 엘리자베스는 정확하게 누구에게 돌아온 것일까? 마지막 시퀀스, 그러니까 300일이 지나서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 엘리자베스는 제르미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르미가 카페를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곧장 그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 그녀는 뉴욕을 떠나던 날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옛 애인이 새로운 여자와 함께 있던 그 창문 아래로 다시 간다. 그런데 그 창문의 불은 꺼져 있고, 그 앞에는 ‘임대’라고 붙어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고 환하게 웃는다. 그런 다음 그녀의 발길은 제르미에게 향한다.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왜 돌아온 것일까?
가정. 엘리자베스가 제르미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녀 자신의 대상에게로 돌아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 대상이 제르미이건 아니건 그녀에게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엘리자베스의 여행을 오해하면 안 된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떠난 것이지, (그녀 자신의 말을 빌리면) 잊기 위해서 떠난 것이지, 제르미와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잊어버렸기 때문에 돌아온 것일까? 그런데 왜 옛 애인의 창문 아래 가서 확인하는가? 내 질문의 핵심은 이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중단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녀가 두개의 죽음을 본 다음 떠나가는 대신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상대방의 사랑의 증상이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저 창문의 불이 꺼졌을 때, 더이상 저기 잊지 못하는 애인이 없을 때, 엘리자베스는 창문 너머의 저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볼 필요가 없다. 비로소 그런 다음에야 제르미의 카페를 방문한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더이상 증상이 아니다. 그러나 증상이 중단될 때 대상이 된다. 다시 기표의 놀이가 시작되고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다. 새로운 은유. 새로운 치환. 사랑은 새로운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이번에 떠맡은 자리는 블루베리 파이와 아이스크림이 흐르는 그 컵이다. 제르미는 그 컵을 맛있게 핥고, 빨고, 그런 다음 마셔버린다. 아니, 차라리 먹어버린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 키스장면은 감정이 넘쳐난다기보다는 리비도가 넘치고 있다. 만일 <중경삼림>을 빌려서 비유하고 싶다면 제르미에게 엘리자베스는 경찰관 633(양조위)에 대한 아미(왕정문)가 아니라 차라리 감정을 가진 비누, 눈물을 흘리는 수건이(된)다. 무엇보다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키스가 끝나고 나(고 자막이 떠오르)면 <화양연화>에서 우리가 들었던 유메지의 테마가 흐르기 때문이다. <화양연화>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공통점은 영화에서 단 한번 키스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화양연화>에서의 키스는 차우 선생과 수리첸이 하는 것이 아니다. 차우 선생이 앙코르와트에 가서 돌기둥의 구멍에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키스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키스가 말하자면 그 키스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나는 <화양연화>에서 차우 선생의 앙코르와트에서의 키스를 보았을 때 어떤 숭고한 느낌을 받았다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는 외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리비도의 허기. 그것을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환상의 제스처를 취한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반쯤 자고 있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제르미와 키스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꿈속에서 만나고 있는 옛 애인과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여기에는 상대가 불확실하다. 이때 환상 안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비대칭성은 제르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제르미는 엘리자베스에게 키스하기 위해 다가간다기보다 오히려 키스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키스하기 위해 블루베리 파이 위에 흐르던 아이스크림이 묻은 입술에 혀를 댄다기보다는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혀를 입술에 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이때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괄호쳐진다. 이 말의 불경스러움.
이때 왕가위는 엘리자베스와 제르미의 키스장면을 갑자기 부감한 다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이 찍는다. 달나라에 가장 먼저 우주선을 쏘아올린 나라. 인공위성으로 내려다보는 숏. 그때 엘리자베스와 제르미의 두개의 얼굴이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서로 연결함으로써 마치 하나처럼 보일 때, 이상하게도 그 형상은 우주에서 내려다본 미국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지구를 내려다보는 왕가위의 숏. 이미 바로 위에서 예를 든 <해피 투게더>의 반복. 아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전화를 걸 때 홍콩에서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뒤집힌 채 카메라가 거리를 달려가던 바로 그 숏. 지구라는 컵의 부피.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 미국식 키스. 그런 다음 왕가위 식으로 말하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95분12초, 그러니까 8568피트 필름이 모두 돌아가고 난 다음 5프레임을 더 보면 끝난다. (네 번째 유격훈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