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여인> 충남 태안군 신두리
누구도 홍상수 감독에게 사랑의 판타지를 기대하지 않지만, 신두리를 찾는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낭만을 기대할 것이다. 내 기억에 바닷가에는 늘 낯선 이성이 있었고, 가끔씩 그들과의 짤막한 연애를 그려보기도 했으니까. 중래(김승우)와 선희(송선미) 역시 바닷가에서 만난 낯선 이성들이었고, 휴가지에서의 연애가 늘 그렇듯 그들의 연애도 결국엔 시시하게 끝이 나버린다. 실제로 신두리는 인파가 북적거리는 여느 해변과 달리 인적이 드물고 식당들도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저녁으로 사라지는 해를 보고 있노라니, 신두리 어딘가에서는 분명 남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몰을 보며 바닷가를 거닐면 낭만보다는 쓸쓸함이 앞선다. 쓸쓸해진 이들은 이성과의 만남에 목마름을 느낄 것이고, 자연히 바닷가에서 스친 낯선 이성에게 수작을 걸게 되지 않을까. 물론 여름도 아니고 휴가철도 아닌 4월 어느 날 이곳을 찾은 낯선 남자에게는 전혀 가능성없는 이야기겠지만.
<봄날은 간다> 강원 삼척 대나무 숲
그녀에게 닿기 위해 한밤중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의 마지막은 치졸했다. 그리도 애타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던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변했다. 누구에게나 연애의 끝은 허무하지만, 과정만큼은 하염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일 것이다. 허진호 감독은 삼척 대나무 숲에서 사랑을 싹틔우는 두 남녀의 심리를 아름다운 풍광에 녹여냈다.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덩달아 가슴 뛰는 곳. 대나무 숲에는 설렘이 있고, 낭만이 있고, 작은 두려움마저 공존했다.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설렘과 낭만이, 찢어지는 아픔과 감정 소모전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크면 클수록 두려움은 더욱 크다. 그때 나는 무슨 다짐을 했던가. 담담하게 흔들리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던가, 그래도 답은 사랑뿐이라고 했던가.
<추격자> 서울 성북동 개미슈퍼
<추격자>가 동원한 관객 수가 400만명을 넘겼다는 소식을 접한 어느 날 찾아간 개미슈퍼는, 영화 속에서 보인 간판도 없고 문도 굳게 닫힌 모습이었다. 원래 구멍가게가 있던 자리도 아니었고 지금은 누군가 창고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성북동 개미슈퍼 자리에 진짜 개미슈퍼는 없었지만, 분명 우리 현실 어딘가에는 개미슈퍼들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범인이 결국 검거되지 못한 것처럼 이 도시의 어딘가에는 또 다른 지영민(하정우)이 제2, 제3의 피해자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 속 비극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개미슈퍼가 자리한 성북동 골목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모습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환한 대낮 개미슈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기억하는 한 관객에게 그 광경이 예사롭게 보일 리 없었다. 지나가는 발걸음과 자동차 라이트의 불빛이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던 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천년학>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
청매실농원에는 매화 축제가 한창이었지만, 일찌감치 만개한 매화꽃은 이미 상당 부분 떨어져나간 모습이었다. 혹자는 매화가 바람에 날리는 모양을 눈이 내리는 풍경에 비유한다. 하지만 비가 온 뒤 다시 추위가 찾아온 2008년 어느 봄,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들이 나비처럼 날았다. 그리고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꽃잎들은 안착할 곳을 찾아 헤매는 듯했다. <천년학>에서 백사노인이 죽을 때 흩날렸던 꽃잎은 눈먼 송화의 떠돌이 인생을, 아니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삶을 은유하는 것이었을까?
<밀양> 경남 밀양 카센터
밀양 ‘서광 카 경정비’ 골목에 가면 ‘송강호 거리’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영화를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기회를 얻게 된 자그마한 도시 밀양시는 주인공 송강호와 전도연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었다. 극중 종찬(송강호)이 운영하던 카센터는 실제 카센터를 그 모습 그대로 등장시켜 영화가 내린 뒤에도 여러 번 조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강호 거리라는 푯말이 붙은 이곳에서, 내 머릿속을 맴돈 건 송강호가 아닌 전도연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달려온 길을 되돌아가는 신애(전도연)가 길바닥에 쓰러지고, 그런 그녀 옆으로 차 한대가 무심히 지나간다. 어딘가에 전도연의 눈물자국이 남아 있을 것만 같은 골목. 때때로 그 옆을 지나치는 차들만이 평일 저녁의 정적을 깼다. 영화는 간판을 내렸지만 촬영지는 남아 있고, 영화의 감동은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