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진기자 서지형이 찾은 영화 속 촬영지 [2]
2008-05-01
글·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여고괴담> 서울 전 수도여고

수도여고는 이전했지만, 서울 남영동에는 여전히 수도여고가 남아 있었다. 폐교가 된 채. 그리고 그 안에는 <여고괴담>의 공포 역시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공교육의 폭력성을 공포영화로 풀어낸 <여고괴담>의 영어제목은 ‘속삭이는 복도’(Whispering Corridors)다. 대낮에 홀로 찾은 폐교에는 속삭이는 복도들이 층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최강희가 쾅쾅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다가올 것만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복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을 복도에는 과거의 활기보다는 영화 속 공포감만이 싸늘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모습이 공교육의 실체와 일면 닮아 있는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학교의 모습 역시 폐교의 으스스한 분위기만큼이나 어둡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시작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듯 폐교를 빠져나왔다.


<친절한 금자씨> 부산 주례여고

달빛에 반사된 빗방울이 반짝거리며 부산을 밝히던 오후 9시, 주례여고 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몇몇은 곧장 큰길로 내려가고, 몇몇은 담벼락을 지나쳐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주례여고 앞 담벼락, 누군가는 이 담벼락 밑에서 소중한 딸을 다시 잃을 뻔했다. 실제 이야기는 아니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금자씨 이야기다. 현실 속 담벼락 풍경은 영화만큼 긴박하거나 음산해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을 걷는 주례여고 학생들은 시종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를 늦추지 않았다. 말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는 나이라고 했던가. 갑작스레 내린 비에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여고생들은 빗속을 뚫고 담벼락 밑을 달렸다. 그들만의 특권을 남김없이 사용하면서.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웃음소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부산 40계단

부산 중앙동역 부근 40계단은,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동포와 피난민들이 생사를 위해 오르내리던 곳이자 영화 속에서는 킬러 장성민(안성기)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갔던 곳이다. 현재 40계단을 오르내리는 부산 시민에게 생사를 넘나들던 과거의 기억은 잊혀진 듯 보인다. 계단 중앙에 자리한 ‘아코디언을 켜는 사람’이라는 동상만이 역사를 말해줄 뿐. ‘힘든 생활 속에서도 낭만을 간직했던’이라는 문구에 걸맞게 동상 뒤에는 아코디언 연주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때때로 울리는 아코디언은, 그나마도 누군가의 손이 닿아야만 연주된다. 절대 혼자서는 연주하지 않는 사나이, 그의 연주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어야만 연주를 하는 사나이. 누군가가 아코디언 사나이를 보며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어떤 것들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40계단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겠지. 이따금씩 지나가버린 것들도 애정어린 손길을 필요로 한다.


<빈 집> 서울 북촌 한옥마을 1길

선화(이승연)와 태석(재희)이 빈집을 파악하기 위해 집집마다 전단을 붙이며 돌아다니던 골목, 북촌 한옥마을 1길은 이미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요즘에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만큼 낯선 풍경을 자아낸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뻗어 있는 기와집들과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빌딩이 어우러진 모습, 집집마다 부착된 경보장치. 하지만 이 같은 풍경보다 의아했던 것은 촬영하는 몇 시간 동안 대문을 들락날락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저 담 너머에는 누가 살까, 하는 호기심을 부추겼다. 저 담 너머 어딘가에 빈집 하나쯤은 있겠지. 그리고 그곳에 가면, 그와 그녀가 그랬듯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 외로운 마음을 채워주는 빈집, 내게는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이야기일 뿐이다.


<괴물> 서울 한강 여의지구

일요일 오후. 한강 여의지구를 빽빽이 메운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풍 나온 가족들, 관광 온 외국인들, 데이트하는 연인들, 운동하는 사람들. 누구 하나 혼자 있는 사람없이, 저마다 짝을 지어 나들이하는 사람들 속에 웃음꽃이 피었다. 한강 여의지구에서 촬영된 <괴물>은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영화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느 아버지의 용기가 빛났던 영화의 촬영지에서는 또 다른 용기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과감한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는 연인, 딸이 놓친 연의 끈을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아버지, 부모 몰래 강아지를 괴롭히는 아이, 묘기에 가까운 운동을 하는 할아버지. 일요일 오후, 한강 여의지구를 거니는 사람들의 용기는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역시, 사람들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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