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스 카락스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이 전주를 찾았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보여준 불안하고 자유로운 눈빛은 여전했지만 세월은 소년같이 아름다웠던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으로 흔적을 남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에 든 봉지 안에서 색색의 필기구를 꺼내며 “딸에게 주려고 샀다”고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버지였지만, 전주영화제 초청작 <캡틴 에이헙>과 레오스 카락스의 <도쿄!> 프로젝트 <오물>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눈은 확고했고, 마임과 수화를 섞은 듯한 손동작은 창조적인 방법으로 공기를 갈랐다.
-핸드프린팅을 남겼는데, 세계에 몇 개의 손도장이 남아있나?
=처음이다. 매우 영광이다.
-영화로 만나는 것이 오랜만이다.
=출연작이 많지 않지만, 필모그래피는 나의 인생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영화들은 나에게 사진첩이나 마찬가지며 그 영화들을 보면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캡틴 에이헙>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에이헙 선장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 속 인물이다. 허구의 인물이면서 돈키호테처럼 신화가 된 인물로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극적인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본 뒤 감독과 만났는데, 잘 알려진 소설을 독창적으로 각색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모비딕을 쫓는 에이헙의 여정이 끝없이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닮았다는 점도 나를 매혹했다.
-뻔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만, 당신의 “모비딕”은 무엇인가?
=어제도 그 질문 받았는데. (웃음)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삶을 통해서 실현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랭보의 시 중에 “육체와 정신을 통한 진실의 발견”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나의 모비딕은 육체와 정신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라고 해두자.
-영화배우보다는 연극배우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무대는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덧없지만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인생과도 같다. 나에게 연극은 마술과 같은 체험이다. 연극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믿음인데 이는 관객의 믿음으로 완성된다. 영화의 관객이 수동적이라면 연극의 관객은 참여적이다. 영화 역시 매력이 있지만 관객의 반응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거리를 두고 몰입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두 영역의 구분을 떠나서 중요한 것은 누구와 작업하느냐는 거다.
-당신은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다. 지금의 당신에게 영향을 준 영화나 책이 있다면?
=정신적, 지적 성장에 자양분이 된 예술을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도 문학과 시가 많은 영향을 줬다.(주: 라방은 라디오 프랑스, 아비뇽 프랑스 등에서 강독을 하는 문학 애호가다.) 개인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작가는 사무엘 베케트다. 인간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주변인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영화는 채플린의 초기 무성영화를 좋아한다. 버스터 키튼 역시 많은 영감을 준 배우다. 또 어릴 때 서커스를 아주 좋아해서 집에 오면 광대의 걸음걸이나 공놀이, 외발자전거 타기 등 그날 본 것을 따라했다. 부조리한 상황을 묘사해 의미있는 웃음을 주는 광대들이 나의 모델이었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자였고 사회적인 관습은 과감하게 무시했다.
-레오스 카락스의 <오물> 촬영이 작년에 끝났다. 어떤 영화인가?
=<도쿄!> 프로젝트는 주문작이다. 먼저 제안을 받은 카락스가 나에게 찾아왔다. 인간존재가 품고 있는 절대악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때 우리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렸고 그중에서 악인인 하이드만 다루기로 했다. <오물>의 “Merd”(오물이라는 뜻으로 극중 라방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이름)라는 캐릭터 자체는 파괴적이다. 언어 또한 인간이 쓰지 않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Merd의 파괴적인 행동은 호기심 때문이지 악의는 없다. 예를 들면 위협하기 위해서 컵을 깨는 것이 아니라 컵을 깨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카락스가 이 작품을 하자고 했을 때 즉각적으로 몸에 울림이 왔다. 그때까지의 모든 나의 연기 경험이 <오물>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인 듯 운명처럼 느껴졌다.
-차기작이 있나?
=10월에 촬영을 시작하는 영화가 있다. 16세기의 천문학자 케플러의 이야기인데, 10일 동안의 여정이 영화의 내용이다. 스탠 뉴먼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인데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시나리오도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