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르 클레지오]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다
2008-06-03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사진 : 이혜정
영화 에세이 <발라시네> 한국어판 출간하는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

르 클레지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육체적으로 정주해 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유목민의 상태에 가깝다. 그들은 언제나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거나 자신이 지금 머물지 않는 곳의 기억을 품고 부유하듯 살아간다. 그의 글도 그렇다. 짜임새있는 구조를 가진 이야기보다는 가슴에 아리는 문장들이 물처럼 흘러내린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이르는, 모든 대륙을 삶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며 살아온 삶의 이력이 그렇게 배어나오는 것일까. ‘프랑스 문학의 살아 있는 신화’라 불리는 그는 지난해부터 이화여대에 초빙교수로 한국에 와 있다. 이미 2001년부터 수차례 한국을 다녀간 그를 이 땅의 무엇이 매혹시켰는지, 꽤 오랜 시간을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다. 지나치게 따뜻해 여름 같던 오월의 어느 날, 영화 에세이 <발라시네>의 한국어판 출간을 앞둔 그를 만났다. 르 클레지오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청년처럼 건장했고 어디서나 좌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지위임에도 겸손하고 상냥했다.

-책의 제목인 <발라시네>(ballaciner)는 산책(ballder)과 영화(cinema)의 합성어로 알고 있다. 특히 산책이라는 단어를 영화와 접목시킨 이유가 있는가.
=일단은 내가 영화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산책하는 느낌으로 영화를 본다는 이유였고, 다음으로는 중세 기사들이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발라드를 통해 사랑을 고백했듯이 영화에 대한 사랑 고백을 담고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칸영화제 60주년 기념으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 책을 집필했는데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화의 본질은 달과 같아서 멀면서도 친근하고 현실감을 만들어내지만 결코 현실이 되지 못한다’라는 책 속의 문장은 매우 아름답고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와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영화는 아무리 현실을 담더라도 상영되는 순간에는 언제나 과거가 되고 만다.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아무리 현실을 담아서 찍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그가 만들어낸 현실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발라시네>는 영화에 대한 강한 애착과 진지한 사유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당신이 감독들에게 던졌던 ‘왜 문학이 아니라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반대로 묻고 싶다. ‘왜 영화가 아니라 문학인가?’ 책에는 ‘자유’ 때문에 글쓰기를 택했다고 나와 있는데, 그런 질문을 실제 진로를 선택할 때 던졌는가.
=3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들어 TV에서 상영한 적도 있다. 파테베이비 영사기를 가지고 있었던 할머니와 편집기사였던 할머니 친구분 덕에 시네아스트가 아니라 테크니션으로 먼저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멕시코에 있을 때 장편영화를 만들려고 기획하던 중 자금문제와 스탭과의 갈등으로 고충을 겪으면서 이렇게 힘들게 영화를 만드느니 혼자 책을 쓰는 게 낫겠다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갔을 때 그때 만들지 못한 영화를 여기서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 박찬욱, 이창동, 이정향 세 감독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특히 그들을 선정하게 된 이유는? 새롭게 인터뷰 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은 감독들이 있는가.
=이정향 감독의 작품은 윤리(morale)를 담고 있고, 박찬욱은 할리우드에 가까운 강한 서사를, 이창동은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일종의 참여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한국영화의 힘이다. <오래된 정원>의 임상수 감독, 김기덕 감독도 만나보고 싶고 소피아 코폴라 같은 여성감독에 대해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프랑스어판이 나왔을 때 왜 프랑스 감독에 대한 언급은 없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다음에 또 책을 낸다면 프랑수아 오종을 다뤄보고 싶다.

-‘영화는 미래에 한국의 것이 될까’라는 에세이에서 당신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다. 현재에도 그 전망은 여전히 유효한가.
=지금 유럽은 중국영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중국보다 더 자유로운 여건에 놓인 한국의 영화에는 감독의 더 과감한 상상력이 담겨 있으므로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시각이 있지만 나는 그 폭력성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영화에는 전쟁이나 광주항쟁 같은 폭력적인 역사와 60~70년대 참여영화의 전통이 살아 있다.

-당신의 소설 작품에는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닌 당신의 경험이 잘 녹아 있다. 한국을 배경으로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가.
=로마가 7개의 언덕으로 된 도시라면 서울에는 적어도 100개의 언덕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풍경을 좋아해 서울의 골목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이나 신촌 같은 지명을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이곳을 배경으로 환상소설을 쓰려고 한다. 특히 서울의 전봇대와 복잡하게 엉킨 전선들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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