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편지 먹는 공룡부터 늑대 아빠까지, 발칙한 상상력
2008-07-02
글 : 이영진
장형윤 감독의 대표 단편 넷

<어쩌면 나는 장님인지도 모른다>
2002년 │ 5분 │ 베타 │ 컬러

날개 잃은 천사가 떨어진 곳은 죽음의 낯빛을 한 인간들의 도시. 거리를 서성이는 남자를 만나 천사는 축제가 벌어지는 곳으로 도피하지만, 잠시 뒤 떠나온 그곳 또한 디스토피아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본주의의 첨탑이 끊임없이 건설되는 동안 인간들의 본성 또한 쉬지 않고 파괴된다는 줄거리를 생기 잃은 푸른빛의 화면에 담았다. 공급과 수요 그래프에 허덕이던 암울한 자신의 미래를 당시 즐겨 보던 <안개 속의 풍경> 등과 같은 유럽 예술영화의 어두운 분위기로 그려보고 싶었다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던 시절에 시작한 작품이라 짧은 단편이지만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2년이 걸렸다.



<티타임>
2002년 │ 4분 │ 35mm │ 컬러

영화아카데미 재학 중 실습작품으로 만든 단편. 머리가 두 동강난 남자 곁에 스패너를 든 천사가 나타난다. 비를 피하기 위해 만난 천사와 남자는 서로에 대한 동정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잠시나마 녹인다. 미술학원에 다니던 시절 봤던 머리 깨진 석고상의 이미지와 고공 철골 구조물 위에서 잡담을 나누며 점심을 먹는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루이스 하인의 사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건설 중인 노동자>에서 힌트를 얻었다. <어쩌면…>의 연작처럼 보이는 <티타임>은 간단한 스케치 형식으로 이뤄져 있는데, 빗물 섞인 뇌수로 차를 끓여 마시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제작기간은 <어쩌면…>과 달리 불과 한달.



<편지>
2003년 │ 10분 │ 35mm │ 컬러

형빈은 매일 우체국에 들르는 남자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보내지만 그녀에게선 좀처럼 답장이 오지 않는다. 한편 우체국 직원 아미는 그런 형빈을 보며 조금씩 끌린다. 익숙한 연애담 안에서 빛나는 건 엉뚱한 유머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건 아마도 진심을 가로채는 공룡 같은 존재가 있어서는 아닐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육중한 몸을 우체국 벽에 붙인 뒤 눈을 끔벅거리며 몰래 편지를 집어먹는 공룡의 등장이나 진심이란 불변이 아니라 유통기한이 정해진 감정이라며 매일 편지를 보내는 남자의 중얼거림에서 남다른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아빠가 필요해>
2005년 | 10분 | 베타 | 컬러

“오랜만이야.” “누구세요?” “영희야, 아빠야!” “네? 전 처음 뵙는 분인데….” “퍽! 퍽!” 소설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뒤 더더욱 글쓰기에 골몰하는 늑대에게 어느 날 여섯살 영희가 찾아온다. 난생처음 보는 여자는 영희가 늑대의 딸이라고 말하고는 떠나버리고, 늑대는 졸지에 영희의 아빠가 된다. 영희를 집에 들인 며칠 뒤 늑대는 토끼와 바다거북이와 사슴까지 먹여살려야 하는 웃기는 상황에 놓인다. 제11회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히로시마상을 수상했다. 후배들은 가장 노릇을 하는 늑대를 두고, ‘수간(獸姦) 애니메이션의 원조’라는 농을 던지며 눈을 흘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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