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의 열여섯 번째 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1-1>(이하 <강철중>)을 보았다. 남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제목의 뒤에다가 ‘1-1’이라는 일련번호로 셈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아니, 꼭 처음은 아니다. 무성영화시대에 실험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인 적은 있다. 혹은 미술 인스톨레이션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마치 논문을 쓸 때처럼 1번에 관련된 보충 설명을 할 때 그 아래에 ‘1-1’이라는 번호를 붙이는 방식으로 제목을 정했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에 ‘빼기’로 읽었다). 영화를 본 다음에야 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우석에게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은 두개의 판본이 있는데, 혹은 ‘동명이인’ 강철중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세 번째 영화는 검사 강철중이 아니라 강동서 강력반 형사 강철중의 판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강동서 강철중의 다음 영화가 또 나오면 <공공의 적1-3>이 될까? 혹은 검사 강철중이 나온다면 <공공의 적2-1>이 될까? 그러면 강철중이 나오지 않는 <공공의 적>은 어떻게 셈을 해야 하나? 나는 쓸데없는 데 걱정이 너무 많다.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두 종류의 원형이판본의 형태로 진행되는 중이다. 그런데 강우석은 항상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방법으로 자기 영화를 밀고 나간다. 그러나 그의 반복은 지루하게 동일한 영화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안에서 차이를 만들고 그 안에서 다시 두개의 긴장을 변주한다.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은 단지 상투적인 매너리즘의 재생산이 아니라 강우석의 예술적 행동이자 정치적 입장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강우석을 설명하면서 예술과 정치를 말하는 것이 불편할지 모른다. 그 자신도 오로지 대중적인 성공만을 노리는 것처럼 대답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심(의 전부)일까? 잠시만 돌아보자. 강우석은 ‘자살하는 학교’에 관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를 만들어서 성공한 다음 두개의 다른 버전인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1991)와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1992)를 만들었다. 현실과의 대면. 그런 다음 대면의 해피엔드 버전 혹은 대면을 회피하는 방법. 그러니까 3부작을 선택하는 대신 그려낸 대한민국 ‘하이틴’에 관한 삼각형의 초상화. 그런 다음 대한민국 부부에 관한 보고서 3부작 <미스터 맘마>(1992)와 <마누라 죽이기>(1994),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은 서로 다른 수위에서 ‘하여튼’ 한국사회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부부간의 권리(와 의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아니, 차라리 남편의 위상학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3부작. 육아를 누가 할 것인가, 가부장제는 어디로, 이혼이라는 문제 혹은 아내의 성의 권리. 그리고 물론 세편의 <투캅스>(그런데 세 번째 ‘여자’ 파트너 버전은 제작만 했다). 그런 다음 세편의 <공공의 적>. 상투적인 표현. 그는 하나의 영화가 성공하면 재빨리 그것을 재생산한다. 끝.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나는 강우석이 그렇게 단순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단순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의 반복적인 ‘예술적’ 행위마저 그렇게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강우석의 영화를 내내 보면서 그가 대중영화의 자장 안에서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사회적인 토픽, 정치적인 테마, 다소 우스꽝스럽긴 해도 역사적인 문제들을 건드려왔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적은 없으며 항상 우회하였다(<실미도>). 때로 지나치게 우회하는 바람에 길을 잃기도 하였다(<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혹은 가혹하게 다듬은 이론적 무기를 들고 그를 비판하는 일은 너무 쉽다(<한반도>). 아니, 단지 강우석의 곁에 (거의 동시에 충무로에 데뷔한 동기들인) 장선우나 박광수의 영화를 들이대서 대차대조표를 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첫 번째 영화를 찍은 다음 지금 제도 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강우석과 이명세뿐이다(그런 다음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등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1990년대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를 찍었다). 강우석은 대중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 친화성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하여튼’ 활동하면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관심있는 것은 반복의 친화성이라는 질문이다. 물론 강우석을 끌어들여서 설명하려 들 때 자칫하면 모든 문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의 영화들은 종종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명확한 선을 그은 적이 없으며, 그 모든 실수를 만회할 만한 걸작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석은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우리가 즐기게 만들고 있다. 그건 한국 대중영화 안에서 그 누구와도 다른 방법으로 대중을 유인하는 전술이다.
대중을 유인하는 강우석만의 전술-반복
먼저 반복이라는 문제. 왜 사람들은 시리즈물을 보는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표현. 왜 사람들은 같은 아이디어, 같은 줄거리, 같은 주인공을 반복해서 보는 것일까? 약간의 우회. 롤랑 바르트는 영화 대신 소설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S/Z>). 반복해서 다시 읽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상업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습관과 반대되는 행동이다(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새로운 것을 더 빨리 소비해야 하니까!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자본의 회전을 멈추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다소 단순하게 말하면 반복해서 보는 행위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학습된 우리의 습관은 일단 한번 ‘삼켜버리면’ 그 다음에는 내버린다. 그런 다음 재빨리 우리는 서점에 가서 새로운 책을 산다. 다만 ‘다시 읽는’ 행위는 어린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학교 안의 교수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행위는 지금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단지 시네필이나 컬트영화라 아니라도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은 오늘날 대중영화의 새로운 관람 습관이다. 꼭 그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 단지 그 영화의 몇 장면이 주었던 ‘짜릿한’ 흥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 극장에 다시 가는 ‘일반’ 관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시네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다시 보는’ 행위를 통해 거기서 새로운 의미나 재해석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첫 번째 관람행위의 즐거움을 ‘재현’하고 싶어서이다. 그 둘 중 누가 더 훌륭한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 둘 사이의 ‘다시 보기’는 서로의 목표가 다른 것이다. 마케팅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가 500만명을 넘기는 순간부터 이러한 관람행위가 ‘눈에 보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영화의 1천만 관객영화는 ‘재(再)관람’이라는 행위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숫자라는 뜻이다. 당신이 두번 보건 세번 보건 박스오피스는 항상 새로운 관객으로 셈한다. 행위의 수량화. 의미의 무효화. 두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행동양식을 자본의 쪽에서 재빨리 제도화화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관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는 이미 ‘경험’한 관객을 다시 끌어들이는 편이 한결 손쉽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며, 더군다나 그렇게 새로운 영화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종종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방법은 간단하다. 성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이야기, 성공적인 주인공, 성공적인 약속들. 물론 이것은 장르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매우 고전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모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서 단지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이 등장했을 때(이를테면 올 여름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그 어떤 것도 새로울 것 없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1930년대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크게 성공했지만 그 속편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은 그 박스오피스의 기록을 새롭게 쓴 <사운드 오브 뮤직>이 성공했지만 그 속편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2년 <대부>는 그 속편을 만들었다(약간 사태가 우스꽝스러워지긴 했지만 3편도 만들었다). <엑소시스트>는 속편을 만든 다음 전편을 만들고 번외편도 만들었다. 그런 다음 1978년 <스타워즈>는 아예 처음부터 연작을 내걸고 제작을 시작하였다(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첫 번째 영화인 에피소드 4편이 실패했다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슈퍼맨>은 연작 대신 시리즈물을 내걸고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에 속편과 연작, 리메이크는 영화들 사이의 (거의 인류학적) 친족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 공포영화들, <13일의 금요일>과 <나이트메어>는 B급 연작물의 ‘막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항상 나쁜 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이리언>은 감독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그런 다음 1990년대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시리즈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몇몇 시리즈는 살아남아서 21세기로 넘어왔다. 이를테면 <배트맨>. 물론 그 사이에 긴 세월을 버틴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영화가 아니라 소설) ‘제임스 본드’를 설명하면서 움베르토 에코는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라는 멋지고 간결한 정의를 제공한다(물론 좀더 학문적으로 블라디미르 프로프를 제안해볼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일반적인 도식과 계속해서 끼어드는 부차적인 에피소드가 배열되고 그 안에서 서로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대수학처럼 반복적으로 작성된다. 매번 다른 악당이 등장하긴 하지만 하여튼 그들이 나타나야만 이야기가 작동되기 시작하고, 매번 다른 본드걸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항상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 “흉측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본드는 이 악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여자를 만나 에로틱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녀를 과거로부터 해방시켜주지만 이러한 관계는 악당에게 생포되어 고문당하는 바람에 깨지게 된다. 하지만 본드가 악당을 물리쳐 이 악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 그러하여 이제 본드는 온갖 노고 끝에 여자의 품 안에 쉬게 되나 그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는 이 간결한 설명을 읽은 다음 <공공의 적>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강철중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하지만 <공공의 적>이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 안에서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강철중에게는 ‘강철중의 여자’가 없다(심지어 아내도 없다. ‘첫 번째’ 그 대신 늙은 노모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다). ‘두 번째’ 그 대신 그의 곁에는 강동서 강력반 형사들이 있다(그리고 <공공의 적2>에는 그나마 없다). 제임스 본드의 버전을 변형하면 이렇다. “(강철중은) 흉측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온갖 노고 끝에 악당을 물리쳐 이 악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그런데 악당이 결국 죽은 건지 죽도록 맞은 건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이 공식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자문자답. 먼저 질문. 에코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게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쓰면서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도대체 어떻게 한계가 이렇게 분명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풀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에코의 대답. 제임스 본드 시리즈물은 그것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보를 양산해내는 메커니즘에 가깝다고 부른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스파이들의 세계를 파헤치면서 세상에 대한 어떤 각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독자들의 게으른 상상력과 부주의한 독서에도 아무 지장을 받지 않고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그의 협력자들, 그리고 악당들에 관한 불변의 구조를 그저 되풀이해서 읽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좀더 멋진 비유. 말하자면 이건 이미 등에 붙은 번호판을 통해서 그 선수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럽 명문 축구팀이 동네 축구팀과 맞붙어 싸우는 경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 있고, 이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플레이가 예상치 않은 순간에 등장하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것뿐이다. 사실상 경기로서는 따분한 시합.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게으름이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인 반론이 함께 공존한다. 여기에는 (반복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는 이 기대의 지평을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을 퇴행의 메커니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완강한 저항의 심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우석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반복의 행위도 바로 여기로 복귀하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그런 다음 마치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궁리하는 조건화된 왕복달리기이다. 다시! 그런 다음 또다시! 강우석은 마치 명령을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다른 유머도 없이 건조하게 되풀이한다(이를테면 ‘놀이의 상황’을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원래의 시작을 거의 잊어버린 <여고괴담>과 비교해보라). 물론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형된 보수주의이며, 대중적으로 안전한 방어선 안에서 이미 실현된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환상에 대한 도식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유한 결론을 내세워서 새롭게 드러난 모순을 단지 낡은 문제틀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스크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구조로 바뀌는 어떤 난처한 교환 관계에 놓인다. 말하자면 <공공의 적>이 보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다음 그것을 이미 해결된 문제의 구조 안으로 집어던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말 그대로 이중의 문제. 여기서 말장난처럼 보이는 두개의 ‘문제’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좀더 간단한 설명.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폐쇄회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아무리 새롭게 문제를 제기해도 자꾸만 이전의 틀과 겹쳐져서 종종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며, 더 나아가 문제를 제기하기도 전에 이미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전도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반복해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은 플롯이 아닌 ‘강철중’
물론 이러한 양식을 가장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텔레비전 시트콤이다. 매주 같은 등장인물, 같은 상황, 다른 친구, (전체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의) 새로운 말썽. 사실상 시리즈물을 찾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예전 이야기에 충실한가라는 역설적인 기대감이다. 그래서 시리즈물을 보는 관객이 가장 분개하는 것은 최신편이 정말(!) 새로워질 때이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들이 지금도 숀 코너리 흉내를 내는 것은 웃겨 보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차라리 숀 코너리보다 더 숀 코너리처럼 대사를 하고, 연애를 즐기고, 위기를 탈출하고, 미식을 음미하고, 다음 회를 준비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때 시리즈물을 보는 관객의 고정점이 플롯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공공의 적>은 결국 강철중에 관한 시리즈이다. 반문. 강철중은 반복해서 ‘다시’ 보고 싶은 만큼 매력적인 주인공인가?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건 취향의 문제이다(혹은 설경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강철중은 제임스 본드인가? 노! 강철중은 인디아나 존스인가? 노! 강철중은 배트맨인가? 노! 왜 대답은 아니요, 로 일관되는가? 강철중은 현실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서 동화적인 판타지를 떠맡을 수 있는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에서 시도하는 강우석의 반복의 프로그램이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는 것은 그가 아무리 장르의 유머에 가까이 다가가도 현실이라는 경계를 명확하게 한정해놓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뛰어넘어가면서까지 현실을 잊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철중>의 시나리오를 쓴 장진의 <킬러들의 수다>와 비교해보라. 말하자면 현실은 강우석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여기서 강우석이 반복을 통해서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기 이야기의 복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 이야기를 현실과 동등하게 다루려는 방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이때 강우석의 반복의 행위는 정치적인 입장이 된다. 물론 그것이 매우 비유적이고 때로 너무 단순해 보여서 종종 핑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공공의 적>을 비판할 때 내 동료들은 강우석에게 그냥 ‘척하지 말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나 노력을 기울이라고 점잖게 충고한다(이를테면 <강철중>에 관한 <씨네21> ‘개봉영화 20자평’에 실려 있는 촌철살인들을 보라. 물론 나는 여기서 그 별점의 개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충고 속에서 강우석을 위해 변명하고 싶어진다. 내 생각은 반대이다. 하지만 강우석이 정치적인 자신의 행위를 좀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대중적인 재미를 포기하라, 는 메시지로 읽는다면 그건 내 생각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공공의 적>이 더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더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좀 복잡한 논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강우석이 자기의 정치적 제스처를 더 밀고 나갈 때 우리는 그가 우파 보수주의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강우석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사회의 헤게모니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모서리까지 다가간 다음 재빨리 되돌아온다. 종종 그의 영화가 첫 장면을 보여준 다음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혹은 영화 시작 이전으로까지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때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영화 전체의 과정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근심한다. 정치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그 행위를 어떤 것으로부터 배제시켜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강우석에게서 보게 된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정치적이라고! 강우석은 반문한다. 아니, 나는 그 행동을 어떻게 하면 안 해도 되는가를 하는 것이 나의 정치적 입장이야! 그러니까 강우석은 봉준호의 반대말이다. 이를테면 정반대의 두 영화, <한반도>와 <괴물>(물론 내가 여기서 우파 보수주의라는 말을 쓸 때 2MB와 강부자, 고소영, 조·중·동, 뉴라이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는 강우석이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항상 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 안에 정치적인 태도가 잠복해 있으면서도 종종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주장들이 지나치게 파토스에 기대면서 이성적인 반론을 제기하거나 혹은 정면으로 비판하려는 태도를 모두 부적절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명백히 그는 매번 자기의 토픽을 정치적이거나 최소한 사회적인 영역 안으로 끌고들어간다. 그러나 정작 그가 문제를 제기할 때는 재미있으면 된 거잖아, 이봐 자네 충분히 즐겼잖아, 라는 식으로 핵심적인 질문을 피해간다. 여기서 구태여 강우석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재미들이 거의 예외없이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때 강우석의 파토스는 항상 주인공이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언제나 인물이며, 그중에서도 주인공이다.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강우석의 연출이 가끔씩 멈칫거리는 대목들은 예외없이 주인공의 일상생활의 습관과 터무니없는 유머, 종종 지루할 정도로 고전적인 성격묘사, 무언가 돋보일 만한 특이한 행동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만화 속의 인물들처럼 단지 캐리커처에 가깝게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오로지 강철중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세부적인 사실들까지 잘 알게 된다. 그가 늘 하는 반복적인 말투, 어떤 때 입술을 삐죽거리는지, 그 순간 강철중은 어떤 심리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 그런 다음 그가 어떤 액션을 보여줄지, 우리는 강철중의 행동 패턴과 사회적 반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안에서 강철중은 우리에게 숨겨진 사생활이 없는 사람이다. 이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강철중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사기를 당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이다. 잘 알려진 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강우석은 강철중을 다루면서 그가 마치 속이 투명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본다. 그게 투명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강철중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니, 차라리 항상 행동이 생각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강철중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것일까? 대답은 약간 희극적이다. 그는 생각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단지 행동만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 대신 강철중을 위해서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강철중의 생각의 자리에 있고, 강철중은 우리의 행동을 대신한다. 이때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였던 강철중은 사실상 우리의 거울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것이 그저 희미한 까닭은 생각과 행동의 분리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하게 강철중이 우리에게 떠넘긴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채무관계를 물어보는 것이 <공공의 적> 연작이 다루는 반복, 그리고 <강철중>의 차이에 대한 질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