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강철중이 회피하는 것은 무엇인가? [2]
2008-07-10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공공의 적>에서 정작 질문되지 않는 것은 ‘적’이 아니라 ‘공공’(Public)의 정의인 것은 어떤 이유일까? 공공에 대한 정의없이 적을 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혹시 여기에는 공공을 내세운 집단적인 동의 아래 진행되는 폭력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상 정말 해결되어야 할 방법을 쉽게 포기하고, 나쁜 것과 싸우기 위해 더 나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더 큰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공공의 적>은 그 자체로 민주주주의에 대한 위협적인 제스처가 아닌가? <공공의 적>이 내세우는 믿음은 단순하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무언가 지금 민주주의적 절차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거나, 아니면 그 과정이 게으르거나, 혹은 형식에 불과하거나, 이도저도 아니어서 악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다. 지금까진 참았지만 이번에는 더이상 참을 수 없어! 말하자면 <공공의 적>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실망감이 있다. 그러나 강우석은 결코 ‘그러므로 체제 자체를 끝장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밀고가지는 않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파국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중간에 중단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무감의 내면은 사실상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실망감과 두려움 사이의 매개가 필요해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아바타라고나 해야 할까? 강철중의 자리는 정확하게 거기에 있다. 왜 강철중은 1편의 판본이건, 2편의 판본이건, 예외없이 항상 ‘공무원’일까? 하여튼 국가 안에서. 어찌되었건 사법의 편에서. 강철중은 찻잔 안의 폭풍이다.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강철중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이미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강철중의 행위는 좀더 나은 존재 방식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공공의 적> 연작이 정치적인 제스처를 취한다면 그것이 다루고 있는 토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철중이라는 인물의 반복적 행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강철중과 ‘더티’ 하리

나는 이미 같은 예를 알고 있다. 돈 시겔은 1971년 샌프란시스코를 무대로 연쇄살인범 ‘스콜피온’을 추적하는 강력반 형사 ‘더티’ 하리 캘러한의 액션활극을 찍었다. 매그넘 44구경의 대형 권총을 들고 악당이 나타나면 오히려 고맙다는 표정으로 “계속해봐, 그래서 (오늘을) ‘마이 데이’로 만들어줘”(Go ahead, Make my day)라고 추잉껌을 씹으면서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더티 하리>는 순식간에 1970년대 액션영화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경찰이긴 하지만 악당보다 더 악당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더티’ 하리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법은 ‘다소’ 포기해도 어쩔 수 없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어떤 붐을 일으켰다(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을 보면 ‘음산한’ 1970년대 초를 담아내기 위해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장면이 등장한다). 거의 동시에 발표된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에서 마약 강력반 형사 지미 ‘뽀빠이’ 도일은 마르세유에서 온 마약 커넥션을 체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미란다 원칙의 고지도 생략하고 그냥 현장에서 범인을 사살하는 것으로 끝낸다. 아내와 딸이 악당들에게 강간 살해당하자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었던(사실 찰스 브론슨이 소시민이라기에는 그냥 겉보기에도 특별하게 보이긴 한다) 폴은 밤마다 총을 들고 무작위로 악당들을 ‘청소’하러 외출한다(<데스 위시>). 이 버전의 가장 유명한 ‘예술적’ 판본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다. 그러나 이들이 마치 연대라도 하듯이 민주주의에 어떤 염증을 지니고 있으며, 민주주의라는 형식과 절차에 어느 정도 체념을 한 상태로 대안을 선택했을 때 그 결론이 매우 음산하게도 파시즘에 아주 가깝게 다가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민주주의 안에서 정치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한 적이 없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위치가 교활하게도 공무원이거나 소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정의를 지키고 있으며, 악을 소탕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숨길 생각을 하기는커녕 사회적으로 전시를 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미루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심지어 자신의 행동이 어떤 보답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올바르게 희생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방점은 ‘올바르게’에 있다. 이 도착적인 사회 참여의 행위는 물론 이 영화들의 배경이 된 1970년대 미국, 그러니까 바깥에서는 베트남의 정글에서 완전히 도덕적으로나 전략적으로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고, 안으로는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좌파들의 반전시위로 위기에 빠져 있던 우파 보수주의의 환상을 실현하고 있는 기괴한 미학적 호응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로빈 우드, 그리고 더글러스 캘너가 훌륭한 논점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 글을 읽으면 된다.

내 질문은 강철중은 ‘더티’ 하리 캘러한인가,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더티 하리>는 서로 다른 다섯명의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주연으로 만들어졌다(그중 네 번째인 <더티 하리>인 <서든 임팩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이 직접 연출했다) 이 보수 우파적인 하드보일드 액션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이 공화당 당원이기 때문에 주인공 ‘더티’ 하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의 스타 이미지가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롭게도 <더티 하리>는 닉슨 시대에 시작해서(1971) 연속적으로 두 번째 ‘하리’ <이것이 법이다>(1973)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세 번째 이야기 <집행자>는 베트남전이 끝나고 민주당이 집권한 지미 카터 시대에 만들어졌다(1976). <더티 하리>가 정치적 슬로건을 내건 영화는 아니기 때문에 그 서사구조를 직접적인 비유로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긴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 세 번째 ‘하리’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샌프란시스코의 여(女)시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게다가 여기에 항상 ‘고독한’ 하리가 이번에는 여자경찰관 케이트와 짝을 이룬다. 이 마초적인 시리즈가 페미니스트들에게 윙크를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집행자>는 노골적으로 베트남과 타협하고, 좌파들에게 협력을 청하고, 실속없는 인권을 이야기하는 백악관을 ‘여성화’된 정부의 이미지로 바꿔친다. 네 번째 ‘하리’ <서든 임팩트>는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영화다. 공화당 매파 군사주의자인 레이건 시대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1983) ‘더티’ 하리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서 작은 도시에서 잠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공권력이 휴가를 즐겨도 되는 태평성대? 다섯 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 ‘하리’ <집행자>는 레이건의 두번에 걸친 임기 중 거의 마지막 시기에 만들어졌다(1988).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집행자>는 의미심장하게도 일종의 ‘우파’ 하리의 유언장처럼 작성되었다. 이제까지 ‘더티’ 하리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총을 동원하는’ 이야기였다면 <집행자>는 ‘예고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같은’ 방법을 동원한다. 매우 예언적이면서 동시에 증후적인 이 마지막 ‘더티’ 하리는 현실 속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이듬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고, 걸프만 사태로 시작해서 (그의 아들 부시에 이어지는) 이라크전에 이르는 전쟁을 ‘미리’ 억제하는 전쟁이라는 부시 부자의 독트린에 따른 중동 외교정책이 수행되었다. <더티 하리>는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시리즈의 각 편이 만들어진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의 정서, 적어도 우파들의 시대에 대한 감정적 공기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꼭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공공의 적>은 세편이 서로 다른 세명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에 개봉되었다. 첫 번째 <공공의 적>은 2002년 1월25일에 개봉했고, 그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문민’정부였다. 2003년 2월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공공의 적2>는 2005년 1월27일에 개봉하였다. 2008년 2월25일에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6월19일에 <강철중>이 개봉하였다. 나는 이 세명의 대통령에 대해 평가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다(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고작 100일이 지났을 뿐이다. 물론 이미 ‘거의’ 결판이 난 것 같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까지가 ‘고작’ 예고편일까 두렵기까지 하다). 게다가 이 세명의 대통령은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에 그저 도식적인 비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정치현실과 직접적으로 대응시키는 대신 세편의 <공공의 적> 사이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방어물, 반복 속에서도 누그러지지 않는 불만, 그리고 강철중의 자리의 이동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첫 번째 <공공의 적>을 보면서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강우석이 ‘공공의 적’이라고 부르는 조규환(이성재)이 저지르는 악이 공공성의 위반을 범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괴물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멋진 근육을 가진 이 남자는 예쁜 아내를 곁에 두고도 스스로 자위를 하면서 사정을 맛보고 그런 다음 주식 투자를 위해서 돈을 가진 부모를 칼로 찔러 죽인다. 그는 자신의 악한 행위에 매우 충실하기 때문에 칼에 찔린 어머니가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자식을 위해 부러진 손톱을 먹어버리는 행위에 대해서도 감동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 행위에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쪽은 그 자식을 추적하는 강철중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나는 <공공의 적>을 본 다음 이 영화가 도대체 주식에 미쳐버린 김대중 시대(의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점점 부모와의 사이에서 흉포해지는 존속살인 풍속을 비판하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강우석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역겨운 인간을 만들어낸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모를 자기 손으로 죽인 악당이라는 설정은 생각만큼 단순한 괴물이 아니다. 나는 좀더 심술궂게 밀고 나아가고 싶다. 만일 더 역겹게 만들기 위해서 조규환이 아버지를 죽인 다음 알리바이를 내세우기 위해 어머니를 살려두는 대신 이 광경을 본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서 섹스를 한다면 어떨 것인가? 말도 안 된다고?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존속살인은 공공의 문제라기보다는 거의 인류학적인 테마이다. 차라리 순수한 의미에서 ‘공공의 적’은 오히려 강철중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철중의 옆에서 그의 파트너는 (경찰 내사가 조여오면서) 범인으로부터 빼돌린 마약이 문제가 되자 권총자살한다. 강철중은 공범이고, 그는 남은 마약을 자기 집 뒷마당의 항아리에 숨겨놓는다. 그런 다음 마치 항아리를 잊어버린 것처럼 영화는 진행된다. 강철중은 수사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절차와 형식은 범죄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사건 해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강철중은 선의의 의도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민주주의의 형식과 사회적 삶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정의의 편에 선다는 믿음을 갖고 도구적으로 행동할 때 이미 공권력의 음산한 전체주의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강철중은 단 한순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의 근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때 강철중의 알리바이는 법과 파토스, 도덕, 정의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을 행동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통일할 때 알리바이 전체가 바로 그 폭력적인 통일성 아래 무릎 꿇는다는 사실을 번번이 놓친다. 그 순간 강철중의 행동은 자기만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주장한다. 난 지금 단지 정의의 대리인이며, 도덕의 노예이며, 법의 집행자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나’라는 일인칭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혹은 근대의 공공성이란 전근대적인 영웅 신화와 싸워서 힘겹게 쟁취한 것이다. 우리는 ‘착한’ 폭력이란 관념을 경계해야 한다. 이때 강철중의 ‘폭력적’ 행동이 지닌 가장 위험한 의미는 그가 공공의 선을 지키는 민주주의라는 절차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부지불식간에 그의 행동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 <공공의 적>을 보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주의자들이다. 여기서 김대중 문민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냉소에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강철중이 아니라 당신의 동의가 필요하다. 강철중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다. 결국 해야 할 일은 뻔한데 왜 결과가 모호한 민주주의의 형식에 맡겨야 하는가? 이 어처구니없는 불만이 우리에게 웃음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 핵심은 그 웃음을 질문하는 것이다. 당신의 웃음은 정확하게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어이없어서 웃는 것인가, 아니면 통쾌해서 웃는 것인가?

강철중과 ‘매드’ 릭스

나는 논지를 흐리지 않기 위해서 노무현 ‘참여’ 정부의 시대에 강력반 형사 강철중이 검사 강철중이 되어 진행된 <공공의 적2>에로 우회하는 대신(아마도 <공공의 적> ‘검사’ 버전의 일련번호 2에 해당하는 2-1이 나오면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곧장 형사 강철중의 원형이판본 ‘1-1’인 두 번째 이야기 <강철중>에 대해서 질문할 생각이다. 강우석이 김대중 ‘참여’정부에서 형사 강철중을 만들어낸 다음 왜 노무현이 아니라 이명박의 ‘실용’(무슨 실용?) 정부의 도착과 함께 그를 다시 귀환시킨 것일까?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강철중은 무엇이 불만인가? 두 번째, 강철중은 어떻게 즐기는가? 물론 나는 이 질문이 너무 이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좀더 거리를 확보해야 하며,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직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나는 현실 안에서 대답을 구하는 대신 <강철중>에 대답을 구하는 형식으로 질문을 당신에게 돌려볼 생각이다. 대답은 세 가지다. 첫째, 대통령이 누가 되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며, 검사 강철중보다는 ‘꼴통’ 형사 강철중이 훨씬 매력적인 주인공이며, <강철중>은 단지 액션활극 코미디이다. 나는 이것이 올바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강우석은 지금 박스오피스에서의 성공에 목마르다. “<강철중>은 내가 가장 잘 부르는 노래 같은 영화이다. 내가 가장 잘 만들 줄 아는 영화로 올 여름 가장 신나고 통쾌한 재미를 보여주겠다!”(<강철중> 광고전단의 강우석 인터뷰 발췌)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궁금증이 남는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지금 <강철중>을? 강우석은 세상의 공기에 예민한 사람이고, 대중의 변화에 대해서 충분히 긴장하고 있으며, 시대의 토픽에서 어디를 건드려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연출자이다(이를테면 정반대로 거의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 이명세와 비교해보라). 여기에 대꾸를 하는 듯한 예가 있다. 리처드 도너는 멜 깁슨을 주연으로 강력반 형사 마틴 ‘매드’ 릭스를 주인공으로 한 네편의 <리쎌 웨폰>을 찍었다(제목도 의미심장하게 ‘법의 무기’이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리쎌 웨폰>은 1987년에 만들어졌다.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더티’ 하리라고 불릴 만한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는 매우 음울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심한 우울증에 빠진 ‘매드’ 릭스는 범인을 체포하려 든다기보다는 차라리 임무수행 중에 상대방이 자기를 총으로 쏘아죽이기를 바라는 일종의 자살시도를 한다. 물론 악당들은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 그런 다음 이 영화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시대에도 연속적으로 두편이 만들어졌다(1989년과 1992년). 그런데 부시 시대에 이 두편의 <리쎌 웨폰>에서 ‘매드’ 릭스는 여전히 같은 증세에 시달리면서도 놀랍게도 매우 명랑하고 심지어 경박해지기까지 했다. 1편의 우울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거의 코미디 활극 같은 경쾌한 대사와 상황으로 바뀌었다. 감독과 주연이 그대로인데도 거의 단절처럼 가져온 이 변화는 그들이 범인을 추적한다기보다는 테마파크처럼 보이는 미국 도시에서의 모험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사실 미국 내부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그저 범인들과 형사는 약간 과장된 제스처로 즐기는 중이니 안심하라고, 라고 으스대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1993년 민주당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자 <리쎌 웨폰>은 성공적인 시리즈인데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런 다음 네 번째 <리쎌 웨폰>은 미묘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 지퍼 게이트가 터졌을 때(1998) 마치 다가오는 2000년 선거유세라도 나선 것처럼 돌아왔다. 홈드라마도 아니고 액션활극도 아닌 <리쎌 웨폰4>는 단지 실패작이라는 느낌보다는 무안가 불만족스러워 보인다. ‘매드’ 릭스의 연인 콜과 릭스의 파트너인 머토프의 딸 리앤이 우연히도 동시에 임신을 한 것. 게다가 리앤은 아직 미혼이고, 아버지는 비밀이다. 릭스와 머토프는 가정문제로 고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이민과 위조지폐를 거래하는 아시아 조직과 싸우랴 공사다망하다. 이 네 번째 <리쎌 웨폰>은 이상할 정도로 주인공들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리처드 도너는 이 시리즈를 끝내면서 영화의 서사와 스타 이미지, 정치적인 코드, 그리고 이 시리즈를 지지하는 대중에 대한 메시지를 거의 가족처럼 뒤섞고 있다. 이때 대중적인 영화는 정치현실에 대해 발언을 한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핵심은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매우 비스듬하게 마치 우연히 건드린 것처럼 사회적 증상의 모서리를 슬쩍 비유한 다음 놀이상황 안의 게임으로서의 이야기 안으로 재빨리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그런 이유가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투표를 하는 유권자와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을 완전히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공통분모를 지닌 시민-대중이다. 물론 강철중이 ‘더티’ 하리가 아닌 것처럼 그는 ‘매드’ 릭스가 아니다. 그러나 세편의 <공공의 적> 중에서 <강철중>에는 유일하게 강철중의 초등학생 딸과 어머니가 등장한다. 딸은 공공연하게 아버지를 향해서 “나도 가끔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형사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이사 전세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만둔다고 해서 누가 갑자기 그에게 전세금을 건네줄까?). 이것이 두 번째 대답이다.

우리는 어떤 강철중을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강철중이 (<추격자>의) 뚜쟁이 엄중호(김윤석)와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강철중이 강동서 강력반 형사를 그만두면 엄중호가 되는 일만 남을 뿐이다. 혹은 엄중호는 형사를 그만두기 전에 강철중이었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닮은 두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나는 <강철중>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철중이 ‘산수’ 안수(이문식)에게 매달리면서 전세금을 빌려달라고 할 때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공공의 적>의 희극성은 <추적자>의 비극성과 아주 가까이 있다. 강우석은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저 너머에는 무언가 있다는 불안. 사실상 불안이란 실재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생겨나는 것이다. 하여튼 무언가 현실 속의 상황과 영화 속의 사건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면서 강우석을 불안하게 만든다. 강우석의 웃음은 불안에 대한 위장이다. 세 번째 대답. 그렇다면 <강철중>에서 가장 ‘나쁜 놈’은 누구일까? 뻔한 질문이다. 물론 강철중이 싸우는 거성그룹 회장 이원술(정재영)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은 하지만, 이라고 덧붙인다. 싸우는 건 두 사람이지만 이 장소에 있는 건 세 사람이다. 강철중과 이원술, 그리고 거성그룹의 변호사이다. 그를 끌고 온 다음 강철중은 변호사에게 질문한다. 누가 더 나쁠까? 그런 다음 자문자답한다. “니가 더 나쁜 놈이야.” 이원술은 강철중과 싸우다가 잠시 틈이 생기자 바로 달려가서 자동차에 수갑 묶인 변호사를 발로 밟으면서 “이 호로 새끼”라고 욕을 한다. 이때 내가 주목한 것은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변호사를 묶어놓은 수갑이다. 법을 묶어놓는 수갑. 강철중이 즐기는 방법은 법을 묶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형사’가 의지할 만한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그 무엇일까? 법이 정지했을 때 ‘형사’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을 근거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일까? 형사가 괄호쳐지고 강철중만 남았을 때 이원술과 강철중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 강철중은 자신의 존재론과 목적론 사이에서 항상 불화를 경험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법을 묶어놓고 임무를 수행하는 순간 무엇이 날뛰는지를 놓치면 안 된다. 물론 강철중이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강철중은 그래도 정의를 지키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질문할 때 여기서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세편의 <공공의 적>에서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이 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그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 체제를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점점 더 그가 싸우려는 악은 확대 재생산될 것이다.

질문은 간단하다. 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공공의 적>은 무효화되는가? 나는 강우석이 대답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영화에서 정치적 토픽이나 사회적 쟁점, 역사적 순간들을 다룰 때 그것은 단지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한가, 아니면 대중의 헤게모니 안에서 진행되는 코드의 전술인가? 그는 그저 거짓 용기를 내고 있는 중인가, 아니면 약간 비겁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태를 회피하지 않고 건드리고 있는 것인가? 당신은 어디까지 개입하고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화해인가, 아니면 심판인가? 당신은 매번 문제가 정말 해결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저 문제의 공백을 현실화하고 있다고 믿는가? 나는 우리가 강우석을 좀더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강우석도 현실 안으로 더 들어올 필요가 있다. 맹세코 말하건대 그때 당신의 영화는 훨씬 재미있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강우석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 입장이 모호하기 때문에 관대하지만 그러나 그 자리가 분명해졌을 때는 훨씬 전투적인 담론이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가 훨씬 더 우리가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뿔싸! 우리가 다음번 강철중을 만나려면 한참 더 남은 새로운 대통령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물론 강우석은 자신의 애창곡이라는 18번을 연이어 부를지도 모른다). 그때 돌아오는 강철중은 강동서 강력반 강철중일까, 아니면 검사 강철중일까? 그걸 결정하는 것은 강우석이 아니라 유권자 우리 자신일 것이다. 아직은 그렇다(네 번째 <공공의 적>에 관해서 1647일 뒤에 계속. 아, 정말 끔찍하리만큼 지루한 기다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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