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린 까닭은? [1]
2008-08-07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마지막 장면부터 거꾸로 생각해본 <님의 먼곳에>의 논리적 귀결

설마 여기서 엔딩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약속된 시간은 다 지나갔다. 베트남전쟁 중의 한복판에서 천리 만길 우여곡절을 거쳐 순이(수애)는 남편 상길(엄태웅)을 마침내 만났다. 그리고는 뺨을 때린다. 또 때린다. 그리고 또 때린다. 순이는 왜 뺨을 때리는 것일까? 상길은 왜 우는 것일까? 아니, 상길은 순이를 알아보기는 하는 것일까? 하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대답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할 건데, 라는 난처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줄거리로 치달리다가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두 사람을 나눠 찍던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서 순이와 상길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엔딩을 알리는 구도. 이제 더이상의 행동은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줄 만큼 인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간 카메라. 감정을 가라앉히는 음악. 놀랍게도 영화는 정말 거기서 그냥 끝났다. 나는 자막이 올라올 때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한 상태가 되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끝을 내버린 것일까? 이준익의 여섯 번째 영화 <님은 먼곳에>는 마치 부르다가 만 노래처럼 보였다. 실제로 영화에서 이 영화의 제목인 노래 <님은 먼곳에>는 부르다가 중단된다. 그것도 세번이나. 나는 무언가 엔딩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준익은 정반대로 대답했다.

“마지막 장면이 다 설명한다. 마지막을 정해놓고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영화에서 상길은 20세기 남성성의 은유이고, 순이는 20세기 여성성의 대표이다. 20세기에 남성이 저질러놓은 전쟁이라는 부조리의 현장에서 여성성의 대표가 따귀를 갈기는 얘기다.”(<한겨레> 7월14일자 인터뷰, ‘부조리한 남성성 반성하고 싶었다’)

이준익은 김지운의 반대말이다

영화에서 활동하는 세개의 선, 시선, 동선, 그리고 감정선. 결국 영화는 선의 연결이다. 종종 이준익을 비평적으로 다룰 때 그의 미장센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혹은 신의 내용이 ‘섬세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익은 신 안에서 오로지 감정선만을 따라간다. 종종 그것이 등장인물의 행위와 사건에 집중됨으로써 단순하게 보이지만(실제로 단순해지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준익은 거의 필사적으로 그 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문제를 포기하기조차 한다. 열 번째 신이 눈물을 목표로 한다면 그 앞의 아홉개의 신은 눈물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를 신파로 몰고 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인물의 내면 속 시간 안에서만 잠재적으로 연결되고 결합하기 때문이다. 좀더 간단한 설명. 나는 여기서 잠시 (올 여름에 거의 동시에 도착한) 이준익과 김지운을 비교하려고 한다(게다가 <님은 먼곳에>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하루 걸쳐 연이어 시사회를 가졌다). 이준익은 감정선의 블록을 만들고 그것을 넘어트리면서 드라마를 만든다. <님은 먼곳에>는 시작하면 엔딩을 보아야 한다. 그 반대의 예. 하지만 김지운은 영화가 시퀀스 단위로 이루어진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시작해도 상관없고, 어디서 끝나도 괜찮다. 다만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다시 시작된다. 그는 매번 시퀀스 안의 그림, 인물들의 활동, 작은 제스처, 즉각적으로 지각되는 소리들(과 음악)의 효과, 이 모든 것들의 상황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편의 영화에서조차 각자 자기 완결적인 형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시퀀스를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김지운은 열개의 신이 있다면 그것들은 각자 활동하면서 자기 안에서 만족을 찾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첫 시퀀스를 본 다음 중간을 생략하고 마지막 세명의 총격전을 그냥 이어붙여도 아무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다. 종종 김지운의 영화가 (<장화, 홍련> 이후부터) 멈칫거리거나 주변 인물들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김지운은 그게 다 설명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사람은 어리둥절해진다. 그는 영화의 기계적인 지각효과에 매혹된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의 지각요소들이 다가오거나 멀어지고 혹은 제때 부딪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콘티의 연속적인 활동. 이미지의 과장. 사운드의 봉사. 그때 영화의 세개의 선은 개별 원 안에서만 활동할 뿐이다. 김지운의 영화는 전람회를 관람하듯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줄거리를 포기하고 ‘컨셉’만으로 한편의 영화를 묶을 수 있을까? 반대로 이준익은 ‘캐릭터’와 ‘플롯’만으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그의 영화를 본 다음 ‘볼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지각효과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드라마 안의 감정이 진행될 때 일어나는 긴장과 이완에 점점 능수능란해지고 있다. 이준익은 지루하지만 종종 그 다음 신을 기다리게 만든다. 김지운은 그 순간 재미있지만 그럴수록 때로 점점 지루해지기도 한다. 대중은 아이러니하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재미없어서 짜증나요. 그런데 재미있어서 더 짜증나요. 나는 둘 중 누가 옳으냐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준익은 신마다 왜, 라고 질문한다. 김지운은 똑같은 자리에서 어떻게, 라고 대답한다. 이준익이 목표를 향해서 직선을 그릴 때 김지운은 집합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몇개의 원을 그린다. 두개의 하여튼. 이준익이 ‘하여튼’ 앞으로 나아가지만 단조롭게 느껴진다면 김지운은 ‘하여튼’ 카메라의 구도와 기계적인 움직임, 효과들, 시각적인 충격, 예쁜 취향, 다양한 인용으로 신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되지만 같은 자리에서 계속 맴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에서) 이준익의 반대말은 김지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준익과 김지운은 정확하게 상대방이 갖지 못한 것을 서로가 나눠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올 여름 두개의 스펙터클. 두개의 사례. 목표와 집합. 원형과 직선. 만주의 광야에 그려넣은 두개의 큰 원과 세개의 작은 원. 목표를 향해 정글을 지나 능선으로 가는 직선. 나는 지금 직선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다시 <님은 먼곳에>로. ‘따귀를 갈기는’ 것은 감정선의 결과이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동선이 등장인물을 따라간다면 감정선은 등장인물을 이끄는 것이다. 힘의 한 모멘트가 신을 넘어트리면 차례로 넘어지기 시작한다. 그때 이 운동은 무언가를 목표로 한다. 종종 눈물(멜로드라마). 혹은 총을 꺼내 드는 행위(서부극, 혹은 갱스터영화들). 말하자면 도미노. <님은 먼곳에>라는 도미노의 최종목표는 ‘따귀를 갈기는’ 행동이다. 만일 내가 ‘따귀를 갈기는’ 행동만을 보고 감정선을 놓쳤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차례로 쓰러진 신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리고 앞에 선 면들의 어느 부분이 뒤에 선 면의 어디를 넘어트리는지를 살펴야 한다. 면으로서의 신. 그때 그 면은 감정의 힘들 사이의 집합이다. 말하자면 힘의 선. 나는 그냥 순진한 척하면서 이준익의 말을 믿기로 했다. 어쩌면 정말로 <님은 먼곳에>는 마지막 장면을 먼저 떠올린 다음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성된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 대신 나도 거슬러 올라가면서 물어보고 싶어졌다. 역순으로 따라가는 이야기. 순이는 베트남전에 가서 남편 상길을 만나 뺨을 때린다. 매우 극적이고 멋진 장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순이는 베트남에 가야 한다. 어떻게?) 순이는 ‘써니’가 되어 정만 일행과 위문공연단을 꾸려 베트남에 온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점점 순이는 ‘써니’가 된다. 하지만 순이는 일편단심 상길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순이는 베트남에 왔을까?) 순이는 삼대독자 외아들 상길에게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고대하고 있고, 아들 상길은 베트남에 갔다. 순이는 아이를 갖기 위해, 시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혹은 남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기로 결심한다. 하여튼 왜 순이가 베트남에 갔는지는 모호하다. 그러므로 뺨을 때리는 이유도 모호하다. (그런데 왜 순이는 아이를 갖지 못했을까?) 군대에 입대한 상길은 결혼하기 전 ‘대학생 애인’이 있었으며,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순이에게 관심이 없다. 면회를 와도 등을 돌리고 잔다. 그런데 상길에게 옛 애인으로부터 편지가 온 것을 고참 김상병이 공개해서 소대원들에게 읽자 화가 난 상길은 그와 크게 싸우고, 하극상의 죄를 물어 군에서는 두 사람에게 영창과 베트남 중 선택하라고 한다. 두 사람은 베트남에 간다.

그들은 왜 베트남에 가야 했는가?

마지막 장면이 다 설명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 뺨을 때리는 것일까? 그게 사랑의 확인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분노인지, 혹은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한 것에 대한 만족인지, 그녀 자신에 대한 회한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내 의문에 대해서 이준익은 어마어마하게 대답했다. “부조리의 현장인 전쟁에 대해서 책임자인 남성성의 은유에게 여자의 대표가 때리는 따귀.” 물론 이준익의 대답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상길은 20세기 남성의 은유일 수가 없다. 20세기 남성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비유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님은 먼곳에>의 배경이 된) 1971년 베트남에 와 있는 한국 남자와 미국 남자는 얼마나 다른가? 대학생으로 베트남전에 사병으로 온 크리스(<플래툰>)와 상길의 차이. 그런 다음 순이는 어떻게 20세기 여성성의 대표가 될 수 있는가? 20세기의 여성들은 얼마나 서로 다른 계급과 국가와 인신의 차이 속에서 각기 다른 여성의 인권을 쟁취하였는가? 순이가 20세기는커녕 1971년 한국 여성의 대표성조차 가질 수 있는가? 이를테면 <영자의 전성시대> 혹은 <별들의 고향>으로 설명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부서져간 여성의 육신들과 그 소비의 과정들. 돈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시내버스 차장을 하다가 한쪽 손이 잘려나간 다음 몸을 팔러 전전하는 영자와 남편 만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위문공연단과 베트남까지 가는 순이. 두 여자의 고향을 떠나는 행위. 그때 순이는 영자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혹은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다음 차례로 남자들에게 육신을 망가트리고 결국 한강에 한줌의 재가 되어 흩날리는 경아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다음 베트남까지 찾아가는 순이. 남자로부터 버림받기와 그 이후, 그때 순이는 경아와 얼마나 다른가. 순이는 1971년의 여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특별한 선택을 한다. 그 다음 상길의 책임. 베트남전은 20세기 남성이 저질러놓은 전쟁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 사회주의 블록의 약한 고리를 끊기 위해 시작된 침공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과 농민들이 얼마나 끈끈한 유대관계 아래 놓여 있었으며, 민족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준익은 이 전쟁에 한국 이외에는 어떤 다른 나라도 참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했다. 여기에는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어떤 정황도 없다. 말하자면 베트남은 1942년 유럽이 아니었으며, 호치민은 히틀러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은 시작부터 미국의 패배가 예상된 전쟁이었다. 유럽의 미국 동맹국은 누구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고, 심지어 소련조차 이 전쟁의 무의미를 경고했다. 닉슨은 전쟁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임기 내내 지켜보다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자기의 경력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텔레비전은 정글을 생방송으로 중계했고, 대학생들과 대중문화의 스타들은 이 전쟁을 반대했다. 만일 이준익이 정말 그런 의도로 <님은 먼곳에>를 찍기를 원했다면 멀리 베트남의 정글까지 갈 필요없이 그저 한반도에서 벌어진 1950년 그해 여름의 전쟁을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므로 내 첫 번째 질문은 왜 <님은 먼곳에>가 한반도가 아니라 베트남에 가야만 했을까, 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바보 같은 대답. 그렇게 되면 영화 제목으로 <님은 먼곳에>를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1970년에 김추자가 불러서 히트한 이 곡을 한국전쟁을 무대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답이 바보 같긴 하지만 이 질문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님은 먼곳에>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이 영화는 ‘노래에 바쳐진’ 이야기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다. 만일 <님은 먼곳에>를 보았는데 끝내 <님은 먼곳에>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화가 끝난 다음 어떤 기분이 되었을까? 물론 베트남전을 다룬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 문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래와 역사가 도착적인 관계를 이룰 때, 전쟁이 노래를 위해서 존재할 때, <님은 먼곳에>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베트남전이 거기 있을 때, 이 로맨스는 우리에게 이상한 질문과 대답의 관계를 상기시켜준다. 나는 이준익에게 왜 <님은 먼곳에>를 위해서 베트남전이 거기 있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고 싶다. 영화의 대답은 왜 하필이면 그때 베트남전이 <님은 먼곳에>에 가장 좋은 장소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나는 자꾸만 순이가 남편을 찾으러 베트남에 간다기보다는 ‘수애’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1971년의 베트남에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착시를 멈출 수 없다. 순이와 ‘수애’ 사이의 숨바꼭질. 왜 하필이면 <님은 먼곳에>를 이준익의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에 이어지는 ‘음악 삼부작’이라고 불렀을까? 다른 두편과의 관계 속에서 <님은 먼곳에>는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유사성도 없다. 그런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주제도 아니고 테마도 아니다. 간단하게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과 비교해보라. 그렇다고 이 세편의 영화가 가수를 모델로 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노래를 부른다는 행위만 공통점이 있다. 그때 베트남이라는 전쟁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님은 먼곳에>에서 과잉한 것은 노래가 아니라 베트남전이라는 전쟁이다. 베트남은 노래를 위해서 무대를 제공하고, 그런 다음 발정난 군인들이라는 관객을 동원하고, 그 앞에서 노래는 특별한 전시성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똑같은 노래가 라이브에서 불릴 때와 나이트클럽에서 불릴 때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감흥을 전해 받는다. 물론 그것을 이준익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순이의 라이브로 시작한다. 그녀는 동네 아주머니들 앞에서 마치 공연을 하듯이 잔뜩 감정을 잡은 다음 <늦기 전에>를 부른다. 노래 <늦기 전에>의 가사는 순이가 호소하는 것처럼 들린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누구에게? 애인에게. 하지만 우리는 곧 그런 호소가 완전히 오해이거나 아니면 잘못된 가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 순이는 이미 결혼을 했으며, 그녀의 남편 상길은 군대에 있으며, 그녀에게 시집오기 전 애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그래서 ‘이미 늦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녀의 남편에게는 마음속의 다른 애인이 있다(하지만 구태여 순이의 마음이 떠나가기 전에 남편에게 돌아와 달라는 호소로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노래 부르는 행위를 가사로부터 떼어내서 완전히 순이의 사회적 상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녀는 혼자 부르지 않고 동네 아줌마들을 앞에 앉혀놓고 부른다. 말하자면 순이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님은 먼곳에>를 <즐거운 인생>의 여성판 솔로 가수 데뷔 버전으로 읽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어머니, 남편, 베트남전, 1971년은 모두 핑계이며, 시골 아낙 순이가 ‘하여튼’ 가수로 무대에 서는 이야기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준익이 베트남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실재의 장소라기보다는 ‘캐릭터’와 ‘플롯’ 사이의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를 만한 서로의 요구에 대한 대답의 장소처럼 다루어진다. 베트남전쟁은 적당하게 순이와 위문공연단을 괴롭히고, 그런 다음 그들이 완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적당한 시점에 그들을 도와준다. 이때 베트남전은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것을 영화에서 가능하도록 ‘마술처럼’ 응답한다. 말하자면 동일한 사건이 실재에서는 가능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님은 먼곳에>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돕는다. 물구나무 선 가능성. 그러나 베트남전 자체가 그들에게 근본적인 외상을 입히거나 혹은 태도를 바꾸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베트남전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보자. 이때 이 영화들에서 신기한 점은 베트남에서 대부분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심지어 <람보2>. 혹은 공수창의 <알포인트>. 이때 베트남은 어떤 형식으로건 등장인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람보에게조차!). 왜냐하면 그것이 베트남전이 미국과 한국의 근대사 안에 자리잡은 방식이다. 그러나 순이는 베트남에 가서 전쟁 한복판을 통과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한다. 물론 베트남에 가서 순이는 두개의 인물로 분화된다. 하나는 남편을 찾으러 호이안으로 가는 순이이고, 다른 하나는 무대에 서는 ‘써니’이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인물에로 도약할 수 있는 둘 사이의 변증법적 성찰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 둘은 끝내 세 번째 인물로 거듭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남편을 만나기 위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이준익이 <님은 먼곳에>를 단지 베트남을 무대로 한 ‘음악영화’ 삼부작 중 하나로 기획했다 할지라도 내가 궁금한 질문에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순이는 결국 ‘써니’가 되지 못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순이’로 돌아오느냐는 것이다.

순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나?

이준익은 “모든 대답이 마지막에” 있다고 말했다. 순이는 원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지막’ 대답이다. 하지만 나는 행위를 대답 대신 질문으로 읽고 싶다. 순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자, 대답과 질문을 잘 구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이준익의 ‘대답’으로 따라가기. 이준익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순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순이는 자기가 무엇을 바라는지 정말 잘 알고 있을까? 그렇게 되면 <님은 먼곳에>는 매우 끔찍한 요구의 판본이 된다. 왜냐하면 순이가 자기의 목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때 그녀의 행위는 주관적 요구로 위장된 객관적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요구는 무엇인가? 그녀가 목표를 잘 알고 있을 때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그녀가 기대는 진지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잠시만 마지막으로부터 처음으로 뒤집어서 소급해보자. <님은 먼곳에>를 요구와 대답으로 읽으면 슬프다기보다 기괴하게 느껴지는 것은 순이의 목표 때문이다. 왜냐하면 순이의 목표는 사랑이 아니라 섹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순이는 베트남에 가서 남편 상길과 섹스를 한 다음 임신을 하려고 그 전쟁터에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삼대독자 외아들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에 거기에 응하는 것이다. 21세기에 유교의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전근대적 봉건제 이데올로기가 명령을 요구할 때 당신이 보기에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도 현실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면 더이상 웃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때, 그 제도의 네트워크 안에서 그것을 행해야 할 때, (이것이 핵심인데) 그래서 그것을 실제로 해야 할 때, <님은 먼곳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익살맞은 상황이지만 그 무대를 1971년 한국의 시골 마을로 옮겼을 때 이 요구는 시골 아내 순이의 육신을 둘러싼 참담한 수난의 드라마가 된다. 결국 ‘따귀를 갈기는’ 행위가 유교의 남아선호사상에 대해서 순이가 내리는 대답이라면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행동에 대해서 비로소 비판적 거리를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해석은 <님은 먼곳에>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모호하게 보이는 것은 순이를 따라 베트남의 호이안까지 가면서 단 한번도 이 영화는 유교의 남아선호사상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순이를 집 바깥으로 내몰아 베트남까지 보내는 전근대적 요구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 <님은 먼곳에>는 그 명령을 방해하는 근대적인 장애를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만을 열거한다. 그런 다음 순이는 이 조건을 내면화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순이가 자기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전체 108신 중에서 시골집을 떠나는 16신 이후 두번 다시 시어머니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며, 순이 자신도 시댁을 떠난 다음 두번 다시 연락하지 않는다. 순이가 서울에 올라간 다음, 좀더 정확하게 육군본부 앞에서 위병소를 지키는 군인에게 “아저씨, 저 월남 꼭 가야 돼요”라고 말한 다음, 순이는 마치 자발적인 의지로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자기의 목표를 향해서 다가간다. 좀더 인상적인 순간은 신83에서이다. 베트콩에 붙들린 땅굴 안. 용득이 순이에게 “근데 남편 왜 만나러가요?”라고 물었을 때 순이는 대답하지 않고(못하고?) 그냥 고개를 돌려 웃음짓는다. 순이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가 대답 대신 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네 가지이다. 하나는 잘 알고 있지만 차마 용득에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녀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좀 다르다. 그 질문을 듣자 비로소 잊고 있던 그 질문을 떠올린 것이다. 순이는 내내 남편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말했지 단 한번도 왜 만나러 가는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물론 네 번째도 있다. 그 질문을 듣자 남편을 만나러 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용득(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나는 순이의 대답이 세 번째와 네 번째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 걸쳐져 있는지가 <님은 먼곳에>를 모호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야기 전체의 진행 과정 안에서 순이의 요구를 추론한 것이지 순이의 행동을 통해서 왜 베트남에 가려고 하는지의 대답을 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준익은 그 대답이 ‘따귀를 갈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득에게 웃음으로 대답한 것을 왜 상길에게는 ‘따귀를 갈기는’ 행동으로 대답했는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나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순이의 행위가 일신의 인정투쟁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멈출 수 없다. 말하자면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녀가 상길의 아내라는 사실이다. 상길의 애인도 하지 못하는 행위, 오로지 그의 아내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이때 이 행위는 목표와 아주 가까이 있다. 상길의 애인은 두려워하지만 그의 아내 순이는 간절하게 원하는 목표. 말 그대로 임신이라는 목표. 육신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결과. 비로소 그녀는 용득의 질문을 받은 다음 의심한 적이 없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질문이 매우 이상한 장소에서 던져졌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그녀는 다른 위문공연단 남자들과 함께 베트콩의 땅굴에 잡혀 있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는 한국군과 미군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하거나 종종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마치 정치적 교정을 하기라도 하듯이) 베트콩들의 땅굴 속 삶에 대해서는 매우 친밀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단 한 순간도 우리는 그들이 베트콩들에 처형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순이가 여기서 베트남전의 역사적 의미를 깨달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평등한 공동체 삶을 본다. 그녀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문득 깨달은 것은 사이공의 노천식당에서 미군이 모이는 극장에 폭탄을 던진 다음 도망치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죽는 소녀와의 동병상련일 것이다. 순이는 미군 부대에서 공연을 실패하고 난 다음 노천식당에 앉아 있다가 폭탄을 던진 다음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어가는 베트콩 소녀를 본다. 이 장면은 거의 유일하게 베트남 인민과 순이 사이의 나눠찍기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베트콩 소녀의 죽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는다(S# 56). 그녀는 왜 이 어린 소녀가 죽음을 마다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다음 위문공연단은 한국 부대를 전전하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과의 어떤 접촉도 없다. 공연이 끝나고 떠나는 이들은 베트콩들에게 억류된다(S# 78). 공동체의 삶. 그리고 여기서 순이는 베트콩 소녀의 죽음에 대한 어떤 대답 같은 것을 얻는다. 그때 그 대답은 동시에 순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순이와 베트콩 소녀의 행위는 동일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두 행동은 일신의 자살적 제스처이다. 그녀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명령하는 요구에 대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중이다. 시어머니는 자기 삼대외독자 상길이 베트남에 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당신께서 직접 가겠다고 나서면서 정작 자기 며느리가 베트남에 갈 때는 말리지 않는다. 순이의 웃음은 자신의 운명에 관한 처량한 대답이다. 여기에는 전근대적 봉건제의 몰상식한 요구와 민족사회주의 공동체의 제국주의 투쟁에 관한 임무의 무자비한 요구가 동일한 제스처로 겹친다. 그것이 이 질문이 이 장소에서 던져진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웃음 이후 순이의 어떤 변화도 그녀의 행동에서 감지되지 않는다. 혹은 이준익은 이 두개의 까다로운 문제를 더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 대신 재빨리 땅굴로부터 그녀와 위문공연단을 빼낸 다음 다시 원래의 목표를 향해서 전진시킨다.

순이는 상길 어머니의 분신

하지만 도미노를 가로막는 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역설이다. 여기에 다소 음란한 아이러니가 개입한다. 베트남의 전쟁터 한복판 남편이 있는 장소까지 가기 위해서 순이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그녀 자신의 육신뿐이다. 남 앞에서 말도 잘 못할 만큼 수줍은 그녀는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오로지 섹스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병사들의 시선 앞에 자기 육신을 전시해야만 한다. 순이는 김추자가 아니며, 병사들은 ‘써니’의 노래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정만이 순이의 치마를 들어올리고, 무대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듯이 짧게 자르는 것은 오로지 육신을 전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순이의 육신을 갈망하는 그 수많은 병사 중에서 오로지 상길만이 그녀와 섹스하기를 원치 않는다. 순이는 그 수많은 병사 중 누구와도 섹스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로지 남편과만 섹스하기를 원한다. 이 극단적인 대칭의 관계 속에서 순이는 행위의 모순 속에 던져진다. 난 섹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라고 병사들 앞에서 자기 육신을 전시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오로지 내 남편하고만. 그러나 그녀의 남편 상길은 순이와 할 생각이 없다. 순이는 언제든지 성공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 상대만 가리지 않는다면. 이때 이들 병사들과 상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단 한 가지 차이. 상길은 그녀의 남편이다. 이때 순이가 섹스하기를 바라는 상대는 남편이지 상길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상길이 남편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를 찾아 베트남에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수난은 임신을 하기 위한 것이지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길은 마음속에 둔 다른 애인이 있고, 순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남편’ 상길에게 ‘아내’ 순이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처녀이다. 순이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자기의 요구뿐일 때 그녀는 오로지 섹스를 한 다음 임신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요구와 목표 사이의 불협화음, 혹은 도착적인 관계. 말하자면 임신이라는 결과를 기대하는 남편과의 섹스라는 행위. 나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이 결정이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명령에 대한 복종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순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서 거의 일직선을 그리듯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임신을 해서 박씨 가문의 삼대독자의 대를 잇게 만드는 일은 순이에게 믿음을 지키거나 환상에 빠졌다기보다 무언가 법을 수행하려는 행위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의지한다. 순이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이익과 손해에 관한 어떤 셈도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비극은 목표에 가닿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 목표가 순이가 다가오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순이는 목표를 향해 간다기보다 붙잡으러 가는 것이다. 이준익이 원하는 대답은 어떤 판본인가? 순이가 ‘따귀를 갈기는’ 행위를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때 사실상 그것이 그녀를 베트남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몬 시어머니의 명령이 내면화된 것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그때 여기에는 순이의 행위가 환상의 전이라는 무아지경 속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걸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순이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셈을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녀는 자기의 행동이 이미 자기의 계산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가 남편을 만났다기보다는 어딘가 어머니가 아들을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님은 먼곳에>를 어머니가 아들을 면회하러 가는 이야기로 설정했다면 얼마나 설득하기 쉬운가? 나는 여기에 내기를 걸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시어머니와 순이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려보라(S# 16). 시어머니는 순이에게 “앞장서라, 월남 가자”라고 말한다. 그러자 순이가 “월남 간다고 다 죽는 거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시어머니가 반문한다. “니 전쟁 겪어봤나? 니 시아버지 전쟁 나가 죽은 거 모르나?” 약간의 셈. 상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때 시어머니는 상길을 임신하고 있었을 것이다(혹은 막 출산한 다음이었을 것이다). 상길의 나이의 역산. 1971년으로부터 1950년으로. 순이가 “월남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갑니까?”라고 묻자 시어머니는 “내 혼자라도 갈끼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마누라 싫어 도망간 놈이 살 것 같나? 비켜라”라고 말하며 대문을 열자 순이가 대답한다. “어머니 제가 갑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순이에게 하는 요구는 정확하게 자기의 행동의 반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을 공유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이 공동체의 채무를 나누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 좀 더 복잡한 계산이 들어 있다. 세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 말 그대로 시어머니만 베트남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현실적으로 시어머니가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순이는 이 공동체 안에서 ‘상징적’으로 살해될 것이다(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그렇게 되면 영화는 시어머니와 순이 둘 중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가, 라는 난처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두 번째 경우. 시어머니와 순이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때 이 상황은 고스란히 연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 없이 무대만을 바꾼 게 될 것이다. 이것은 순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마지막 남은 경우. 순이가 혼자 가는 것이다. 이때 순이는 사실상 시어머니의 ‘상상적’ 분신이 되어서 그 자리에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가혹한 비합리성 안에서의 수동적 합리성이다. 물론 네 번째 선택이 있다. 순이가 서울로 가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네트워크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이준익이 가장 피하고 싶은 버전이다. 그는 베트남에 가는 편이 서울로 가출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여전히 공동체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이는 네트워크를 끝장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그 안에서 분신이 되는 것을 떠안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순이는 동시에 상길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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