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을 통한 도약을 그린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
비몽. 슬픈 꿈. 이번 가을 김기덕 감독이 선보일 신작의 제목이다. 꿈을 꾸는 남자 진과 그의 꿈을 현실에서 행하는 여자 란 역은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와 한국 배우 이나영이 맡았다. 김기덕 감독의 지휘 아래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 심지어 하나로 녹아내리는 세상에 사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고 또 증오하는 두 남녀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10월9일 개봉할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장편영화 <비몽>을 소개하면서 오랜만에 신작을 갖고 돌아온 감독의 인터뷰를 함께 전한다. 김기덕 영화에 동승하는 의외의 행보를 보인 배우 이나영의 인터뷰도 실었다.
다시 겨울이다. 김기덕 감독은 <시간>과 <숨>에 이어 <비몽>에서도 다시 한번 앙상한 겨울의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앙상하게 발가벗은 겨울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죽음 혹은 소멸을 통해 (때로는 종교적인) 새로운 경지로 도약(혹은 비약)하려는 그의 영화적 경향과 맞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한국이라는 구체적 시공간의 흔적이 희미해져가면서,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간명해지고 정신적 세계에 대한 관념적 색깔은 더 강렬해지고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가시적 이미지로 전환하려는 의지 때문인지, 그의 영화는 점점 더 추상이 되어간다.
<비몽>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몽>은 기본적인 설정 하나를 영화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지 구르는 눈덩이가 커지듯 이야기가 불어나는 성격의 작품이 아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사건은 굳이 한국을 배경으로 할 필요도 없고, 한국 배우나 일본 배우가 연기할 필요도 없다. 일본 배우와 한국 배우가 각자 자신의 언어로 대화한다는 <비몽>의 당혹스러운 설정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기덕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곧잘 드러나는 종교적 초월의 세계는), 양파껍질 벗기듯 차이의 표면을 벗기다 보면 어느 순간 마주하게 되는 원형질로 가득한 정수리의 세계이다.
파르마콘을 넘고 싶다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뒤쫓다 교통사고를 낸다. 너무도 생생한 악몽. 깨어난 남자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사고 현장은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그대로이다.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뺑소니범으로 연행된다. 여자는 그 시간에 밖에 나간 적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사고 근방의 CCTV에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남자의 꿈과 여자의 행동.
김기덕 감독의 열다섯 번째 작품인 <비몽>은 꿈꾸는 남자 진(오다기리 조)과 그의 꿈을 몽유 상태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 란(이나영)에 관한 영화이다. 진은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옛사랑을 찾아가는 꿈을 꾼다. 진이 꿈속에서 사랑을 찾아나설 때마다, 란은 너무도 아팠던 사랑, 그래서 자신이 버렸던 사랑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 사랑의 지속을 원하는 진과 단절을 원하는 란, 한 사람의 욕망이 성취되면 다른 한 사람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한 사람이 행복해지면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해진다. 그들은 한몸이지만, 그들의 욕망은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다.
<비몽>의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 색의 옷을 입는다. 이나영은 주로 흰색 옷을, 오다기리 조는 주로 검은색 옷을 입는다(이는 시선의 주체와 객체의 자리를 바꾸며 인물들의 과거를 연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까지 일관적이다). <비몽>은 이 대조적인 두색이 궁극적으로 같은 색이라고 말하려는 영화이기도 하다. <활>까지 갈 필요도 없이, <숨>에서 숨을 통해 분노와 사랑, 복수와 용서의 대립쌍을 다루었던 것처럼 <비몽>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욕망의 엇갈림뿐만 아니라, 꿈과 현실, 기억과 망각, 사랑과 파멸 등의 모순적 대립쌍을 보여주고, 이를 합일의 경지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즉, 김기덕은 ‘약’과 ‘독’의 대립적 의미를 한몸에 품고 있는 파르마콘(pharmakon)의 세계를 제시하고, 이를 초월한 세계를 꿈꾼다. 파르마콘의 세계가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면, 이를 넘어선 세계는 그의 꿈이다. 이러한 초월 의지는 그의 영화에서 자궁의 은유로서 감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이유이다. 그의 인물들은 갇힌다. 감옥에, 병원에, 수갑에, 혹은 동떨어진 외진 공간에. 하지만 이들 감금의 이미지는 부활을 예비하는 공간이다. 이렇듯, 그에게 감금, 혹은 죽음 충동은 부활의 충동과 쌍을 이룬다.
김기덕의 인물은 관념세계의 물질적 체화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합일의 세계에 이르기를 권하는 의사(장미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기덕은 반복적으로 텍스트 속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곤 한다. 그것은 자막일 때도 있고(<빈 집> <활>), 직접 등장하는 방식일 때도 있지만(<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숨>), <비몽>에서는 인물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존재로서 등장하는 여의사를 통해서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옷을 번갈아 입고 등장하는 그녀는 이러한 대립 자체를 넘어선 존재, 혹은 두 사람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자로서 일종의 신탁을 내리는 존재와 유사하다(진이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의사의 존재는 진과 란이 파멸의 끝에서 합일의 숭고한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마치 운명에 순응한 결과로 느껴지도록 한다. 어쩌면 김기덕은 인물들에게 그들이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고, 육신의 고통 끝에서 그 길에 당도한 인물들을 지켜보는 냉혹한 신의 위치에 서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첫 이미지였던 잠재태로서의 흔들리는 빛의 움직임이 영화 엔딩의 나비의 날갯짓으로 현실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진은 란을 위해 밤의 꿈을 포기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꿈을 꾼다(혹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란은 나비가 되어 그의 손을 잡는다. 이는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아니라, 꿈과 현실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다. 그 합일의 과정은, 죽음을 통한 부활은, 겨울을 녹이는 봄의 날갯짓은 매혹적이다, 라고 느꼈지만, 한편으로 이 장면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비몽>의 세계가 전작들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음에도, 이상하게도 나는 <비몽>이 그 작품들만큼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했다. 또한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이 마지막 시퀀스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련의 장면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비몽>의 인물은 순수하게 기능적인 역할에 머문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그의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대리자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물들은 미세한 주름으로 굴곡져 있고, 그 안에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김기덕의 인물은 그가 전달하려는 관념의 세계를 물질적으로 체화하거나 그것을 담아내는 일종의 용기라는 것이다. <비몽>의 인물은 이 합일의 경지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은 용기였거나, 채울 것이 없어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용기에 가깝다. 그의 초기작을 거론하듯이 말하자면, 환부의 찢겨짐이 그리 크지 않기에 새살이 돋는 순간이 아름답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덕에게 <비몽>은 그가 다가서고자 한 곳에 다다르지 못한 슬픈 꿈으로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