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려고. 이나영이 김기덕의 영화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첫 번째 반응은 ‘놀람’이었고, 두 번째는 ‘우려’였다. 용기있는 선택이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무작정 호감인 배우가 대부분의 비호감과 일정 부분의 호기심인 감독과 만나는 일은 그만큼 ‘용기’라는 게 필요한 일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질문이 뒤따랐다. 이나영은 평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배우로서 변화의 계기가 필요했던 걸까. 하지만 복잡한 생각을 한 건, 소식을 접한 관객뿐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 <아일랜드>의 중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유정 등 이나영이 연기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속내를 갖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제가 비쳐지는 모습 때문에 변화를 주고자 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김기덕 감독님 영화요? 별로 안 봤어요. <수취인불명>이랑 <나쁜 남자> 정도? 그런데 끝까지 보지는 못했어요. (웃음)” 보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솔직해도 돼요? 우연히 본 거라서….” 케이블TV로 본 건가보다. “(끄덕 끄덕)” 그럼 도대체 왜 김기덕의 영화를 선택했을까? “시나리오가 ‘짱’이었어요. (웃음)” 그녀를 <비몽>으로 이끈 결정적이자 유일한 이유였다.
이나영이 연기한 <비몽>의 란은 몽유병에 걸린 여자다. 그녀는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진이 꿈속에서 벌이는 일을 몽유상태에서 ‘실제로’ 행동한다. 그런데 그렇게 벌어지는 일들이 하필 옛 애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진은 옛 애인을 아직도 사랑하지만, 란은 옛 애인을 증오하고 있다는 게 차이다. 그들을 명상의 세계로 인도한 정신과 상담의는 두 사람이 ‘반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하얀색이 있어야 검은색이 있는 것처럼. 나비의 좌우날개가 붙어 있는 것처럼. “감독님의 심오한 뜻까지는 모르겠어요. 몽환이라든지, 꿈이라든지 하는 단어도 선뜻 와닿지 않았어요. 그냥 단순히 란으로서는 그런 상황이 너무 싫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엮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너무 슬프더라고요. 사실 저도 이 영화는 좀 무서워요. 설명이 안 돼요. 그냥 굉장한 느낌이에요. 마치 몽유상태에서 영화를 찍은 것 같아요.” <비몽>의 촬영이 끝나고 약 8개월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 그 사이 오다기리 조는 물론이고 김기덕 감독도 만난 적이 없었던 그녀는 <비몽>의 기억을 꿈처럼 간직하고 있다. “요즘 예고편을 보면 실감이 안 나요. 오다기리 조 얼굴을 봐도 내가 저 사람이랑 연기했나 싶고요. 그래서인지 주위에서 이야기하듯 어려운 예술영화를 찍었다는 기분도 안 들어요. 그냥 잠에서 깬 기분이에요. (웃음)” 아마도 <비몽>을 둘러싼 모든 경험이 꿈의 속도로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나영은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김기덕 감독을 만났고, 김기덕은 그녀에게 ‘왜 이나영이어야 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의 첫인상부터 물어봤다. “모자 안 쓰셔서 좋다고 했어요. 다른 사진들 보면 항상 군용모자를 쓰시는데, 범죄자 같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는 털모자를 쓰시더라고요. 꼭 스님 같았어요. (웃음)” 김기덕 감독은 그녀를 돌려보낸 뒤에야 자신이 받은 느낌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무언가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던 눈빛, 그리고 강렬하게 드러난 눈동자의 실핏줄. 아마도 몽유상태의 란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촬영이 이어졌다. 총 13회차로 빼곡히 쌓인 촬영스케줄 표를 보고 이나영은 ‘웃었다’. 에이, 설마… 웃음이 무색하게도 스케줄은 그대로 지켜졌다. 이나영은 테이크마다 ‘한번만 더’를 외쳤고 김기덕 감독은 그때마다 괜찮다고 말했다. 매번 남은 필름량을 확인하고 필름을 교체할라치면 얼굴이 하얘지는 감독을 보면서 이나영도 <비몽>의 흐름에 탑승했다. “나중에는 저도 필름이 아깝더라고요. 어떤 때는 일부러 대사도 빨리 친 적이 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안 해보면 또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볼까 싶더라고요. 그냥 다 맡겼어요. 사실 저도 그렇게 느낌대로 막 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나중에는 오히려 더 편했어요. 같은 말이지만 정말 비몽이었나봐요. (웃음)”
비몽에서 깨어난 이나영은 그 어느 때보다 개운한 상태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캐릭터를 벗기가 힘들었던 전작들과 달리 <비몽>은 전날밤 꿈속의 기억처럼 흐릿한 잔상만 남겼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끝난 뒤에는 너무 힘들어서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안 봤어요. 하지만 <비몽>이 끝난 뒤에는 많은 감성을 받고 싶더라고요. 오다기리 조한테 배우로서 자극을 받은 것도 있었고요. 요즘은 하이에나처럼 영화를 보고 있어요. 특히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을 보는 게 가장 좋아요.”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개운함은 곧 죄책감을 동반하고 있다. 혹시 란이 아닌 이나영이 연기했던 게 아닐까. 남들은 자신한테 어려운 예술영화를 찍는다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개운함이 안일한 태도에서 온 건 아닌지 불안해했고 되레 캐물었다. “대사톤이 거슬리지는 않았나요? 경찰한테 비웃는 장면은 어떠셨어요? 나비는 예쁘게 나왔나요?” 꿈을 복기하고 싶은가보다. 독특하고 기이한,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꿈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