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손예진] ‘청순’을 벗어던진 베테랑
2008-10-13
글 : 정재혁
사진 : 오계옥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

사랑, 시련, 이별, 연애, 결혼, 이혼, 재혼, 바람. 손예진은 사랑으로 시작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다. <클래식>에선 아련한 첫사랑에 아파봤고, <작업의 정석>에선 끼 많은 바람녀로 치마도 펄럭였으며, 드라마 <연애시대>에선 이미 한번 살아본 남자와 다시 만나는 어리석음도 범해봤다. 순수한 눈빛에서 요염한 눈웃음, 허탈한 상실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어둠까지. 스크린과 브라운관 속에서 손예진은 항상 사랑과 함께였다. 그리고 이번엔 두 남자와 결혼한다. 박현욱 작가의 베스트셀러 <아내가 결혼했다>를 스크린으로 옮긴 동명의 영화에서 손예진은 이미 결혼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그리고 실현하는 여자 인아다. 언뜻 보기엔 한지원(<작업의 정석>)의 5년 뒤거나 윤은호(<연애시대>)의 좀더 불량한 버전. 하지만 인아는 지원과 은호에겐 없는 “집시의 피”를 갖고 있다. “결혼제도에 대한 교훈을 주자는 영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걱정이 됐죠. 팬들은 바람둥이 같은 인아를 왜 하냐고 하고, 회사에서도 이 캐릭터는 안 된다고 말리고.” 설정만으론 “섬뜩한 캐릭터”지만 공개된 예고편에서 인아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다. “팜므파탈이나 심각한 여성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정윤수 감독의 희망대로 “별을 따달라는 것도, 달을 따달라는 것도 아니고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손예진은 그냥 귀여운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처럼 보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의 옷장을 열고 옷을 하나 갈아입듯 사랑이라 적힌 상자 속의 아이템을 하나 꺼내 장착했을 뿐인 것 같다.

<작업의 정석> 개봉 무렵, 손예진은 “이전까지 연기의 깊이에 대해 고민했다면 이제 다양함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이후 차분하고 예쁜 로맨스 속 주인공에서 벗어나 조금은 왈가닥스럽고 꽤 뻔뻔하며 많이 솔직한 여자들을 연기했다. 처음으로 출연한 스릴러 <무방비도시>의 소매치기 백장미나, 그림 뒤에 숨어 연기한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의 여우비는 그녀가 깊이에서 넓이로 고민의 주제를 바꿨다는 가장 단적인 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예진에게 변신이란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흔히 수식하는 이미지 변신이란 말이 왠지 손예진에겐 해당되지 않는 표현으로 들린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울던 그녀가 <작업의 정석>으로 도발했을 때, 사랑에 고민하던 그녀가 아군과 적군이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는 소매치기 세계(<무방비도시>)에 진입했을 때, 어디 하나 모자랄 것 없이 당당했던 그녀가 방송사 기자(드라마 <스포트라이트>)로 들어가 언론계 바닥에서 굴렀을 때도 손예진에겐 변화에서 오는 위화감이 없었다. 연기 우등생처럼 주어진 역할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표현하는 그녀는 어느 작품에서나 완성도가 높았다. 내숭이나 체면, 조금의 방어막도 없이 무방비지만 편안해 보였던 <연애시대>의 은호는 그중 정점이다. 이른바 말하는 연기 변신이 사실 이미지의 변신이란 걸 감안할 때, 손예진의 이미지는 사랑의 폭만큼 넓고 유연해서 수많은 여자 캐릭터들을 감싸안는다. “해보지도 않았던 것들을 사실 어떻게 연기하겠어요. 내 안의 1%라도 캐릭터에 해당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걸 끌어내서 담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유부녀는 이렇다, 소매치기는 저렇다는 고정관념에선 자유로워지려고 하죠.” 이게 손예진이 매 작품에서 일정 정도 이상의 연기를 뽑아내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빠르다”, “집중력이 좋다”. 본인이 생각하는 장점에 대한 그녀의 답변에서 겸손의 수식어들을 제해보면, 손예진은 눈치가 빠르고, 집중력이 좋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데뷔부터 드라마 주연으로 연기를 시작한 그녀가 이후 조금의 슬럼프도 없이 배우로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상대의 눈빛을 통해” 본인의 단점을 파악하며, “아무리 좋은 감정 표출이라도 스크린에 100%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그녀는 속도가 빠른 드라마에서도, 기다림이 많은 영화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배우다. “귀신이 무서워 공포엔 출연하지 않을 거”라지만 그녀는 어떤 역이든 가장 부담없이 맡길 수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의 말처럼 손예진의 목소리는 어색한 연기를 커버해줄 수 있을 정도로 침착하며 청순, 섹시, 어디에 붙여도 어울리거나 둘을 다 붙여도 충분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이런저런 캐릭터를 부담없이 다 담아낸다. “(데뷔 드라마인) <맛있는 청혼> 이후 저보고 청순하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청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그냥 우리나라 여배우에 붙이는 수식어가 섹시, 청순, 개성 셋밖에 없고, (웃음) 딱히 저에게 붙일 말이 없어서 청순이라 했나보다 생각했죠.” “처음부터 예쁘게 보이는 데 집착하지 않았”던 신인 손예진은 이제 어떤 역할에서도 매력을 뽑아낼 줄 아는 베테랑 배우가 되었다.

고등학생 당시 손예진은 마음속 어딘가에 “무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나 소심해 표현할 줄 몰랐던 백지 같은 여고생이었다. “말이 없어 새침데기라 오해받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피하고 싶은 내성적”인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숙명 같은 연기를 만나” 능숙한 표현가가 되었고, “배우가 작품을 안 하면 침체된 한국영화시장이 더 어려워진다”며 책임감도 느낀다. “신기하고 운 좋았던” 이야기의 연속이다. <스포트라이트>의 시청률 부진으론 조금의 비관도 있었지만, “연기자로서 오히려 초심이 됐다”고 한다. <스포트라이트>와 <아내가 결혼했다> 촬영 이후 두달간 여행, 책, 동물 TV프로그램인 <주주클럽>과 <동물농장>으로 재충전을 하고 있는 배우 손예진. 수많은 여인네의 옷을 갈아입어온 그녀는 아직 27살이다.

헤어 지영원장·메이크업 화주디자이너·스타일리스트 한송경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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