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김주혁] 더이상 멜로는 없다
2008-10-13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아내가 결혼했다>의 김주혁

“잘못하면 병신, 제대로 해도 병신 소리 들을 게 뻔한 역할이다.” 김주혁의 표현이 이렇게까지 거칠어진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그가 연기하는 덕훈은 말마따나 정상이 아니다. 얼핏 보면 그는 대한민국 표본남에 불과하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며 축구 보기를 즐겨하고, 알콩달콩한 연애 끝에 소박한 가정을 꾸리길 꿈꾸는 그런 표본.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이 남자의 상식은 끝난다. 아내 인아가 또 한명의 남편을 갖겠다는, 말도 안 되는 결심을 선언한 것. 동거도 바람도 이혼도 아닌 이건 어디까지나 아내가 두집 살림을 하겠다는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인 ‘&#49763;!’이 절로 튀어나오는 몹쓸 제안이다. 그런데, 이 남자 멍청한 걸까? 지극히 상식적이던 덕훈은 판타지 같은 인아의 제안에 덜컥 ‘예스’를 해버린다.

일차적 비난은 인아에게 돌아가겠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현실 가능케 한 이 남자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연기를 떠나, 덕훈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그의 가치관을 의심하게 만든다.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안 가더라. 결국 하나밖에 생각 안 했다. 사랑한다, 사랑하니까 몸이 간다. 설령 아내와 결혼하려는 상대 남자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도 난 이 여자를 사랑하니까 다 받아줄 수 있다고 주문을 외웠다.” 납득할 수 없는 장면에선 때로 감독을 향해 빼달라는 요구를 한 적도 있지만, 촬영이 진행되는 3개월간 김주혁은 덕훈의 리듬감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주목받기 귀찮아서 여자친구와 극장도 잘 안 간다는 남자, ‘사랑을 꼭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나’라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으로 주위의 질타를 받아온 게 자연인 김주혁의 모습이라면, 영화 속 덕훈은 180도 달랐다. 그는 인아의 말 한마디에 전전긍긍하는 ‘사랑의 노예’로 전락한다.

어쨌든 꾸역꾸역 상황만 합의하고 간다면, 이건 어디까지나 한편의 멜로임에 틀림없다. 한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에게 하늘의 별까지 따주고 싶던 남자가 마침내 그 여자의 모든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아름다운 멜로. ‘멜로의 달인’ 김주혁이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다시 또 멜로 연기다. 그런데 덕훈은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고 그 점이 흥미로웠다. 만일 시나리오에 덕훈의 심경이 변하는 과정이 표현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캐릭터는 인아를 연기하는 손예진의 몫이지만 결국 연애와 결혼에 관한 해답을 제시하는 열쇠는 덕훈의 변화를 통해서다. 그는 수긍하기 힘든 상황에 펄쩍 뛰다가 한참을 술로 괴로움을 토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결국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 덕훈의 면모는 그래서 버라이어티하다. <프라하의 연인>의 ‘상현’이 보여준 듬직한 기질을 바탕으로 깔고, 거기에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홍두식’이 가진 엉뚱함을 주재료로 하여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광식이’의 수더분한 지고지순함을 살짝 토핑으로 얹으면 덕훈 준비 완료. 기호에 따라 뭐든 이해해줄 것 같은 <싱글즈>의 이상적인 로맨티스트 ‘수현’의 한 부분을 소스로 뿌려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자의 반, 타의 반 지금까지 김주혁의 시선은 언제나 멜로의 자장 안에 머물러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아버지 김무생에게서 엄격함을 걷어낸 김주혁의 마스크는 어떤 멜로도 가능하게 해주는 훌륭한 소도구로 작용했고, 무심한 듯 건조한 그의 어조는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감성으로 툭툭 묻어났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지금껏 해온 캐릭터를 조금씩 빼닮은 덕훈이라는 짐을 막 내려놓아서일까. 김주혁은 그 어느 때보다 멜로에 관한 제법 단호한 결정을 내비친다. “멜로는 이번이 끝이다. 다시는 안 할 거다. 멜로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김주혁 변했다고 평가해줄 거 같다.” 한 방향으로 치중한 자신의 이력에 딴죽을 거는 건 데뷔 10년차 배우의 날선 각성이다. 사실 그를 돋보이게 했던 멜로적인 장점들은 따지고 보면 어느 장르와도 융화 가능한 성질의 보편적인 것이다.

비록 제작이 중단됐지만 얼마 전 김주혁은 조선시대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사극에서 살인을 조사하는 의금부 도사로 변신, 지금까지 그가 맡은 캐릭터와는 차별화를 꾀했다. 현실화됐다면 김주혁에 대한 또 다른 성질의 곁가지가 생겼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선 굵은 남자 연기에 대한 갈증이 왜 없겠나. 지난해 계획한 영화가 4편이나 취소됐다. 보름 뒤에 촬영입니다, 했다가도 엎어지는 게 지금 충무로의 현실이다. 요즘은 어떤 영화를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남는가가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김주혁은 조급증 없이 기다리자는 마음을 다진다. “엑스트라부터 시작한 일이다. 편편하게 천천히 올라갔다 내리막에서도 천천히 내려오는 게 내 신조다. 가파른 산을 급히 오르내리다간 어디 힘들어서 살겠나.” 김주혁은 아무리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낯가림 때문에 건방지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 오해가 무색하게도 거액의 개런티보다 회당 2만원의 출연료일 때가 행복할 수 있다고 툭 터놓고 말할 줄 아는 배우다.

인터뷰 다음날, 오는 12월 SBS에서 방송 예정인 와인 소재의 드라마 <떼루아> 촬영차 프랑스 보르도 지방으로 촬영을 간다는 그는 “술은 못하지만 와인 정도는 좀 배워야겠다. 이제 술도 좀 마시면서 사람들과 친근함도 좀 가져보려고 한다.” 그의 말마따나 워낙 물려받은 기질이 고집스러운 터라 얼마만큼의 여유가 생길진 스스로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미지수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사회화’는 김주혁의 연기에 반영될 지극히 신선한 요소다. 느리지만 그의 행보는 그래서 기다려진다.

스타일리스트 남주희, 최진아, 한희경·헤어 임진옥(style floor)·메이크업 향미·의상협찬 닐바렛, 코스믹원더 by 에크루, 솔리드 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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