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품했던 작품들의 스탭들 챙기랴, 관객 반응 체크하랴, 협회 행사 챙기랴 나름 분주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그래도 틈만 나면 멍하니 해운대 바닷가를 응시했다. 간만에 느껴지는 현실과의 동떨어짐. ‘조오타~!’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망중한을 즐기는 기분도 잠시. 연달아서 휴대폰이 울린다.
“진성호 의원실 보도자료 보셨나요?”
“영진위 자유게시판글 보셨어요?”
“부산에서 진행된 세미나에서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말을 했어요?”
어느새,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는 나. 동원이 형(김동원) 이름이 등장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등장한다. 41억원을 해먹었단다. 순간 드는 생각.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완전히 특혜지원단체로 보겠군!’ 젠장! 서울에서 해야 할 일들이 그려진다. ‘아마 며칠 동안 보도자료를 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무슨 놈의 특혜단체 직원 월급이 이리도 궁상이야?
국회의사당 6층 복도. 20인치쯤 되어 보이는 TV모니터 앞에 노트북과 인터넷으로 무장한 영화진흥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영상자료원 직원들 수십명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다. 국정감사장을 찾은 것은 순전히 답답해서였다. 진성호 의원실의 보도자료에 대한 반박 보도자료를 낸 직후 차라리 국정감사장에 가보는 것이 현실성있는 대응을 위해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들의 얼굴은 한명도 안 보인다. 인터넷 생중계로 보고 있나? 부산에서는 좀 보이던데….
영진위 국감자료를 받아보았다. 5개월 동안 단 한 차례도 공개된 바 없는 자료다. 그런데 참 친근하다. 몇 가지 사업은 좀 달라 보이는데, 대체적으로는 별반 과거와 다를 게 없다. 뭐지? 기대했던 알맹이는 없다. 중장기 대책안은 없고, 누구나 다 아는 현재의 상황만이 나열되어 있다. 뜬구름만 잡다가 날샐 것이 분명하다. 괜히 왔나?
그래도 나름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몇몇 국회의원들은 몇몇 3기 영진위 위원들에 대해서 물고 넘어지겠지?
영진위 노조의 성명서까지 나온 마당에 강한섭 위원장의 말들에 대해서도 물고 넘어질 거야!
그래도 오랫동안 이쪽 분과에 몸담은 국회의원들은 몇몇 정책에 대해서 질의를 하겠지?
역시 예상은 맞아들어간다. 촛불집회, 한국독립영화협회, 김동원. 나에게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요약하면 좌파세력에 대한 특혜지원 시비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쳐다본다. 난 그냥 웃는다. 노무현 정부가 좌파였나? ㅋㅋ.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지 않은 영화인들만 골라서 지원하려면 정말 머리가 아플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가장 신봉하는 영화인들을 좌우로 갈라치기하려는 시도 자체가 난센스라는 사실은 알고나 계시는지….
하지만 진성호 의원이 ‘스텝구성합리화사업’에 대한 특혜의혹을 제시할 때, 난 오히려 영진위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심사위원들의 심사점수가 외부로 공개된 것이다. 내부에서 협조하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 유출될 수 없는 자료이고, 심사점수를 공개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현저한 비위(非違)가 법적인 공방으로 이어질 때’ 정도일 것이다.
나도 심사에 참여해본 적이 있어서 아는 사실이지만, “외부로 공개될 일은 없으니, 정말 우리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좋은 작품을 선정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이야기했던 영진위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지껄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계속 발생했다.
10월27일 영화인의 날에 유인촌 장관님과 영화계 인사들을 모시고, 위기 타개책을 발표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저 깜짝발표는 영화계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인가. 국정감사 이후 전면적으로 영화계의 여론 수렴작업을 진행하겠다는 제스처는 말 그대로 정말 제스처였나?
평가가 어찌되었건, 각계의 여론을 수렴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던 3기에 비해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퇴보’를 목도하는 것은 정말 씁쓸한 일을 넘어 한심한 일이다.
민주당 최문순 의원과 강한섭 위원장의 공방(?)이 진행될 즈음, 6층 여기저기에선 한숨소리가 나왔다. 국정감사 전날 성명서를 발표했던 한인철 영진위 노조위원장의 허탈한 표정에서 모든 것이 함축되어 드러났다. 아울러 복합상영관 때문에 불철주야 열심히 뛰었던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복합상영관은 3기에서 구체적으로 해놓은 일이 없다’고 이야기할 땐 내가 오히려 영진위 직원들을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감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더이상 새로운 사실은 나오지 않았고,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옥상의 흡연공간을 들락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삼삼오오 앞일에 대해서 고민하는 목소리들… 그런데 내가 한숨이 나오고 참담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희한하게 ‘리더십’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영화계의 정책수장이 국회의원들에게 강한 질타를 받는 모습을 좋아할 영화인은 없을 것이다. 영진위 직원들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적어도 정책 공방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질타를 받으면 최소한 무엇을 준비할지에 대해 상은 그려지는 법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구설수 때문에 질타를 받으면 허탈해진다.
세대와 이념을 뛰어넘어 영화인들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세대와 이념을 뛰어넘는 프레임과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가 아닐까?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의 기본이지 않을까?
젠장! 반박 보도자료 나부랭이 쓸 시간에 해야 할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 얼마나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