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편의 역대 제임스 본드 영화에 순위를 매겼다. <씨네21>의 오랜 본드 팬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한 순위다. 1위와 22위를 정하는 데는 이견이 전혀 없었다. 객관적인 기준이 뭐였냐고? 본드 팬덤의 세계에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면 제발 메일 좀 보내주시길. 왜 21편이 아니라 22편이냐고? 번외편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을 씹어발기는 재미를 놓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22. <어나더데이> Die Another Day
2002년 감독 리 타마호리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할리 베리, 토비 스티븐스
<어나더데이>는 2002년 11월1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왕립영화관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섹스 피스톨스가 아직도 활동 중이었다면 “신이시여 여왕을 구하시라”고 노래했을 일이다. <전사의 후예>의 리 타마호리가 (아마도 술에 취한 채) 메가폰을 쥔 <어나더데이>는 두말할 필요없는 최악의 제임스 본드 영화다.
거대한 파도를 타고 북한으로 잠입한 본드는 호버크래프트를 탄 북한군에 잡혀서 고문당하고, 주황색 비키니를 입고 <살인 번호>의 어슐라 안드레스를 흉내내는 할리 베리를 쿠바에서 만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로봇팔을 장착한 (게다가 성형수술을 통해 백인으로 변신한) 북한군 장교와 추락하는 수송기 속에서 싸운다. 아마 제작진의 목적은 제임스 본드 사상 값비싸 보이는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의욕이 지나쳤던 나머지 본드 역사상 가장 저렴해 보이는 사이파이(Sci-fi)영화가 탄생했다는 거다. 한반도에 대한 자료조사가 너무 형편없었다고 괜히 트집잡는 게 아니다. 생각들해보시라. 제작사가 <어나더데이>를 끝으로 “새로운 본드 영화를 만들겠다”며 피어스 브로스넌을 쫓아낸 이유가 뭐겠는가.
21.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Never Say Never Again
1983년 감독 어빈 커시너 출연 숀 코너리, 막스 폰 시도, 킴 베이싱어
1983년은 ‘본드 전쟁’이 벌어진 해였다. 두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옥토퍼시>와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이 같은 시기에 박스오피스에서 격돌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고? 그걸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본드 시리즈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소설 <썬더볼>의 판권을 (지금까지 본드 시리즈를 만들어온) 제작자 앨버트 브로콜리의 EON 프로덕션에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본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썬더볼>의 리메이크 권리는 플레밍의 친구였던 케빈 매클로리에게 있었다. 매클로리는 독자적인 본드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EON 프로덕션과 법정싸움도 불사하던 중 자신이 가진 유일한 판권을 무기로 <썬더볼>의 리메이크작인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을 만들게 된 거다.
그러나 숀 코너리를 복귀시키고 막스 폰 시도라는 명배우를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옥토퍼시>의 압승이었다. 숀 코너리가 너무 늙어서는 아니다. 로저 무어는 3살이나 더 많다. 문제는 어빈 커시너(<제국의 역습> <로보캅2>)의 압도적으로 밋밋한 연출. 반면에 <옥토퍼시>는 로저 무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화끈한 오락영화다. 게임 끝.
20.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Diamonds Are Forever
1971년 감독 가이 해밀턴 출연 숀 코너리, 찰스 그레이
숀 코너리는 이미 67년작 <두번 산다>를 끝으로 더이상 본드 역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코너리에 이어 제2대 본드를 맡은 조지 레젠비의 <여왕폐하 대작전>(1969)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거다. 다급해진 제작진은 숀 코너리를 “딱 한번만 더!”라는 조건을 붙여 복귀시킨다. 그러나 마음 떠난 배우를 ‘역사상 최고의 출연료와 영화 수익금의 1%’라는 조건으로 꼬드겨서 다시 앉혀놨으니 영화가 제대로 나올 리가 있나.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스펙터 일당과 싸운다는 내용의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는 매력없는 배경, 의욕없는 배우, 느려터진 액션장면, <두번 산다> 이후 본격적으로 B급영화 스타일의 블록버스터로 변해버린 시리즈의 변화가 혼연일체로 제 무덤을 파는 영화다. 게다가 본드 역사상 최고작 중 하나인 <골드핑거>의 가이 해밀턴 감독이 알고보니 더 문제였다. 향후 이 남자는 <죽느냐 사느냐>와 <황금총을 든 사나이>처럼 가장 재미없는 본드 영화들을 줄줄이 생산할 귀인이었다.
19. <죽느냐 사느냐> Live and Let Die
1973년 감독 가이 해밀턴 출연 로저 무어, 제인 세이무어, 야펫 코토
숀 코너리가 본드 역에서 도망치자 시리즈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2대 본드 조지 레젠비는 도무지 대중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다급해진 제작자들은 대규모 오디션을 거쳐 TV시리즈 <세인트>의 로저 무어를 새로운 본드 역으로 캐스팅했다. 누구도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 로저 무어는 이미 숀 코너리보다 나이가 많았고 살인면허를 지닌 냉철한 스파이를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볍고 능글능글한 이미지였다.
물론 역사가 증명하듯이 로저 무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본드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물론 아니다. 로저 무어의 첫 번째 본드 영화 <죽느냐 사느냐>는 팬들의 기대에 응하지 못하는 범작이었다. 헤로인 시장을 독점해 미국 경제를 지배하려는 카리브해 국가의 총리와 싸운다는 이 영화는 초현실적인 주술의 힘이 남용되는 바람에 스파이물로서의 긴장감은 턱없이 부족한데다 70년대 초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유행을 어설프게 따르는 데 급급했다. 폴 매카트니의 주제곡 <Live and Let Die>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18. <네버다이> Tomorrow Never Dies
1997년 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양자경, 조너선 프라이스
루퍼트 머독의 심기를 가장 심하게 건드렸을 법한 본드 영화. 약간 정신이 나간 언론 재벌 엘리엇 커버(조너선 프라이스)가 인공위성과 언론을 이용해 3차대전을 일으키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대국들을 무력화해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거다. <네버다이>의 약점은 도무지 97년이라는 제작연도를 무색하게 할 만큼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언론 재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세계대전을 향한 첫 번째 목표가 중국과 영국의 전쟁 발발이라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영국이 아직도 대국이라고 생각하는 영국산 블록버스터의 판타지라고 설명하는 게 손쉽겠다.
<네버다이>의 유일한 장점은 양자경이다. 중국 첩보원 웨이린으로 분한 이 말레이시아 출신 액션스타는 본드와 함께 빌딩에서 뛰어내리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방콕의 혼잡한 시내를 달리며 다리를 휘두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화액션의 인기를 빌려와서 방만하게 만들어낸 ‘포스트-홍콩 반환’ 제임스 본드 영화라고나 할까.
17. <나를 사랑한 스파이> The Spy Who Loved Me
1977년 감독 루이스 길버트 출연 로저 무어, 리처드 키엘
루이스 길버트가 감독한 본드 영화들은 모두 3편이다. 숀 코너리 시절의 <두번 산다>와 로저 무어 시절의 <문레이커> 그리고 <나를 사랑한 스파이>. 이쯤되면 이 양반의 전략이 뭔지는 뻔하다. 스파이물의 오리지널리티를 살짝 거두고 압도적인 규모의 블록버스터 오락영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로저 무어의 세 번째 본드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반드시 흥행에 성공해야만 했다.
<죽느냐 사느냐>(1973)와 <황금총을 든 사나이>(1974)가 연이어 흥행에서 빛을 보지 못하자 제작자들은 어떻게든 눈요깃거리를 극대화해 대중의 돈을 긁어모으라 지시했다. 전작들보다 2배로 늘어난 제작비를 무기로 루이스 길버트 감독은 이후 로저 무어 본드영화의 특징으로 자리잡는 ‘신기한 비밀병기 놀이’를 마구잡이로 구사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본드카 로터스 에스프리. 지상을 달리다가 물속으로 뛰어들면 즉각 잠수함으로 변신하는 이 기막힌 본드카는 당대 소년들의 궁극적인 판타지였다. 그러나 장난감이 멋지다고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건 아니다. 칼리 사이먼의 주제곡 <Nobody Does It Better>와 본드카가 없었다면 기억에 남을 게 별로 없는 작품.
16. <황금총을 든 사나이> The Man with the Golden Gun
1974년 감독 가이 해밀턴 출연 로저 무어, 크리스토퍼 리
로저 무어가 자신의 두 번째 본드 영화에서 격돌하는 상대는 태양 에너지를 독점해서 세계를 손에 넣겠다고 설치는 황금총의 사나이 스카라망가다. 이 남자의 특이한 점이라곤 젖꼭지가 세개라는 것, 그리고 기절초풍하게도 신사적인 카우보이식 대결을 제임스 본드에게 제의한다는 것이다. 본드 역사상 가장 어안이 벙벙한 악당이라고 해야 할까. 국내 올드팬들 중에서는 <황금총을 든 사나이>를 가장 흥미진진한 본드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영화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기억에 남을 만한 이미지가 많아서다. 생각해보시라. 타이 푸껫의 바위섬 하나가 아예 ‘제임스 본드 바위’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다가(신혼여행객이라면 이 바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당대 무협영화(특히 <용쟁호투>!)의 요소들이 마구잡이로 차용되어 펼쳐진다. 이국적인 이미지의 향연 덕에 <황금총을 든 사나이>는 여전히 일종의 본드 클래식으로 남아 있다. 한국 배우 오순택이 본드를 돕는 인물로 등장한다.
15. <언리미티드> The World Is Not Enough
1999년 감독 마이클 앱티드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소피 마르소, 로버트 칼라일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가치를 따지자면 <언리미티드>는 피어스 브로스넌 본드 영화의 절정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언리미티드>의 구심점이 본드와 M, 그리고 악당에게 거의 공평하게 분배된다는 사실이다. M의 친구인 석유재벌 로버트 킹이 사망하자 본드는 킹의 딸인 일렉트라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본드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시달리는 일렉트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알고보니 그녀는 자신을 납치했던 악당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다.
<언리티미드>는 M과 일렉트라라는 두 여자 캐릭터의 갈등을 통해서 드라마를 풀어나가며 <골든아이>나 <네버다이>가 이룩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의 본드 영화’에 좀더 가깝게 다가간다. 구소련 지역의 유정, 스페인의 빌바오, 런던 템스강의 운하와 거대한 잠수함을 무대로 한 액션장면들은 마이클 앱티드의 능숙한 솜씨로 조련되었다. 소피 마르소가 세심하게 연기한 일렉트라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의 바바라 카레라 이후 가장 기억할 만한 악역 본드걸이다.
14. <뷰 투 어 킬> A View to a Kill
1985년 감독 존 글렌 출연 로저 무어, 크리스토퍼 워컨, 그레이스 존스
로저 무어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본드는 컴퓨터칩 산업을 독점하기 위해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실리콘밸리를 파괴하려는 미치광이 맥스 조린(크리스토퍼 워컨)과 대결한다. 83년작 <옥토퍼시>를 제외하자면 존 글렌 감독이 연출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포 유어 아이즈 온리> <리빙 데이라이트> <라이센스 투 킬>)의 특징은 ‘현실성’이다. 글렌의 본드 영화는 대체로 이언 플레밍의 원작이 지닌 스파이물로서의 성격에 충실한 편이며 신기한 특수장비를 쓸데없이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인 스파이물 계열의 본드 영화 중에서 <뷰 투 어 킬>은 가장 재미가 덜하다. 어느 정도는 로저 무어의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3대 본드로 발탁된 순간에도 숀 코너리보다 나이가 많았던 무어는 <뷰 투 어 킬>을 찍을 당시 거의 예순에 가까웠다. 후일담에 따르면 무어는 본드걸을 연기한 타냐 로버츠의 엄마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알고는 시리즈를 떠나기로 결심했단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무어는 이 영화를 끝으로 티모시 달튼에게 자리를 넘긴다.
13. <골든아이> GoldenEye
1995년 감독 마틴 캠벨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숀 빈, 이자벨라 스코룹코
티모시 달튼의 <살인면허>를 끝으로 시리즈는 완전히 끝장난 것 처럼 보였다. <다이 하드>와 <리쎌 웨폰> 시리즈가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공식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냉전도 이미 끝나버린 90년대 초반 이후의 할리우드에서 (티모시 달튼을 고용해 좀더 과격한 액션을 구사했음에도) 본드 시리즈는 지나치게 순진무구해보였다. 그러나 제작진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리즈를 접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드 시리즈는 달튼 시절의 흥행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이 되는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이다.
시리즈를 살려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제임스 본드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제작진의 선택은 TV시리즈 <레밍턴 스틸>로 인기를 구가하던 피어스 브로스넌이었다. 선택은 옳았다. 브로스넌은 로저 무어처럼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았고 티모시 달튼처럼 무미건조하지도 않았다. 브로스넌이 탱크를 몰고 시가지를 돌진하다가 고개를 쑥 내밀고 넥타이를 고쳐매는 장면에서 모두가 외쳤을 것이다. 제임스 본드다!
12. <두번 산다> You Only Live Twice
1967년 감독 루이스 길버트 출연 숀 코너리, 아키코 와카바야시, 미에 하마
전작 <썬더볼>이 본드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수익을 올렸지만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제작자들은 거대한 제작비를 투자해 이국적인 로케이션과 압도적인 액션장면을 버무려낸 뒤 돈을 뽑아내는 블록버스터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두번 산다>는 블록버스터화된 본드 영화의 발단이라고 할만 하다. 미국의 우주선이 본드의 영원한 숙적인 스펙터 일당한테 우주에서 납치된다. 우주선이 일본 상공으로 떨어졌다는 정보를 알아낸 본드와 일본 첩보부(에서 파견한 닌자들!)는 화산섬에 숨겨진 스펙터의 본부로 기습을 시도한다. 이쯤되면 알 만할 거다.
<두번 산다>는 도쿄올림픽 이후 다시 세계 무대에 복귀한 일본을 이용해 거의 SF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을 버무린 작품이다. 그러나 이 느슨하고 어이없는 본드 영화는 기이한 매력을 지녔다. 이후 <오스틴 파워> 같은 코미디영화들이 끊임없이 패러디한 본드 영화의 클리셰(지하에 숨겨진 거대한 요새, 얼굴에 상처가 있는 대머리 악당 두목)가 처음으로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11. <포 유어 아이즈 온리> For Your Eyes Only
1981년 감독 존 글렌 출연 로저 무어, 캐롤 부케, 토폴
<포 유어 아이즈 온리>는 국내 영화팬들에게 가장 익숙한 본드 영화 중 하나다. 당대 최고의 여자가수 중 하나였던 시나 이스턴이 부른 동명의 주제곡과 가장 인기있는 본드걸 중 한명인 프랑스 여배우 캐롤 부케 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포 유어 아이즈 온리>가 두 여자들의 덕만으로 득 본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공은 감독인 존 글렌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 티모시 달튼의 본드 영화를 모두 감독한 존 글렌은 초창기 로저 무어 영화들의 화려하고 난삽한 어드벤처 영화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아예 <포 유어 아이즈 온리>의 프리 타이틀 액션장면(타이틀이 등장하기 전에 나오는 액션장면. 본드 영화의 오랜 전통이다)을 통해 6편의 영화에서 본드를 괴롭히던 스펙터의 수장 블로펠트를 간단하게 죽여버린다. 좀더 현실적인 스파이물로 복귀하겠다는 존 글렌의 선언이라고나 할까. 선언은 성공적이었다. <포 유어 아이즈 온리>는 다소 밋밋한 액션장면들에도 여전히 가장 볼 만한 로저 무어 본드 영화 중 하나다.
10. <옥토퍼시> Octopussy
1983년 감독 존 글렌 출연 로저 무어, 모드 애덤스, 로이스 주르당
<옥토퍼시>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같은 해 숀 코너리 주연으로 제작되던 번외편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보다 더 높은 흥행성적을 올리는 것. 앨버트 브로콜리와 EON 프로덕션, 그리고 로저 무어로서는 번외편이 오리지널 본드 시리즈보다 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작진이 선택한 길은 ‘가장 안전한 오락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포 유어 아이즈 온리>를 통해 모처럼 이언 플레밍의 정신에 근접한 스파이영화를 만들었던 존 글렌 감독이 제작사의 요구를 듣고 낙담했는지 아닌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본드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오락영화 중 하나를 훌륭하게 뽑아냈다는 사실이다. 보석을 노리는 인도의 대부호와 유럽 정복을 꾀하는 소비에트 장군에게 대항하는 제임스 본드는 인도의 매혹적인 도시 우다이푸르에서 이국적인 모험을 벌이고, 거의 <인디아나 존스>류의 당대 블록버스터를 연상시키는 모험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로저 무어 본드 영화의 오락적 절정.
9. <살인면허> Licence to Kill
1989년 감독 존 글렌 출연 티모시 달튼, 캐리 로웰, 로버트 다비
문제는 제임스 본드였다. 세상은 변했다. 냉전의 종말은 제임스 본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제 본드에게는 온갖 이색적인 비밀병기를 들고 국경을 넘나들며 싸울 만한 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존 글렌 감독은 이참에 완벽하게 새로운 본드를 만들고 싶어했다. 방법은 단 하나였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과 전혀 상관없는 영화를 만드는 것 말이다.
<살인면허>에서 본드는 MI6으로부터 살인면허를 박탈당하면서까지 오로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남미의 마약왕에 대적한다. 게다가 그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다이 하드> 시리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온갖 개고생을 감내하며 온몸을 바쳐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살인면허>의 시나리오가 애초에는 본드 시리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말하자면 <카지노 로얄>에서 대니얼 크레이그가 해낸 성과를 이미 티모시 달튼은 <살인면허>를 통해 일정 부분 거뒀다는 거다. 그러나 <살인면허>는 비슷한 시기 개봉한 <리쎌 웨폰2>에 훨씬 못 미치는 흥행을 기록했고 티모시 달튼은 보드카 마티니를 다시는 마시지 못했다.
8. <살인번호> Dr. No
1962년 감독 테렌스 영 출연 숀 코너리, 어슐라 안드레스, 조셉 와이즈먼
모든 역사의 시작. 당시 본드 역으로 거론됐던 인물들을 한번 나열해보자. 로저 무어. 그는 어쨌거나 제3대 본드가 될 운명이다. 케리 그랜트. 그도 영국 출신에다가 댄디한 맛이 있으니 나쁘지 않았겠지만 스파이 역할에 목매달기에는 지나치게 대스타였다. 리처드 존슨과 패트릭 맥구한. 글쎄. 적임자를 찾아 헤매던 제작자 해리 샐츠먼과 커비 브로콜리는 우연히 본 디즈니 영화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장한 남자를 발견했다. 숀 코너리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누구도 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를 능가하지 못했다.
물론 본드 역사상 최고의 본드걸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허니 라이더 역할을 맡은 어슐라 안드레스가 하얀 비키니를 입고 해변으로 걸어올라오는 장면은 본드 시리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인용되고 해석되어지는 기념비적 이미지 중 하나다. 그 장면을 가장 멋지게 재해석한 본드걸이 누구냐고? 할리 베리? 설마. 정답은 <카지노 로얄>의 대니얼 크레이그다. 손바닥만한 수영복을 입고 근육을 자랑하며 뭍으로 올라오는 크레이그의 모습을 다들 기억하시는가.
7. <썬더볼> Thunderball
1965년 감독 테렌스 영 출연 숀 코너리, 클로딘 오거, 아돌포 셀리
본드 사상 최고의 대중적인 히트작을 꼽으라면 정답은 <썬더볼>이다. 전작 <골드핑거>가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본격적인 흥행영화의 궤도에 올려놓자 제작사는 거대한 도박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골드핑거> 제작비의 3배가 넘는 900만달러를 아낌없이 투여해 본드 시리즈를 마니아적인 스파이물이 아니라 주류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 치켜세우려는 도박 말이다. 그 결과 <썬더볼>은 무려 1억4천만달러에 이르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전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화폐 가치를 따져본다면 전세계적으로 6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인 <카지노 로얄>보다도 더 높은 흥행성적이다).
투여된 돈만큼 액션은 영원불멸이다. 특히 수중액션장면들은 예스럽게 느려터진 편집을 제외한다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볼 만하다. <썬더볼>은 압도적인 규모만 내세워 관객을 공략하는 몇몇 후기 본드 영화와도 다르다. <살인면허>와 <위기일발>로 제임스 본드 영화의 기초를 다듬었던 테렌스 영 감독은 액션장면을 위해 스토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꽉 짜인 스토리 속에 액션을 녹여낸다. <썬더볼>은 이후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으로 리메이크됐다. 물론 오리지널이 훨씬 낫다.
6. <리빙 데이라이트> The Living Daylights
1987년 감독 존 글렌 출연 티모시 달튼, 매리엄 다보
사실 티모시 달튼은 이미 60년대 말부터 유력한 제임스 본드의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어리다는 이유로 본드 역을 거절했다. 그리고 때가 왔다. 로저 무어가 <뷰 투 어 킬>을 마지막으로 본드 역에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영국왕립극단 셰익스피어 배우 출신의 티모시 달튼이 마침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새로운 본드를 맞이한 제작진은 현실적인 본드 영화를 추구하던 존 글렌 감독과 함께 숀 코너리 시대의 본드, 그러니까 본격적인 스파이물로의 귀환을 결심한다. 거추장스러운 어드벤처 영화의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고 날렵하게 만들어진 <리빙 데이라이트>는 70~80년대적으로 천박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던 로저 무어 시대와 완벽하게 결별을 선언하는 본드 시리즈의 정수다. 문제는 티모시 달튼의 본드 시리즈가 종종 국내 본드 팬들 사이에서조차 별볼일 없는 작품으로 오해받곤 한다는 거다. 시간이 있으면 이 작품과 <살인면허>를 다시 보시라. 티모시 달튼은 근사한 본드였고, 영화들도 근사하게 본드적이었다.
5. <문레이커> Moonraker
1979년 감독 루이스 길버트 출연 로저 무어, 로이스 차일즈, 리처드 키엘
전통적인 본드팬들이라면 지금쯤 경악과 분노를 쏟아낼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 <문레이커> 따위의 괴작이 5위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냐고. 그러나 순수한 오락영화로서의 가치에서 <문레이커>를 능가할 만한 본드 영화는 거의 없다. 물론 이야기로 따지자면야 이만한 괴작도 드물기는 하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보내지던 문레이커가 탈취당한다. 본드는 독가스로 인류를 모조리 살상한 뒤 선택받은 남녀들만 데리고 새로운 인류 제국을 건설하려는 문레이커 제작자 드랙스의 음모를 밝혀낸다. 문제는 후반부다. <스타워즈>로 시작된 할리우드의 우주 시대를 바라보던 제작자들은 아예 본드를 우주로 올려보내 한바탕 우주전쟁에 뛰어들도록 만든다(제아무리 본드라 한들 우주왕복선을 손쉽게 조종할 줄 안다는 설정은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하지만 리우데자네이루와 베니스 등 이국적인 무대들을 배경으로 정신없이 펼쳐지는 전반부 액션 레이스는 로저 무어 본드 영화의 오락적인 흥취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이만큼 재미있으니 우주전쟁은 이만 용서하자. 아니면 전반부만 똑 떼내서 감상하시든가.
4.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1963년 감독 테렌스 영 출연 숀 코너리, 타티아나 로마노바
<살인번호>는 제임스 본드의 시작이었지만 시리즈의 진정한 시작은 오히려 <위기일발>이다. 본드 영화 다운 액션이 부족했던 <살인번호>에 비해 <위기일발>에는 이후 본드 시리즈의 관습으로 자리잡은 여러 가지 요소들(보트 액션, 헬리콥터 추격장면, 본드의 비밀 병기)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두번 산다>를 통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는 스펙터의 1인자 블로펠트가 특유의 하얀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으로 처음 선보인다. 그러나 본드 클리셰가 거의 완성을 이루었던 차기작 <골드핑거>에 비하면 <위기일발>에는 여전히 소박한 스파이영화 특유의 향취가 강력하게 남았다. 바로 그 때문에 숀 코너리를 비롯한 수많은 본드팬들은 <골드핑거>나 <썬더볼>을 젖히고 <위기일발>을 역사상 최고의 본드 영화로 손꼽아 마지않는다. 그러고보면 <위기일발>은 제임스 본드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 굳이 묶어놓을 필요가 없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이지 멋진 스파이영화의 고전이니까.
3. <여왕폐하 대작전> 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1969년 감독 피터 R. 헌트 출연 조지 레젠비, 다이애나 리그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에서 가장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작품을 선정하라면 단연 <여왕폐하 대작전>이다. 개봉 당시 시리즈의 팬들은 도저히 이 작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숀 코너리의 아우라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왕폐하 대작전>이 이전 시리즈와 결별을 선언하는 새로운 본드 영화였기 때문이다.
조지 레젠비의 본드는 숀 코너리와 달리 극도로 인간적인 본드다. 그는 무려 MI6에 사표를 던지고 은퇴한 뒤 사랑에 빠진 여자(본드 영화사상 가장 인기있는 본드걸 중 하나인 다이애나 리그)와 결혼을 한다. 게다가 <여왕폐하 대작전>은 갑작스러운 여자의 죽음과 본드의 눈물을 보여주며 황급하게 막을 내려버린다. 이런 비극적인 로맨스 앞에서 당시의 본드 팬들이 분노를 금치 못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40여년 뒤의 팬들은 <여왕폐하 대작전>과 동일한 실험을 단행한 본드 영화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카지노 로얄> 말이다.
2.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
2006년 감독 마틴 캠밸 출연 대니얼 크레이그, 에바 그린, 제프리 라이트
<씨네21>은 <카지노 로얄> 개봉시 어떠한 특집기사도 쓰지 않았다. 실수였다. <카지노 로얄>은 몇몇 평자들로부터 알고보면 별로 변한게 없거나, 혹은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흉내내는 프랜차이즈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해였다. <카지노 로얄>이 6억달러의 흥행성적을 거두며 프랜차이즈를 부활했기 때문에 뒤늦게 고백하는 건 아니다. 이 영화는 본드 시리즈를 새롭게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액션영화의 전형적인 구성으로부터 완벽하게 탈출을 선언했다. <크래쉬>의 폴 해기스가 이언 플레밍의 원작을 각색한 <카지노 로얄>의 극적 구성은 현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비전형적이다. 영화의 중반부는 액션이 거의 없는 갬블링 장면과 60년대 프랑스영화를 연상시키는 에바 그린과의 로맨스에 온전히 투자된다. 그를 통해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인간적인 내면을 스크린에 잡아채는 데 성공한다. 그런 것이 바로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원했던 것 아니었던가. 이로써 본드는 새롭게 ‘비긴즈’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1. <골드핑거> Goldfinger
1964년 감독 가이 해밀턴 출연 숀 코너리, 오너 블랙먼, 게르트 프뢰베
두말할 필요없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최고작은 <골드핑거>다. 가장 큰 이유는 <위기일발>에서 슬며시 드러나기 시작한 본드 시리즈의 관습들이 <골드핑거>에서 완벽하게 기틀을 잡고 있다는 거다. 어떤 기틀이냐고? 현실적인 스파이영화라기에는 조금 과도하게 치장된 플롯, 세계 정복이 아니라면 적어도 대륙 정복 정도는 바라는 배포 큰 악당(악당 오릭 골드핑거는 황금이 보관된 포트녹스에 원자 폭탄을 터뜨린 뒤 세계의 금시장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본드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던진 뒤 몸까지 던져대는 본드걸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영국식 유머를 잃지 않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 말이다. 가히 해밀턴 감독은 테렌스 영의 영화들이 지녔던 현실적인 스파이물의 정서를 조금 지우고 오락적인 본드 영화의 틀을 정비함으로써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현대 액션/어드벤쳐영화의 원형으로 재창조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임스 본드 영화를 참고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들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오락적인 흥취에서 <골드핑거>를 뛰어넘는 작품은 많다. 특히 이듬해 만들어진 <썬더볼>은 <골드핑거>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액션과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쾌작이다. 그러나 <골드핑거>에는 이미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이미지들의 향연이 존재한다. 엄청난 비밀 병기가 잔뜩 든 애쉬톤 마틴과 칼날이 달린 중절모를 무기로 날려대는 한국인 킬러 오드잡, 본드 영화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본드걸 중 한명인 악녀 푸시 갤로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몸이 황금으로 칠해진 채 살해당한 셜리 이튼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본드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골드핑거>가 개봉하기 한달 전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골드핑거>를 좋아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골드핑거>는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유들유들한 영국산 첩보원 사내에게 불멸의 영생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