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자들의 달콤쌉싸름한 이야기를 담은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이 스크린 버전으로 탄생했다. ‘앤티크’라는 이름의 케이크숍을 무대로 아기자기하게 얽힌 네 남자의 삶을 그려내는 이 만화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김태용 감독과 만들었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연출했던 민규동 감독의 섬세한 손길을 통해 좀더 다채로운 색깔과 진한 풍미, 그리고 생의 무게를 가진 영화로 변신했다. 만화 같은 시각표현과 신예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가 돋보이며 예상보다 강한 퀴어 코드를 가졌으면서도 날렵한 상업영화의 꼴을 갖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아울러 신선한 조각케이크 같은 영화의 파티셰 민규동 감독과 적절한 연기로 스크린에 데뷔한 주지훈의 인터뷰도 함께 싣는다.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민규동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말한다. 비단 케이크를 먹으면 화장실에 도로 쏟아버리는 진혁(주지훈)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란 삶의 미각에 묻은 씁쓸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거나 기억 한 자락에 자리한 떨떠름함을 덮기 위한 수단에 다름 아니다. 한국에서는 단순히 BL(일본에서 ‘소년애’라는 의미로 사용된 말로 ‘Boys Love’를 직역한 것)물로 분류되는 일본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의 <서양골동양과자점>의 핵심 또한 그런 이중성이다. 만화의 주요 골격과 여러 에피소드를 충실하게 끌어들인 영화 버전이 이러한 핵심을 담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규동 감독의 <앤티크>는 단순히 밝고 화려하고 달콤함으로만 그득한 꽃미남들의 연애담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쓰디쓴 삶의 그림자만을 버무린 괴이한 케이크 같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케이크나 쿠키를 만들 때 혀에서 느끼는 당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적은 양의 소금을 집어넣는 것처럼 <앤티크>는 크림과 설탕 외에도 여러 재료가 적절하게 배합된 영화다. 적정량의 소금뿐 아니라 알딸딸한 알코올, 시큼한 과일, 쌉쌀한 초콜릿 등이 잘 배합된 케이크처럼.
뽀사시한 로맨스에 범죄영화 요소까지
<앤티크>의 주인공은 단것을 싫어하면서도 작은 동네 골목에 고급 케이크숍 ‘앤티크’를 연 진혁이다. 케이크에 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그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천재 파티셰’를 기용하는데 그는 진혁과 악연을 지닌 선우(김재욱)다. 고등학생 시절 동급생인 진혁을 짝사랑했던 선우는 졸업식날 오래 간직해왔던 사랑을 고백했다가 진혁으로부터 “얼른 뒈져버려, 이 호모 새끼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당시 일을 마음속에 담아온 진혁과 달리 선우는 모욕스러웠던 사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어쩌면 선우가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치욕을 당한 그날부터 선우는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모든 게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성의 게이’로 변신했다. 여기에 천재 복서였다가 신체적 결함으로 권투를 포기하고 선우 아래서 파티셰가 되기로 한 기범(유아인)과 어릴 적부터 진혁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진혁을 ‘도련님’으로 모셨던 수영(최지호)이 합세하면서 네 남자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만화와 마찬가지로 <앤티크>가 가진 대부분의 매력 또한 이 네 남자의 뚜렷한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파티셰로서의 뛰어난 능력과 이성애자조차 빠지게 할 만한 섹시남 선우, 스승인 선우는 끔찍하게 모시지만 진혁에게는 버릇없이 구는 기범, 멀쩡한 외모를 가졌지만 나사 몇개가 빠진 듯 어수룩한 수영,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면서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을 가진 진혁까지 개성 강한 네 남자가 뒤얽히는 것만으로도 앤티크라는 소우주는 충만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소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캐릭터드라마 혹은 변종 로맨틱코미디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이 스크린용 장편영화는 심심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뽀사시한 네 남자의 이야기에 긴장을 부여하고 틀을 제공하는 건 진혁의 과거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부유한 집안의 고귀한 아들인 진혁이 ‘좀더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케이크숍 사장이 됐다고 믿기는 힘든 일. 현재진행형의 연쇄 유괴사건에 대한 뉴스와 진혁의 악몽을 통해 과거의 유괴사건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케이크숍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결국 <앤티크>는 변형된 로맨틱코미디와 범죄영화라는 장르 요소가 결합되면서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남성들의 애정행각 수위 세다 세~
<앤티크>가 설탕과 소금처럼 대조적인 이 두 가지 재료의 배합을 놓고 고민한 흔적은 역력하다. 민규동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애초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사람의 상처는 본질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상처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상처가 있다고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곪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때문에 진혁의 트라우마를 설명하고 표현하는 데 많은 장면을 할애했던 것. 그는 이들 장면을 판타지라는 은유를 통해 보여주려 했기 때문에 스케일은 적지 않았고, CG 또한 많이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제작사와 투자자의 입장은 달랐다. 이들은 공인된 스타 배우들을 기용해서 만드는 영화가 아닌 이상 적정한 제작비를 들여야 한다고 판단했고, 진혁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내용이 자칫 네 남자의 환한 이야기를 어둡게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결국 민규동 감독은 많은 장면을 찍지 못했고, 찍었던 장면 중에서도 일부는 들어내야 했다. 초반의 뮤지컬 장면이 돌출적으로 느껴진다거나 드라마의 두께가 다소 얇아 보이고 각 캐릭터들의 배경이 또렷하지 않은 듯한 점은 이런 사정에서 기인했다.
결국 감독의 야심찬 계획이 일부 들어간 버전은 DVD에서나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다행히도 그의 플랜을 100%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볼썽사납지는 않다. 감독이 꿈꿨던 장면들이 빠졌음에도 <앤티크>가 제공하는 시각적 즐거움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케이크의 요정으로 보이는 코러스 걸들이 등장하는 뮤지컬 장면이나 잡지 속 그림이 움직이는 장면, 인물이 분할 화면 사이를 뛰어넘는 장면, 물과 꽃으로 가득한 권투 링 등은 시각적 쾌감을 자아내게 한다. 진혁이 그림지도 위를 달리며 케이크을 배달하거나 간간이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과거 속 판타지까지 만화보다 더 만화적인 상상력의 영상은 보는 이를 빠져들게 만든다. 여러 장면을 엄청나게 빠르게 이어붙인 오프닝 크레딧신이 예감케 하듯, 속도감있는 드라마 또한 이 영화의 장점이다. 한 에피소드에서 다음 에피소드로, 어떤 인물의 감정에서 다른 인물의 행동으로, 훌쩍훌쩍 뛰어넘는 빠른 이야기 전개는 이 영화의 뽀송뽀송한 감성을 더욱 살려내는 데 공헌했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가 음지에서 양지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BL 또는 ‘야오이’ 문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이를 어느 정도 이용하려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꽃미남들의 애정행각은 만화의 기본 설정에서부터 유래되는 것이긴 하지만, 선우와 장 바티스트(앤디 질레)의 적나라한 노출과 노골적인 사랑의 행위는 이른바 ‘동인녀’(남성의 동성애를 그린 소설이나 만화를 좋아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들의 환호를 만들어내기 위한 의도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화적인 설정이라는 보호막이 존재하는 까닭에 사회적 여파야 적겠지만, <앤티크> 속 남성들의 애정행위는 그동안의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가장 수위가 높은 편이며 가장 아름답기도 하다.
케이크의 본질은 작은 위안일지도
흥행을 고민하는 영화사가 동인녀들의 대폭 지지를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민규동 감독은 “야오이 문화를 의식해 표현한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하긴 그에게는 야오이나 동성애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그는 단편영화 <허스토리>(1995)에서 여성들의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했고, 장편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에서도 사랑을 위해 세상과 싸우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에조차 천호진의 동성애 에피소드를 넣었을 정도니 그에게 이 세계란 새삼스럽게 느껴질 구석이 없다.
다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핵심이 “내가 창피해?”라는 효신(박예진)의 대사에 응축돼 있다면, <앤티크>의 세계는 진혁이 기범에게 선우가 게이라고 밝히자 기범이 “그게 뭐 어쨌다고”라고 말하는 장면처럼 ‘호모 섹슈얼리티가 뭐 별건가?’라는 전제 속에 구축돼 있다. 민규동 감독은 “소수자들에 대한 지지는 내게 앞으로도 변하기 어려운 지점 같으며, 여전히 싸워야 할 의미가 있는 한 동참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표현방식에서는 좀더 “뻔뻔해지고” “편안해진” 셈이며, 이는 과감한 노출로 드러났다.
<앤티크>는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영화지만 케이크의 존재 가치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마음의 그림자를 안은 네 남자가 케이크를 만들고 배우고 팔고 나르면서 새로운 삶을 즐겁게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케이크의 본질은 작은 위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규동 감독은 설탕과 소금을 적절히 배합한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작은 위안이라는 소박한 맛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