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은 <내 생애…>에도 잠깐 등장한다. 황정민이 분실됐던 엄정화의 가방을 뒤지는 과정에서 보이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의도된 장면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만화책을 소품으로 넣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하다가 이 만화를 선택했다. 엄정화가 동성애자인 남편 천호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만화를 본다는 맥락에서도 들어맞는 것 같았고 다음편을 예고하는 느낌도 약간 있었고. (웃음) 2002년 정도에 처음 읽고 2004년에 판권계약을 했는데, 당시가 <올드보이> 이후라 까다로운 상황이었지만 요시나가 후미 작가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보고 허락해줬다. 그분은 내용이 어떻게 바뀌어도 상관없으니 마음 편하게 만들라고 했다. 참 독특한 분이었다. 이렇게 모던한 이야기를 만든 분이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너무나도 아날로그적으로 살고 있더라.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만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닌데, <서양골동양과자점>은 깊이와 디테일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캐릭터로는 이 영화에서 선우에 해당하는 ‘마성의 게이’가 가장 관심을 끌었다. 진혁에 관한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나 자신도 무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인데 왜 잘 안 풀릴까 고민해왔는데 진혁이 어린 시절 유괴당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나도 6살 때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일 때문에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에서 뛰어내렸다니.
=관성의 법칙이 정말 적용되나 궁금해서 플랫폼에 도착하고 있는 기차에서 뛰어봤다. 나는 딱 설 줄 알았다. (웃음) 그런데 데굴데굴 굴렀다.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깨달았다. 책에 나온 게 맞구나. (웃음) 하여간 어떻게 하면 나의 트라우마가 풀릴까라는 질문이 주인공의 질문과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만화에서만 존재하는 캐릭터들이라 영화로 옮기는 데 고민도 됐을 듯하다.
=꽃미남 4명이 빵가게에 있다는 설정이 가짜 느낌이 나서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로 바꿀까 생각도 해봤다. 미남들이 아니라 보통 남자 4명이 모여서 평범한 가게를 운영하는데 그 과정에서 평범하지 않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보여줄까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케이크와 앤티크라는 모순적인 사물 안에서 인생을 은유하는 것처럼 외모는 굉장히 예쁘지만 내면에 신파적이고 예외적인 무언가를 갖고 있는 이중적인 인물들이 모이는 게 의미 면에서 좀더 조화롭겠다 싶었다.
-대개의 한국 감독들은 원작을 영화로 옮길 때 설정만 빌려오고 스스로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하는데, 이 경우는 원작에 충실한 편이더라.
=원작이 있는 영화를 처음 해서 그런지, 내가 만든 새로운 이야기가 원작의 틀 안에 자리잡는 게 어렵더라.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초반에는 그 지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면서 내가 원작에 반했던 지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그 지점을 충실하게 잡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작가를 만난 다음 그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그 작가의 시선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나와 주파수가 잘 맞더라.
-만화와 차별화하려는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
=하나는 표현 스타일에서 찾았고, 또 다른 하나는 해석에서 찾았다. 나는 ‘어떤 사람의 상처는 본질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상처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상처가 있다고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곪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새로 추가하고 재해석한 내용들이 많았다. 하지만 제작사와 투자자는 관점이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은 원작에 충실하기를 바랐던 것 같고, 러닝타임도 100분 정도로 맞춰주기를 원했다. 진혁이 과거 사귀었던 여자친구들과 관련된 장면이 8분 정도였는데 1분 정도로 축약한 것도, 애초 찍었던 엔딩장면을 잘라야 한 것도, 진혁의 가족 이야기를 없앤 것도 그 때문이다.
-표현 스타일은 어떻게 차별화하려 했나.
=욕심일 수도 있는데 케이크가 예쁘고 맛있다는 것을 드라마로 표현해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케이크로 압도되는 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뮤지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8개의 뮤지컬 장면을 구상했다가 마지막에는 3개의 시퀀스가 남았고, 편집 과정에서는 초반부의 한 장면만 남았다. 후반부에 탱고를 배경음악으로 한 비장한 뮤지컬 장면이 있었는데, 스케일도 크고 비주얼도 가장 강렬했지만 없애야 했다.
-비주얼이 굉장히 인상적인 영화다. 어떤 컨셉에서 출발했나.
=내 안에는 극단적인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하나는 꿈속처럼 기괴한 이미지다. 나는 평생 단 하루도 꿈을 안 꾼 적이 없는데 대개 초현실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악몽이다. 반면 표현이 아주 사실적이지 않으면 못 견디는 면도 있다. 이번에는 전자의 영역들을 압축적으로 표현해내는 이미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원래는 진혁이 생크림으로 된 바다에 빠지면 그 옆으로 여자친구들과 선우가 보트를 타고 지나간다거나 케이크 300개가 동시에 날아가는 장면들도 있었는데 여러 여건상 뺄 수밖에 없었다.
-캐스팅은 또 다른 관건이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스타를 기용할까 신인급을 기용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스타들은 이렇게 많은 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동성애 코드도 있어서 캐스팅이 어려웠다. 특히 나는 주지훈을 ‘마성의 게이’ 선우 역으로 고려했는데 본인이 시나리오를 읽고 진혁이란 인물이 자신의 삶을 담고 있다면서 너무 하고 싶어하더라. 결국 영화에선 신인인 주지훈을 주인공으로 삼게 되니까 나머지 인물도 신인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재욱이 들어왔는데, 시나리오에서 선우밖에 안 보였다고 하는 거다. 나는 배우가 스스로 하고 싶은 역할을 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때 기억 때문이다. 당시 박예진을 1인2역으로 쓰려다가 막판에 김민선을 캐스팅해서 효신 역할을 줬는데, 민아 역을 맡은 예진이도 민선이도 자기 캐릭터를 안 좋아하고 잘 맞지도 않더라. 그래서 엄청 욕을 먹으면서도 촬영 이틀 전에 둘의 역할을 맞바꿨다.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고 잘 맞더라.
-가장 부담스러운 건 아무래도 김재욱이었을 것 같다. 과감한 연기를 위해 감독이 설득이나 독려를 할 필요는 없었나.
=촬영 전 고사를 지낼 때 재욱이는 ‘한국의 모든 게이들이 자신에게 흠뻑 반하게 만들고 싶다’고 당차게 포부를 말하더라. (웃음) 나 또한 ‘어중한간 건 싫다’면서 처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 앤디 질레와 처음 키스하는 순간에는 스스로도 움찔하더라. 하지만 금세 익숙해지더라.
-단편영화 <허스토리>와 첫 장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물론이고 <내 생애…>에서도 천호진의 동성애 에피소드를 등장시켰다. 그때마다 동성애에 대한 표현방식과 초점은 조금씩 바뀌어왔는데 이번에는 애정표현이 적나라한 대신 동성애가 일상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보여지길 원했다. 영화의 모든 인물들이 뻔뻔하고 자기 욕구에 아주 충실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그 뻔뻔함이 너무 유머스럽고 귀여워서 나중엔 옆에 동성애자 친구가 있어도 어깨를 두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호모 섹슈얼리티라는 소재를 여러 번 얘기하고 있는데 조금 더 성숙된 시선으로 다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도 훨씬 높은 수위의 육체적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와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왜 그런 주제에 매혹되는 걸까.
=그런 주제에, 만! 매혹되는 건 아니다. 도리어 나의 질문은 이거다. 결국 왜 이런 주제의 영화만 투자되고 만들어지게 될까. (웃음) 투자자들은 왜 내가 쓴 다른 멜로드라마나 다른 상업영화는 밀어주지 않고, 그토록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면서도 동생애를 주제로 하는 영화에만 투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웃음)
-동성애를 꾸준히 그려온 데는 지지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젊었을 때 정말 많이 싸우며 살아왔는데 그런 작은 싸움의 연장 같다. 사람들이 자기 욕구를 유예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 응원, 이런 마음이 호모 섹슈얼리티라는 텍스트를 발견할 때 거대한 분출구를 만난 듯 치고 나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