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50년 [3]
2001-11-16
사진 : 정진환
정리 : 최수임
신상옥 감독 인터뷰

“남한에서 영화 못 찍게 했으면 내 발로 북한 갔을 거야”

지난 11월5일, 안정숙 <씨네21> 편집장과 영화평론가 김소희씨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앞서 신상옥 감독을 만났다. 1949년 데뷔작 <악야>로 시작해 국내 유일의 메이저영화사 신필림을 거쳐 검열로 고통받고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거장에게, 잊혀진 반세기 한국영화사의 진상을 들어본다. 편집자

-회고록 집필은 마치셨는지요. 언제 출간하십니까.

=직접 쓰다보니 자화자찬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아서 쓰기 싫어졌어. 다른 사람에게 집필을 의뢰했는데 내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릴 무렵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부산영화제에서도 회고전이 드디어 열리게 되었네요.

=부산영화제쪽에 ‘김정일이 와도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야. 그동안 회고전을 하면 밤낮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만 틀거든. 내가 60년대에 영화 만들고 끝난 사람도 아닌데 그 시절의 한두편만 대표작이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싫어. 이번에도 이북에서 만든 것까지 포함시킨다면 하겠다고 말했지. 우여곡절 끝에 <소금>과 <탈출기>가 동시에 상영돼. <탈출기>는 내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고 있어요. 거기서 2년 반 동안 7편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제일 낫고 사회성도 짙은 작품이야. 최서해의 단편 <탈출기>가 원작이지. 단편소설 가운데 최서해의 것이 영화로 만들기에 제일 쉬웠어. 같은 시기에 나온 강경애의 <인간문제>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 북한에 머무는 동안 이런 유의 사회성에 좀더 친밀해졌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고. <소금>은 공산당이 세상에서 제일 몹쓸 짓을 한다고 여기던 한 여성이 아들을 통해서 ‘그리 몹쓸 것만은 아니로구나’ 생각하는 내용이야.

-그래도 감독님의 50∼60년대 작품들은 그때야말로 진정한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충격을 줍니다.

=어떤 것들이 그런가.

-개인적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가장 좋아하고, 그외에도 <지옥화>(1958) <성춘향>(1961) <로맨스 빠빠>(1960) <이조여인잔혹사>(1969) 같은 작품들도 그렇습니다.

=남한에서 만든 것 중에 제일 좋은 작품은 <상록수>(1961)야. 수법이나 내용, 사회성 면에서 두루 그렇지. 경제적으로 유복해지면 사회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성춘향>이 성공했기 때문에 <상록수>는 돈 생각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만들었거든. <쌀>(1963)도 비슷하지. 박정희 편들어 준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리 생각했어. 뒤에 보니 잘못됐지만. <천년호>(1969)는 그땐 별거 아니었는데 요즘 사람들이나 밖에서들 많이 좋아하더구만. 시체스에서 상도 받고.

-김기영 감독님이 같은 시기에 <고려장>을 통해서 5·16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과는 대조가 되는데요.

=과도한 의미 부여 아닐까. 기영이의 실제 의도는 흥행성이었을 거야. 내가 박정희를 좋아했던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양반이 <상록수>를 보고 울었다고 하더구만. 그건 5·16 이전이야. ‘시골 사람이 대통령 해서 그런가’ 생각했지. 또 한 가지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가 한-일회담 반대하던 시기에 나온 영화라서 하마터면 영화를 못 틀 뻔했어. 내가 청와대 드나들 때라서 사정 이야기했더니 박정희가 “그럴수록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상영이 가능해졌어. 요즘 명성왕후 이야기 많이 하는데 뮤지컬 <명성왕후>는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는 국수주의 때문에 얼굴이 뜨겁더구만. 당시 국제정세가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창피한 이야기다. 미화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국수주의로 가는 건 잘못이지. TV <명성왕후>는 의상 고증, 세트, 연출 면에서 여태껏 나온 사극 중 제일 좋아. 그래도 TV는 좀 처지지.

-감독님 스스로 회고전을 기획하신다면 어떤 작품들을 고르시겠습니까.

=내 작품 중에 열댓개밖에 쓸 게 없어. 특출한 것도 없고. 1949년부터 51년간 영화를 했는데 이북에 잡혀가고 왔다갔다 하느라 20년을 버렸으니 30년 일한 셈이지.

데뷔, 그리고 60년대

-1949년에 영화계 입문하신 건가요.

=<악야>를 만든 해지. 1946년 말에 최인규 감독 밑으로 들어왔고.

-1960년을 전후한 시기와 요즘은 둘 다 한국영화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시기를 비교하신다면 어떻습니까.

=별로 다르지 않아요. <성춘향> 때 40만명이 들었는데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면 요즘의 흥행작과 비슷한 수치라고 봐야 할 거야. 근데 요즘 영화들은 곁말(욕설) 빼면 싱거워.

-미학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당시에는 감독님을 비롯해서,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감독님 등 자기 세계를 가진 거장들이 잇따라 나온 시기인데요.

=과거는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아닐까. 그 당시는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자신을 찾을 때였지. 해방 뒤에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서 작가랍시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타난 때니까.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요즘이 낫다고 해야겠지. 카메라도 아주 좋고. <사의 찬미>도 찍은 사람은 옛날 사람이 찍었는데, 이성춘의 카메라가 좋았어. 건방진 얘기지만, 난 한컷만 보면 그 영화가 어떤 영환지 알아요.

-그때, 사실은 내가 봉우리에 올라서 있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 작품은 안 본 거 아닌가요.

=예술입네 하는 작품은 난 잘 안 봐. 누구라고 얘긴 안 하겠지만. 예를 들어서 내가 아직까지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신상옥입니다, 하면 좋겠나?

-돌아가신 안병섭씨가 평 쓴 거 보셨나요? 당시엔 여기 있는 김소희씨보다도 젊은 사람이었는데.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원전에서 그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신 감독의 <성춘향>은 반상의 차별 철폐를 암시하는 등 시대가 뭘 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영화라 했었죠.

=뭐, 그런 어려운 얘기를. (웃음) 평이야 평단이 만들어내는 거니까, 뭐라고 얘기하든 강요는 안 하겠는데. 어쨌든 한국적 해학은 담으려고 했지. 그게 민심이니까.

-<성춘향>은 오프닝부터 홍 감독님 <춘향전>하고 다르던데요.

=그건 불성실이야. 문제는 불성실이라구. 홍성기는 공부를 안 해서 흥행에 실패한 거야. 그저 옷이 화려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한 거지. 그쪽은 돈도 많이 있었고. 극장도 최고 극장인 국제극장이 잡혀 있었지. <성춘향>이 나오게 된 계기가, 한국 사람들이 설화 듣듯 알기 쉽게 각색하자는 거였거든. 그렇다고 나 혼자 우수해서가 아니었어. 렌즈가 독일 거였고 현상도 일본에서 했고 배우 앙상블이 좋았고. 거기에 내 연출이 아주 기본적인 거 무시하지 않고 찍은 점도 있지만 자기 혼자 힘으로 한다고 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돼.

-정말 의상은 <성춘향>이 훨씬 떨어지더라구요. (웃음) <춘향전>은 모두 비단옷을 입었고 <성춘향>에서는 나일론 치마를 입었던데요.

=아직도 안 잊혀지는 것은, 춘향이가 사또한테 불려갔을 때, 두꺼운 면으로 된 옷에 분홍 깃 달린 걸 입게 했거든. 소박하면서도 예쁜 옷이었지. 예쁘지 않게 입었는데도 은근히 예뻐보이는 그런 옷이야, 그게. 최 여사가 그런 면으론 아이디어가 많아. <민비> 때도, 내가 민비한테 금색 옷에 검은색을 받쳐 입게 했지.

-춘향이 캐릭터도 참 인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일심’자를 쓰고 붓을 툭 던져버리고, 또 가야금을 치다가 줄을 끊는 장면 같은 것은 원래 판소리 대본에 있는 에피소드인가요.

=그런 게 어디 있었을라고. 일심 쓰는 건 있지만 붓 던지는 건 원래는 없었어. 그보다도 내가 제일 크게 생각하는 수확은 고무신 에피소드인데, 원전 춘향전의 맹점이 뭐냐면, 춘향이랑 이도령이 한번도 만나지 않고 좋아하는 거야. 고전은 원래 그래. 근데 가까이 안 보고 예쁜지 안 예쁜지 어떻게 아나. 그걸 해결한 게 <성춘향>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지. <성춘향>에선 신발 벗은 거 찾아오라 그래서 춘향이 얼굴을 보잖아.

최은희와 신상옥

-최은희 선생님의 영화들을 보면 이제는 더이상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 어떤 자태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만들고 동남아를 돈 적이 있어. 근데 동양 천지에 유교적인 미덕 가진 나라 한국밖에 없더라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두 사람이 나중에 다시 만날지, 늘 궁금했어요. 전 만난다는 쪽으로 걸겠습니다. (웃음) 후반부로 가면 욕망을 담은 어머니의 시선이 카메라에 종종 클로즈업되거든요.

=퀘스천을 둔 거야. 원작은 옥희가, 아저씨가 간 다음에는 어머니가 계란을 안 싼다는 불만을 얘기하는 걸로 끝나는데, 유치하잖아? 난 그냥 퀘스천을 뒀어. 최 여사가 피아노 치는 장면 있잖소? 원작에는 피아노가 아니라 오르간이었어. 오르간 좋지, 그런데 처지더라구. <쇼팽의 즉흥곡>인데 그걸 최 여사가 어떻게 쳐? 최 여사야 바이엘까지는 쳤지만(웃음) 한달간 죽을 고생을 했지. 그래도 어째, 한컷은 보여줘야겠는데.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몰라.

-요즘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어린이가 구조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없는 것 같아요.

=첫째로, 절대로 주인공 두 사람을 얘길 안 시켰어. 그랬더니 다 찍었는데 극장 상영할 길이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여러 가지를 더 찍었지. 김희갑씨가 시계 빌리러 가는 거라든지, 밥값 안 내면 쫓겨난다고 오고가는 것, 시어머니가 며느리더러 시집가라고 하는 것, 허장강이 점치는 얘기, 새로 찍은 게 한 대여섯개 돼. 아무튼 끝까지 얘기 안 시키는 게 힘들었다.

-또 좋았던 건 미조구치 겐지 영화가 일본의 공간을 아름답고 특색있게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적 공간이 보여지는 거였는데요.

=수원이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지. 옛날 공간이니까 좋아보이기도 하겠지.

-공간 연구를 많이 하시는 편이었는지요.

=그야 내가 미술했으니까 그렇지. 난 대체로 사극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 영향도 있겠지. 이북에서 김정일이 나보고 제일 민족적인 작가라고도 하잖아.

인터뷰 안정숙·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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