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50년 [4]
2001-11-16
사진 : 정진환
정리 : 최수임

장르의 섭렵

-<악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옥화>와 유사한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사회물이지. 일제시대에는 <임자없는 나룻배> 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해방 뒤 작품으로는 처음이었을 거야. 원작은 이런 거야. 어떤 작가가 술먹고 가다가 지프차에 치었는데, 자기가 과외하던 여학생이 나중에 보니 양갈보고. <백민>이라는 소설잡지가 해방 뒤에 있었어. 33인의 신예작가들 단편모음이 거기서 나왔는데, 거기 실려 있었거든. 줄거리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그때 사회상을 다 집어넣었지. 타협을 안 했어. 오히려 <지옥화>에선 타협을 했지만. 오락성을 겸하고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악야>는 최 여사(영화배우 겸 부인 최은희 여사 지칭) 만나기 전인데, 나중에 들어보니 최 여사는 <악야>를 보고 혹평했다더구만. 35mm 아니면 영화가 아닌 줄 알던 때인데다 <새로운 맹서> <마음의 고향> 이후에 콧대가 높아진 최 여사가 보기에 이제 막 데뷔한 무명감독이 뭐 눈에 차기나 했겠어? 이 참에 해둘 말이 있는데, 과거 작품들에 대해서 거짓말들을 많이 하더구만. 보지도 않고 줄거리를 쓰기도 하고. <열녀문>의 경우에 평자들은 유교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소재에 불과하고 내 입장은 도리어 유교 찬미야. 인간 해방, 여성 해방의 기조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60년대 잡지에 실린 감독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봤습니다. 이 세상 여성들 중에 한국 여인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여인들을 사랑하시다 보니까 그들을 괴롭히는 제도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도 동시에 묻어났던 것 아닐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이조여인잔혹사>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보면, 마지막에 여자 꼬마아이가 엉터리 열녀문을 째려보는 장면이 있죠.

=그 영화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마다 색깔이 달라. 여하간에 나는 인내의 미덕이라는 게 좋다고 생각해.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여자들이 떼를 지어 강간했던 남자를 죽이는데, 요즘 어떤 사극도 그렇게 여성들의 발칙한 도발을 보여주진 못합니다.

=그 영화가 국제사회에서 평가받기에 결점이 있다면, 일본의 <무사도 잔혹이야기>에 비해 한발 늦게 나왔다는 거야. 국제무대에선 아무리 좋아도 독창성이 없으면 좋은 얘기 안 하니까.

-<지옥화>는 그때 사회상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으면서 장르적인 숙련성이 초기작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대단한 영화라고 봅니다.

=<지옥화>를 50년 만에 독일에서 처음 봤는데 나도 좀 놀랐다. 되게 열심히 찍었더라고. 그거 찍을 때 카메라가 잘 안 돌아가니까 연필로 돌리면서 찍었는데. 반짝반짝 신호하는 것도 조명 없으니까 미러로 하고. 근데 프린트가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원판 없어져서 듀프에서 딴 거라 그래.

-그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연출 수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욕심이지. 죽기 전에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만 실제와 공부는 달라. 소질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난 천재가 아니야, 무척 노력을 하는 타입이지. 최 여사가 질렸다구, 그런 거에. 최 여사는 책도 한번 정독하면 다시 안 보거든. 난 오래 보진 않지만 20∼30번은 반복해서 봐.

-고 이영일 선생님은 신 감독님이 워낙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한에서 영화 못 찍게 했으면 제발로 북한 갔을 사람이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갔겠지. 동구라파만 됐어도 안 올 거였어. 우상숭배만 없었으면. 사회주의라는 것이 당시 우리의 이상이었으니까. 근데 거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야. 나야 1년에 300만달러씩 쓰고 잘살았지만.

3인의 영화스승

-연출 수업 할 때 외국영화를 많이 보셨나요.

=프레드 진네만, 윌리엄 와일러 걸 많이 봤지. 중학교 때는 구라파영화들 볼 수 있는 건 다 봤어. 내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채플린하고 나운규. 두 사람을 스승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아. 내가 태어난 해가 나운규 <아리랑>이 나온 해거든. 어떻게 <아리랑>을 보느냐고? 우리 집 앞에 신발 벗고 들어가는 극장이 있었거든. 거기서 채플린의 <모던타임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니 하는 걸 다 봤어. 내 영화 <벙어리 삼룡이>에 나오는 손장면은 나운규 영화에서 따온 거야. 나운규 영화는 불나는 장면을 필름에 착색한 거였어. 나운규 정신이랄까, 그런 작가정신이 나한테 상당히 영향을 줬지. 또 그 당시엔 채플린 영화인지 뭔지 모르고 봤는데, 이게 <골드러쉬>고, 이게 <모던타임스>고, 나중에 다 알았지. <모던타임스>에서 물에 들어갔는데 물이 여기까지밖에 안 오는 거나 깃발 들고 가다가 시위대 만나고 그런 거를 그땐 그냥 웃으며 봤는데, 다 사회성 있는 거더라고. (웃음) 그리피스도 봤고, 기술적인 면으로는 최인규 감독한테 많이 배웠지. 기술적인 면을 해결한 감독이야.

-나운규 감독이나 최인규 감독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저 전설처럼 들리는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로 잘 만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잠시 생각) 말할 수 있어요. 다만 최인규 감독은 테크니션이야. 그 사람은 시나리오가 좋으면 틀림없이 좋은 거 만드는 사람이야, 테크니션으로는 확실하지. 한형모 감독 <자유부인>도 봐봐, 테크닉 확실하잖아. 근데 원작이 나쁘면 죽을 쑤니까, 좋은 거 만들다가도 죽을 쑤고 그랬지. 좋은 책 주면 좋은 영화 나오고 나쁜 책 주면 나쁜 영화 나오지. <집없는 천사>는 일본에 프린트가 몇개 남아 있을걸?

-얼마 전에 TV에서 <무숙자>(1968)를 보았는데, 서부극 장르를 한국에 토착화시키려면 어떤 변형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실험한 영화라 흥미로웠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가족 멜로드라마로 접근하던데요.

=그렇지. 근데 그거 평야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찍은 거요. 안양촬영소가 있으니까 가능했지. 말 달리는 장면에서 자막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사라진 상태라 답답하더구만. <연산군>도 그래. 그 영화에서 처음으로 데이 포 나잇을 시도했는데 노출을 투 스텝 낮추고 역광으로 찍어야 하거든. 근데 요새는 전부 낮 신으로 방영해버리더구만. <무숙자>에서도 밤 신이 다 하얗게 나와. 증인이 없으니까 아무도 몰라서 그렇게 된 거야.

-요즈음 들어서야 본격적인 액션영화가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하나씩하나씩 장르를 넓혀가는 시기라고나 할까요. 60년대에 감독님이 그토록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뭘까요.

=첫째는 예술가로서의 얄팍한 야심이고, 둘째는 블록 부킹 때문이야. 영화법상 회사를 유지하려면 한달에 두편씩 일년에 스물여덟편을 찍어야 하는데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먹고살려고 한 거지, 다. 세 번째라면 내 딴에는 테크닉이 확실하다, 뭐든지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하는 동안에는 열심히 했어. 뭐든지. 자본주의에는 스타시스템이란 게 있는 것처럼, 내 영화가 히트하니까 배급업자들이 자꾸 내거만 가져가려고 했어. 내 회사를 가지고 마음대로 했으니 좋았겠다고 하는데, 아니야. 내가 연출에 나서는 건 늘 회사 부도 막느라고 목까지 차올라서 힘들 때 했지. <빨간 마후라>도 아주 힘들게 만든 영화야.

박정희와 반공법

-신필림의 위력에서 최은희 선생님을 비롯한 스타시스템의 위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요.

=다른 데서도 많이 했어. 그렇지만 많은 중요한 배우들이 전속이었지. 한꺼번에 네 작품씩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스타성 말씀을 하셨는데, 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 가운데 누가 더 인기 요인이었을까요. 최 선생님이 출연하는 거와 신 감독님이 연출하는 거와 어떤 게 더 스타성이 있었을까요.

=(잠시 망설임) 모르지. 여자들이야 최 여사 나오는 걸 더 좋아했겠지. 현모양처로 나왔으니까. 현실은 현모악처지만. (웃음)

-옛날 잡지 기사를 보니까 최 선생님이 신 감독님의 창작적 동반자로 신필림의 많은 연출 아이디어 가운데 상당부분이 최 선생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비주얼에 강하고, 최 여사는 연극을 해서 드라마에 강한 건 있었지. 그래서 내가 드라마 공부한 감독들 많이 기용했다고. 근데 비주얼도 중요하지. 연기자한테 연출시키면 감정선만 따라가고, 시나리오 작가한테 시키면 책 쓰듯이 찍고 그런다고. 지금 TV <명성황후> 잘 찍긴 하는데, 그 사람 보고 영화하라면 힘들 거야. 늘어놓기만 해서. 압축을 해야 하거든.

-<연산군> 프린트는 왜 없애라구 하신 건가요.

=저예산으로 엉터리로 찍었으니까. 지금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연산군>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면, 전편 찍고나서 후편을 한달반 사이에 찍었거든. 각본도 없어서, 내일 뭘 찍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밤늦게 시나리오 내일치가 나오면 복사기도 없어서 먹지대고 다 써가지고, 아침 6시 되면 나오는 사람들한테 그거 주고. 소도구와 의상은 아예 비원에 맡겨놨어. 그래서 한 얘기 또 하고 그런 게 많고, 템포니 뭐니 다 처져. 이북에서 내가 감옥에서 죽겠다 싶을 때, 이럴 바에 없애고 싶은 거나 없애고 죽자 해서 편지에 그거 태우라고 썼지. 근데 프랑스 놈들은 그게 또 제일 좋다고 하니.

-박정희 대통령 좋아하신 것 때문에 박 정권이 만들어낸 영화법도 주도적으로 만드셨을 거라는 평판이 있습니다.

=빈농의 아들이니까 그런 면에서 긍정적으로 봤지. 공무원들 복지부동하는 것만 보다가 박정희를 보고는 최소한 필요악은 된다고 생각했지. 그때 시대론 그랬던 건데. 박정희 두둔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니까. 영화법이란 건 나는 잘 모르고, 내가 커지니까 내가 관여했냐고 그러는데, 그건 아니다.

-신필림을 할리우드의 메이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영화산업에서 전무후무한 사례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살아서 영화에 대해 이해가 있는 편이었다구. 이 대통령이 안양촬영소 상량식할 때 나와서 ‘영화인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축사한 게 있지. 근데 잘못한 게, 시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시설은 만들었는데 머리는 따라오지 못했지. 결국 산업은행으로 넘어갔어. 나중엔 풀이 우거지고 소가 왔다갔다 하는 지경이었으니까. 기계란 기계는 다 도둑질당하구. 근데 내가 신필림을 세울 때 콜럼비아를 따서 만들었거든. 그래서 안양촬영소를 인수했지. 스튜디오가 400평짜리, 200평짜리가 있었고 현상소도 있었고, 녹음기도 제일 좋은 거로 들여놓았지. 지금 양수리 종합촬영소 가보면 꼭 텔레비전 촬영소 같아. 물건 갖다놓을 데도 없고, 오픈 세트는 산중에 있어서 산불위험도 있어. 안양촬영소 인수한 거는 은행에서 빌려서 시작한 거였는데 나중에는 지탱할 수가 없었어.

-결정적으로 힘들어진 이유는 뭐였나요.

=검열 때문이야. 미칠 지경이었지. 정치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미풍양속이란 것 때문에. 키스나 정사장면도 외국사람들 건 그냥 들어오는데 우리 영화는 그게 절대 안 되고. 전기료만 그때 돈으로 400만원이 기본요금이었는데,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 영화법도 피해를 줬어. 제작쿼터를 1년에 4개씩 줬는데 그걸로는 못 먹고 살았지. 200평짜리 스튜디오가 있으면 영화사 등록을 할 수 있었거든. 우리는 600평을 가지고 있으니까 영화사를 3개 만들어서 제작쿼터를 더 땄다구. 그때 정치적으로 내가 움직였으면 훨씬 발전했을지 모르지. 정주영도 완전히 국가차관으로 한 거였으니까.

-반공법에 한번 걸린 적도 있으시죠.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을 했었거든, 내가. <민비>가 작품상을 땄을 때야. 그 영화제 출품작 중에 <일본 도둑이야기>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공산당이란 건 알았는데, 상영했지. 그게 반공법에 걸린 거야. 그래서 공안부 끌려가서 한바탕했지. <내시> 가지고도 유죄판결 받았잖아. 음란죄라고. 많은 대중 앞에서 음란행위했다는 건데, 거기서 말하는 대중이라는 게 스탭들이거든. 근데 윤정희라는 애가 어디 벗을 애야? 브래지어도 하고 핫팬츠도 입었는데, 음란에 걸렸지. 관례에 따라서.

인터뷰 안정숙·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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