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50년 [2]
2001-11-16
글 : 이영진

기업형 영화사 제1호 신필림 흥망사

1960년대 충무로의 패왕으로 군림했던 신필림의 등장은 한국영화 중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로맨스 빠빠>(1960)는 그 서곡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엄앵란 등 당시 내로라 하는 스타들을 총동원,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필림의 전신이랄 수 있는 ‘신상옥 푸로덕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신상옥 감독은 1952년 <악야>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작사를 차린 뒤, 1급 배우 최은희와 함께 15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해 제작자로서의 능력은 검증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맨스 빠빠>가 제작자 신상옥의 이름을 부각시켰다면, 1961년 <성춘향>은 신필림이 메이저 제작사로 발돋움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그해 1월28일 개봉, 서울에서만 4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탄탄한 제작사로서의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됐기 때문. 같은 해 9월, 일정 요건(제작편수가 15편 이상)을 갖춘 이에게만 제작사 등록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교부의 고시 또한 왕국 신필림의 건설을 도왔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제작사의 기업화를 영화정책의 모토로 삼고서 소수의 제작사에만 외화수입과 제작권을 내줬고, 그 결과 난립하던 65개의 영화사는 16개로 축소, 통합됐다. 그 과정에서 신필림은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15편을 앞세워, 단일 제작사로서는 유일하게 등록을 마친다.

‘주식회사 신필림’으로 명패를 바꿔 단 이때부터 1969년까지가 신상옥 왕국의 전성기다. 이 시기 신필림의 위용은 소유하고 있던 원효로 촬영소의 규모와 제작시스템만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월간 <영화잡지>(1964년 1월호)에 따르면, 당시 용산구 문배동에 위치한 1천평 규모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8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 등을 갖추고 있었고, 부설 연기자 양성기관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다.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의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 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 주로 활동했던 영화배우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기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전속 작가, 감독, 촬영기사, 녹음기사까지 모두 갖춘 거대 스튜디오 신필림의 당시 제작편수 또한 놀랍다. 1961년부터 70년까지 신필림이 쏟아낸 작품의 수는 무려 102편. 휘하에 두고 있던 안양필름과 신아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150편이 넘는다. 하지만 거대 왕국의 몰락은 정점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됐다. 1966년과 67년, 신필림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와의 합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나서지만,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이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재정적 위기에 처한다.

특히 1966년 영화인들이 영화법 폐기 건의문을 제출하는 등 반발이 심해지자 정부는 영화제작업자 등록제의 내용을 대폭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동안 영화법을 방패막으로 삼았던 신필림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1965년까지만 해도 <연산군>을 비롯 일련의 흥행작들을 내놓았지만, 이후 과도한 제작편수에 따른 태작들을 양산한 결과, 흥행 성적마저 변변치 않은 신필림으로서는 자구책 마련 역시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신필림은 1970년 회사 규모를 줄인 뒤 안양영화주식회사, 1973년 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개명하면서 연명하지만, 전성기로의 회귀나 부활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욱이 종국은 누구도 예상 못한 비극이었다. 1975년 11월28일, 신필림은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과정에서 삭제한 키스장면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는 수모까지 당하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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