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르네 랄루 감독이 1980년대 말에 애니메이션영화가 괴멸 직전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실상 단편이라기보다 장편애니메이션의 위기를 더 가리켰다. 그는 당시 자신의 세 번째 장편 <간다라>(1987)를 만들기 위해 6개월을 평양에서 보내야 했는데, 애니메이션 영화를 더이상 프랑스 국내에서 만들 수 없게 된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현실은 비단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도쿄와 할리우드의 많은 고용 감독들에게는 그들의 작품이 어디에서 그려지는가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겠지만, 장편애니메이션을 둘러싼 경제 상황은 유럽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아우성이 나올 정도로 좋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버블 경기의 호황 속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수많은 장편애니메이션들은, 유럽과 달리 국경 바로 바깥의 인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자국 내에서 하청 구조를 통해 이루어진 노동력 착취의 결과였다.
유럽·아시아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현재 이러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고 해도, 최근에 디지털 기술이 장편애니메이션의 세계지도를 새로 그리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르네상스>(2006), <아주르와 아스마르>(2006), <페르세폴리스>(2007)와 같은 몇편의 유럽 작품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다. 대서양 양쪽에서 오랫동안 주로 디즈니의 해외시장이 되기만 하고 이른바 ‘개발국’이라는 지위에 비하면 의외로 장편애니메이션의 문화적 성과가 미미했던 캐나다·스페인·벨기에·독일·스웨덴·핀란드 등의 나라들이, 뒤늦은 감은 들지라도 디지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자국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장편애니메이션들을 요즘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내놓는 중이다. 더불어 이란·인도·싱가포르·타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 아시아 나라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목격된다. 그중에서 이란은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페르시아 문화권을 염두에 두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인도의 신작 <로드사이드 로미오>는 디즈니와의 합작과 배급 계약으로 발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세계화를 노릴 정도다.
새로운 지도는 국가적 레벨에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비밀결사, 매의 발톱단>(2007·2008), 미국의 <우리, 스트레인저>(2007), 캐나다의 <미누시>(2007) 같은 영화들이 1인 제작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 대중의 지지를 모은다. 이스라엘의 아리 폴만이 감독한 <바시르와 왈츠를>(2008)은 이러한 최근의 동향 속에서 성취된 사례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의 장편애니메이션 역사는 첫 작품이었던 <꿈꾸는 요셉>(1961) 이후 별다른 기록을 갖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2008년에는 이스라엘·호주 합작으로 타티아 로젠탈 감독의 장편 인형 애니메이션 <$9.99>가 발표되었다.
시네아스트에게 ‘붓’을 선물하다
디지털 기술이 전통적인 프레임 단위 촬영을 대단히 신속하고 유연한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인형애니메이션의 확대에 기여하는 한편, 20세기 라이브액션 영화에서 ‘광학식 자동 카메라’가 그랬듯이 애니메이션영화에서 일종의 슈퍼장르(미디어학자 레프 마노비치가 지적한 바와 동일한 의미에서)를 형성하는 것은 단연 3D CGI 기술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바로 그 3D CGI 기술과 이보다 한층 더 대중적인 플래시애니메이션의 보급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주로 라이브액션 영상에 기초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폴만 감독이 단숨에 장편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어냈던 것도 그러므로 특별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의 CGI 기술이 모든 성질의 영상을 디지털 신호로 변환, 처리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영화는 감독에게 ‘라이브액션 영상’으로부터 ‘애니메이션 영상’으로의 ‘이동’이라기보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확장’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른바 사진적인 지표성에 지배되는 라이브액션 영화(흔히 한국사회에서 영화라고 줄여 일컫는)를 오랫동안 지지해오던 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노비치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오늘날 애니메이션 영상은 라이브액션 영상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카메라가 펜이었다면, 디지털 기술은 시네아스트에게 ‘붓’을 선물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확장을 이야기할 때, 2004년 폴만의 TV다큐멘터리 시리즈 <사랑의 재료>를 위해 3편의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이미 함께 작업해온 요니 굿맨, 그리고 2007년 칸의 황금카메라 수상작인 에트가 케렛과 쉬라 게펜 감독의 <젤리피쉬>에서 물밑 시퀀스를 합성한 로이 니찬처럼 현장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의 예술적 공헌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술을 넘어 문화와 스타일의 문제
다큐멘터리로서의 애니메이션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90여분 길이의 라이브액션 비디오 촬영장면을 토대로 그래픽 이미지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로토스코프’라 일컬어질 만한 영상 감각을 제공한다(특히 전형적인 인터뷰 시퀀스에서). 라이브액션 영상을 재료로 삼아 그래픽하게 가공하는 본격적인 차원의 디지털 로토스코프 영상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밥 새비스턴과 손잡고 만든 <웨이킹 라이프>(2001)와 <스캐너 다클리>(2006)라는 장편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새비스턴이 개발한 그래픽 편집 소프트웨어인 로토숍(Rotoshop)은 그러나 시판되는 상품이 아니기에 그것의 경이로운 영상을 접할 기회는 아직 제한적이다. 새비스턴은 라스 폰 프리에와 요르겐 레스 감독의 <다섯개의 장애물>(2003) 중 짧은 영상을 비롯해 <스낵과 음료수>(1999), <그래서하퍼>(2004) 같은 단편들을 로토숍으로 만들었는데 흥미롭게도 그것들은 모두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디지털은 애니메이션과 라이브액션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거리마저 점점 좁혀 가고 있다. 더불어 애니메이터가 독서실 같은 분위기의 드로잉 데스크 앞에 붙들려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도 애니메이션 독서실들이 여전히(혹은 더욱 심화된 양상으로) 도처에 건재하며, 3D CGI 기술은 마치 20세기의 모던한 국제주의 양식 빌딩들이 그랬던 것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애니메이션 영상의 범람도 가져왔다. 그래서 10여년 전의 <토이 스토리>가 아무리 변함없이 즐거운 작품이라 해도 흔히 3차원적인 빛의 차가운 입체감과 컴퓨터가 손쉽게 만들어낸 기계적인 동작은 현재 더이상 경탄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콘크리트의 유연성을 예찬하듯 CGI 기술도 유연하게 대처해왔고, 요컨대 NPR(non-photorealistic rendering, 수묵화·수채화 등 한국적인 화풍을 표현하기 위해 국내에서 개발한 3D 컴퓨터 그래픽 기술-편집자)기술이 대두하면서 디지털 시대의 애니메이션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닌 문화와 스타일의 문제임이 분명해졌다. 2004년, 박세종 감독의 <버스데이 보이>가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며 국회까지 떠들썩거렸을 때, 정작 오스카를 거머쥔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CG 소프트웨어를 돈받고 ‘학대’해온 크리스 랜드레스 감독의 심리-리얼리즘적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인 <라이언>이었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러므로 세계 애니메이션, 아니 동시대 영상의 어떤 경향을 읽을 수 있는, 다시 찾아와준 찬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