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무술영화열전] 한국액션영화의 다섯 남자들
2008-12-23
글 : 주성철

(1) 합기도의 달인, 황인식

홍콩으로 건너간 한국 액션배우 중 최고의 카리스마는 역시 합기도의 달인 황인식이다. <맹룡과강>(1972)에 하얀 도복을 차려 입은 일본인 무술가로 나와 이소룡과 일대일 대결을 펼쳤고, 성룡의 <사제출마>(1980)와 <용소야>(1982)에서는 상대 주인공 악역으로 출연해 특유의 관절꺾기와 놀라운 스피드의 박력있는 액션을 선보여 절찬을 받았다. 현재 견자단 정도의 스피드를 떠올리면 될까? 이소룡은 <사망유희>(1978)를 구상하면서 5층 석탑 안에서 싸울 인물들 중 그를 1층의 남자로 콘티에 그려넣기도 했다.

1940년생인 황인식은 한국 무술배우를 물색하던 골든하베스트사의 권유로 황풍 감독의 <합기도>(국내 개봉 제목 <흑연비수>(1972))에 캐스팅됐다. 기존 홍콩 무술영화에서 볼 수 없던 과감한 관절기와 날렵한 발차기를 선보인 황인식의 실력은 단연 돋보였고, 이 영화의 단역이었던 성룡은 그의 화려하고 민첩한 테크닉에 넋이 나가 이후 <사제출마>와 <용소야>에 그를 출연시켰다. 두 영화가 성룡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인식론적 단절의 순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상징성은 상당하다.

이후 그는 이소룡의 영화는 물론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주로 김시현 감독과 함께 현대 액션물인 <강인의 무덤>(1975), <흑거미>(1975), <내일없는 추적>(1976) 등을 찍었다. 역시 김시현 감독의 <대남>(1988)을 끝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이번 상영작인 <흑거미>에서 그는 탈옥을 가장해 아편 밀수단에 잠입해 사건을 해결하는 남자 ‘강혁’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강남 신축 아파트들을 홍콩인 것처럼 촬영했던 당시 영화 촬영현장도 흥미롭다.

(2) 성룡을 괴롭힌 고수, 황정리

황정리(본명 황태수)는 <사형도수>(1978)와 <취권>(1978)에서 부리부리한 눈빛의 악역을 맡아 성룡을 끝까지 괴롭혔던 고수다.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이두용 감독에게 발탁돼 <돌아온 외다리>(1974)로 데뷔했다. 역시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그는 주로 호쾌한 발차기를 구사하는 악당으로 스크린을 주름잡았다. 동서남북 가로지르는 호쾌한 발차기도 일품이었고, 바람을 가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날아차기 역시 시원했다. 그 역시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수많은 영화들을 촬영했는데 박윤교의 <비천권>(1980), 이혁수의 <용호의 사촌들>(1981)과 <천용란>(1981), 박우상의 <광동관 소화자>(1983) 등이 한국에서 촬영한 영화들이다. 이후에도 홍콩영화계의 러브콜은 계속돼서 <홍금보의 대나팔>(1986), <부귀열차>(1986), <예스마담: 중화전사>(1987) 등에 출연하게 된다. <예스마담: 중화전사>에서 양자경에게 발차기 특훈을 시킨 사람도 역시 황정리다.

현대물을 제외하자면 황정리의 국내 출연작들도 거의가 한국을 중국처럼 바꾼 무술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거룡과 함께했던 김시현의 <뇌권>(1983), 박우상의 <사대 소림사>(1984) 등이 그런데 <광동관 소화자>에는 현재 무술감독으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원진이 풋풋한 모습으로 출연한다. 그러던 중 스스로 연출의 꿈을 품었던 그는 중국으로 건너간 고려 무사의 이야기 <광동살무사>(1983)를 통해 드디어 감독의 꿈을 이뤘다. 이후 <소림사 용팔이>(1983)에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거룡을 캐스팅해서는 <암흑가의 황제>(1994)를 연출하기도 했고, 조양은 주연의 <보스>(1996)에도 출연했으며 드라마 <모래시계>의 무술지도를 맡기도 했다.

(3) 화려한 가위차기, 왕호

왕호(본명 김용호)는 황정리만큼이나 해외에서의 인지도가 높은 액션배우다. 타란티노도 존경한다는 홍콩 골든하베스트의 황풍 감독은 <사대문파>(1976)에 그를 캐스팅하면서 ‘Casanova Wong’이라는 다소 장난스런 예명을 붙여줬고, 그의 팬들은 종종 가운데 ‘노’자를 빼서 ‘카사파’라 줄여 부르기도 했다. <사대문파> 외 홍금보가 연출한 <중원호객>(원제: 삼덕화상과 용미육, 1977), <천하제일권>(원제: 찬선생과 조전화, 1978) 등의 작품에서 기존 홍콩 스타들을 압도하는 현란하고 시원한 발차기를 선보였다.

1952년생인 그는 해병대 태권도 대표 선수로 활동하다 1976년 김선경 감독의 <흑룡강>과 <밀명객>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나중엔 홍콩으로 떠났다. 박우상의 <대적수>(1977)에 앉은뱅이로 나오고, 이형표의 <아가씨 참으세요>(1981)에서 당룡을 괴롭히던 쌍룡회의 콧수염 고수로 출연한 권영문도 그와 동시에 홍콩으로 건너간 동료였다.

양다리를 찢어 날아차기를 하는 일명 가위차기는 최고였다. 그가 출연한 어지간한 액션영화에서는 늘 몇번씩 등장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황정리와 더불어 박력 넘치는 발차기는 정말 일품이다. <사대철인>(1977)에서도 그는 명나라 상인들과 대항해 싸우는 태권 고수로 등장한다. 그는 홍콩과 한국을 오간 액션배우 중에서 유일하게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마검야도>(1985), <냉혈자>(1987), <붉은 마피아>(1994)는 물론 TV드라마 <비객>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4) 짝퉁 이소룡, 거룡

당룡, 여소룡, 하종도 등과 더불어 활약했던 수많은 ‘짝퉁 이소룡’ 가운데 하나. 1958년생인 거룡(본명 문경석)은 화천공사에서 공모한 ‘이소룡 후계자 찾기’에서 김시현 감독에게 일약 발탁돼 <최후의 정무문>(1977)으로 데뷔했다. 영화는 정무문의 문하생들이 조선의 태권 명인을 찾아오고 그의 제자 충(거룡)이 그들을 대신해 일본놈들을 벌한다는 얘기다. 얼핏 보아 이소룡을 1.5배 정도 부풀린 것 같은 체격의 그는(심지어 <일소일권>에서 이소룡의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빵빵’해 보인다) 역시 화려한 테크닉, 은근히 매력을 풍기는 구수한 입담으로 많은 팬을 거느렸다. 오히려 코믹쿵후 스타일에 능한 편이었는데 <소림사 용팔이>는 단순히 이소룡의 모방을 넘어 박노식이 그 전형을 만든 ‘전라도 건달 용팔이’ 스타일까지 끌어들여 새로운 퓨전을 만든 경우다.

심지어 여기서 용팔이는 압록강을 건너온 설정인데 “이 용팔이를 건드리지 말더라고!”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세상에 깨끗한 건 없다며 술과 물도 다 채에 걸러 먹는 그의 모습 역시 이전 거룡 영화들의 코믹한 모습에서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황정리는 소림사 용문방에서 파문당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이듬해 <뇌권>(1983)에서도 대결을 펼쳤다. 또 <소림사 용팔이>에서 거룡과 멋진 호흡을 보여준 대머리 배우 최민규는 거룡의 또 다른 주연작인 김시현의 <흑표비객>(1981)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했다. <흑표비객>과 김진태의 <월광쌍수>(1981)는 국내에서 전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오히려 해외에서 DVD로 출시돼 있다. 역시 그의 인기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5) 코믹쿵후의 달인, 정진화

정진화는 홍콩에서 활약했던 한국 액션배우 중에서 김영일, 원진과 더불어 마지막 세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순수하게 국내에서만 활동했지만 <소권괴초>(1979)류의 더벅머리에 장난기 가득한 성룡의 초창기 코믹쿵후를 그대로 소화했다. 거룡이 주로 김시현 감독과 함께했던 것처럼 그 역시 줄곧 김정용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밀명객>(1976)으로 데뷔한 뒤 초창기 김선경 감독의 다른 작품들 <흑룡강>(1976), <특명>(1976)에 출연하면서 입지를 다졌고, <무림악인전>(1980)으로 김정용 감독과 만나 배치기를 필살기로 하는 <복권>(1980)의 주인공을 맡으면서 일약 당대 한국 무술영화의 스타로 떠오른다. <소림사 주방장>(1981), <돌아온 소림사 주방장>(1982), <무림 걸식도사>(1982), <소화성 장의사>(1983), <아라한>(1986) 등 역시 한국을 버젓이 중국처럼 꾸민 일련의 무술영화들에서 맹활약했다.

전국 10만 관객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흥행작이었던 <소림사 주방장>의 속편인 <돌아온 소림사 주방장>은 당시 성룡을 위시한 코믹쿵후영화의 뻔뻔한 모방작들 중 가장 하드코어한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제자는 스승이 한장씩 익히고 재래식 화장실의 ‘똥통’에 버리는 무술비급책의 종이를 가로채 깨끗이 다듬어서는 스스로 무술을 익힌다. 한국과 홍콩 사이에 자리한 포스트모던 짝퉁 무술영화의 기이한 형태가 거기 압축돼 있다. 청나라와 왜놈들 사이에서 금광을 지켜내는 태껸 고수의 이야기 <아라한>(1986)은 류승완 감독의 얘기에 따르자면 “당대 한국 무술영화의 황혼기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원래 그의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도 그냥 그 작품을 본떠 <아라한>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부제인 ‘장풍대작전’과 한데 이어져서 하나의 제목처럼 불리게 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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