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것을 빼앗길세라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은 거기 없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조인성은 <발리에서 생긴 일> <봄날> <비열한 거리> 등을 거치며 아로새겨왔던 불안정한 청춘의 그림자를 지웠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모든 고뇌를 마음속으로 끌어안고 사는 왕의 호위무사 홍림이다. 왕을 연인으로, 왕후를 이성으로 둔 호위무사의 복잡미묘한 감정은 칼을 휘두르거나 사랑을 나눌 때에나 비로소 엿볼 수 있다. 홍림 역을 맡아 감정을 억누르고 그것을 몸으로 표출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배우 조인성 역시 자기 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조인성은 그것을 ‘기분 좋은 배신’이라 부른다.
-2년 만이다. <비열한 거리>를 끝내고 공백이 길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됐다. <비열한 거리> 끝나고 들어오는 시나리오들이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나 조폭영화였다.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작품이 다양하지 않더라.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쌍화점>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쉬는 기간에 유하 감독님과 통화를 했다. 감독님 쓰시는 작품에 제 나이 또래가 나오면 연락 주시라고, <비열한 거리>로 저 좋은 상(제5회 대한민국영화대상 남우주연상) 받게 해주셨으니 보답해드리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마침 감독님도 <쌍화점>을 준비하고 계셨고, 같이 한번 해보자고 연락이 왔다. 개인적으로는 <비열한 거리> 때 못 풀었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어떤 한인가.
=흥행적인 부분도 있었다. 내 연기에 대한 부분도 있었고. 나 역시 20대의 마지막 작품이니 배우 조인성이 못할 것 같던 부분을 과감하게 깨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못할 것 같던 부분’이란 뭔가.
=베드신이라든지 동성애 코드라든지. 나뿐만이 아니라 이런 장면을 흔쾌히 연기할 배우는 많지 않다. 또 조인성이 과연 사극에 어울릴까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고. ‘저렇게 위험한 거 해도 되나’, ‘내가 원했던 조인성의 모습은 저런 게 아닌데’란 말을 듣고 싶다. 그런 편견을 깨면 더 다양한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 싶었다.
-유하 감독은 <쌍화점>이 전작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다고 하던데.
=나 역시 그랬다. 정말 ㄱㄴㄷ을 새로 쓰는 마음이었다. 감독님은 내가 <비열한 거리>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흔들리는 눈동자, 불안한 청춘의 이미지는 너의 타고난 매력이다. 이번에는 그런 걸 줄이고 너의 새로운 것들을 꺼내보자. 그게 가능하다”고. 그래서 <비열한 거리>와 비슷한 표정이 나오면 다른 표정을 요구하셨고, 연기할 때도 불안함보다는 안정감이 더 많이 보이게 디렉션을 주셨다.
-건룡위 수장 홍림은 확실히 <봄날> <발리에서 생긴 일> <비열한 거리>에서 맡은 역할보다 안정된 느낌을 준다.
=그렇다. 홍림은 수동적인 인물이다. 왕에게 지시를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고, 왕후에게도, 건룡위 동료에게도 그저 반응을 보여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차라리 오열하거나 센 장면이 많았으면 연기가 수월했을 텐데. 한 장면을 촬영하고 난 다음의 충족감이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홍림은 한신 한신이 쌓이고 쌓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다. 한마디로 회색지대에 있는 인물이다.
-주로 반응을 보이는 인물이라면, 무엇보다도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했겠다.
=그래서 홍림을 연기할 때 인물마다 감정 상태를 따로 잡았었다. 왕은 내 여자, 왕후는 이성, 건룡위 동료들은 친동생 같은 존재. 이처럼 여러 가지 감정선을 잡아야 하는 게 매력이었고, 그걸 표현하기가 힘들었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어쨌든 초점은 왕과 홍림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나머지 관계는 영화적 장치이자 왕과의 사랑에서 파생된 이야기니까.
-홍림과 왕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왕은 내 여자이자 내 아버지이자 내 친구이자 형이자 스승. 그런 절대적인 인물이다. 왕도 홍림 못지않게 복잡미묘한 인물이라서 생각하는데 머리가 빠질 것 같았다. (웃음) 물론 왕후 캐릭터도 마찬가지로 복잡하다. 이 영화는 어느 한 캐릭터가 죽어서 잘될 영화가 아니다. 인물의 관계가 잘 살아야 하는 영화이기에 진모 형이나 지효와 캐릭터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고 서로 신뢰를 줬다.
-주진모, 송지효와의 호흡은 어땠나.
=진모 형은 현장에서 든든한 중심이었다. <조 블랙의 사랑>에 나오는 앤서니 홉킨스 같다고 할까. 선배에겐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진모 형에게는 굉장히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있다. 그 모습 때문에 나와 지효가 편안하게 형을 대할 수 있었다. 지효는 털털한 친구다. 이번 작품에서 지효가 제일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여자로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고 이뤄냈다는 점에서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드신을 찍을 때도 서로 불편한 게 보이고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거리낌없이 임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20대 마지막 작품의 개봉과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후회는 없나.
=후회는 없다. 군대 가는 것도 그저 편안하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비열한 거리>부터 <쌍화점>을 선택하기까지 2년이 걸렸듯, 또 다른 작품 구상하러 들어갔다고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배우 조인성으로서의 큰 목표가 있다면.
=싸늘한 배우가 되고 싶다. 나이가 들고 인생을 윤택하게 살다보면 기름이 낄 수도 있다. 나는 내 불안함을 유지하고 싶다. 막연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설렘이 있는 불안이랄까. 규정되지 않고, 기존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부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래서 다음 작품도 어떤 역할을 맡든지 <쌍화점>보다는 더 힘든 작품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