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주진모] 폭풍전야의 광기 느껴보시라
2008-12-19
글 : 이화정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랑에 빠진 고려의 왕, 주진모

12kg의 살을 뺐다. 사랑에 애타하는 왕의 마음을 느껴보려 꼭꼭 묻어둔 안 좋은 기억까지 끄집어낸 탓에 촬영장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밤에는 숙소에서 악몽을 꾸는 일이 다반사였고 무리한 체중감량으로 촬영장에서 쓰러질 뻔하기도 했다. <쌍화점>을 만난 지 1년, 촬영장에서의 5개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주진모는 자신을 무진장 괴롭혔다. 그런데 괴롭힘의 강도가 커질수록 묘하게도 그에게 쾌감이 왔다. <쌍화점>은 주진모에게 단순히 영화 한편이 아니다. 한때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영화계를 향한, 배우 주진모의 ‘주진모 아직 살아 있다’라는 커다란 외침이다.

-시나리오부터 남다르다는 유하 감독의 작품이다. <쌍화점>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랑> 찍고 있을 때부터 <쌍화점>이 제작된다는 건 이미 충무로의 화제였다. 그때 인성이는 캐스팅 된 상태였는데 나한테 제안이 올 줄은 몰랐다. 책을 보는데 다 읽고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더라. 아, 이거 해야겠다 결심했다.

-왕의 어떤 면이 주진모라는 배우와 어우러진 건가.
=유하 감독이 ‘네가 가지고 있는 눈이 왕이 가고자 하는 눈과 비슷해서’ 캐스팅했다고 하시더라. 눈은 배우에게 내면에서 느껴지는 것을 표현하는 창이다.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나를 선택하셨다니 감독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물론 일할 때는 기대에 부응하느라 힘들었다. (웃음)

-<미녀는 괴로워> <사랑>으로 이어지는 ‘좋은 남자’를 버리고 사랑 앞에 눈먼 ‘나쁜 왕’을 연기한다.
=배우생활하면서 언제 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싶더라. 잘생긴 배우로 알려진 걸 벗어나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역할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연기 패턴을 다 바꾸고 신인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뒷모습까지도 연기했다.

-동성애라는 설정, 수위 높은 섹스장면들에 대한 의심은 없었나. 자칫 배우의 몸을 이용하고 그친다면 배우로서 손해 아닌가.
=<쌍화점>의 동성애는 장치일 뿐이다. 왕의 사랑에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의 변화, 사랑, 욕망, 집착이 모두 있고 동성애는 그걸 더 효과적으로 표현해줄 뿐이다. 인성이랑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걸로 우리 은퇴할 수도 있겠지만, 유작일 수도 있으니 까놓고 가보자’고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닫아두고 하려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영화였다. 부모님이 보시고 ‘네 정체성이 궁금하다’고 하실까봐 걱정이지만. (웃음)

-그간 준비하던 작품이 중단되는 등 풍파도 많이 겪었는데 최근엔 오히려 승승장구다.
=<무사>와 <와니와 준하> 하고 나서 3년 정도 쉬었으니 많이 힘들었다. 어느 신문엔 ‘주진모 은퇴’ 기사도 나갔다. 자괴감이 컸다. 내가 정말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배우였나 싶더라. 한국영화 150편 준비될 때, 심지어 스탭들이 모자랄 때였는데 아무도 나를 안 불러주는 거다. 한강다리 위까지 올라갔었다, 죽으려고.

-그때 누가 잡던가.
=내가 나를 잡았다. 아직까지 꿈을 이루지 않았는데 이런 일로 포기해선 안되겠다 싶었다. 소주병 들고 다시 내려갔다. 여자친구와 연락도 끊고 지방 내려가서 몇달 동안 낚시하고 책보고 했다. 그 당시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도 야속했지만, 그런 상황을 만든 내 자신에 대한 반성도 생기더라. 지금은 고맙다.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나니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는 배우가 된 것 같다.

-등장이 화려했던 것에 비해 사실 대표작이 많지 않았다. <쌍화점>의 왕이 배우 주진모를 각인시키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열등의식이 없잖아 있었다. 한국에서 ‘배우’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나는 한번도 일등을 해본 적이 없다. <사랑>을 통해서 주진모가 보였다면, 이젠 확실히 뛰쳐나왔다는 소릴 듣고 싶다. 자화자찬인 것 같지만 이번 영화 보면 광기가 느껴질 거다. 최선을 다했지만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 내가 가고자 하는 것에서 십분의 일쯤 한 것 같다.

-포만감을 느끼려면 웬만한 진수성찬으론 안되겠다.
=<쌍화점>이 폭풍 전야라고 생각한다. 폭풍 일으키고 그 다음엔 또 다른 행보를 갈 거다. 항상 색다른 도전에 용기를 내는 배우, 관객의 눈을 배신하고 뒤통수치는 배우가 되려 한다. 데뷔 때부터 난 스타가 되길 포기했다. 다재다능한 탤런트가 아니라 한 우물 파는 뚝배기 같은 배우로 인정받는 게 내 꿈이다. 그 말이 듣고 싶어 고생스러워도 계속하는 거다.

헤어 구미정·메이크업 이화주(제니하우스 본점)·의상협찬 돌체 앤 가바나, 타임옴므, 띠어리맨·스타일리스트 안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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