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영화와 드라마 대표작 가이드
2009-04-16
글 : 조민준 (한겨레 esc 기자)

[영화 부문] 일본판과 프랑스판, 뭐가 다를까

비밀 秘密
1999년 | 감독 다키타 요지로 | 출연 히로스에 료코, 고바야시 가오루

더 시크릿 The Secret
2007년 | 감독 뱅상 페레 | 출연 데이비드 듀코브니, 올리비아 설비

<비밀>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린 작품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첫 번째 소설이다.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작 <방과 후>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이후 내내 상복이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통 추리물의 작법에서 벗어나 ‘빙의’라는 초자연적 소재를 채택한 이 작품으로 비로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비밀>
<더 시크릿>

원작 <비밀>과 8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두편의 영화는 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보인다. 다키타 요지로의 <비밀>이 원작에 충실하되 유머러스한 기조를 잃지 않은 편이라면, 뱅상 페레의 <더 시크릿>은 딸의 몸에 깃든 아내와 남편간의 갈등을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원작 <비밀>의 시점이 남편/아버지에게 집중된 반면, <더 시크릿>은 빙의된 아내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일본판 영화에서도 유지되었던 결말의 반전이 <더 시크릿>에서는 모양새를 달리한다. 한편 영화 <비밀>에는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도 대학 교수 역할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영화 부문] 게임의 본질은 함수

게임 g@me
2003년 | 감독 이사카 사토시 | 출연 후지키 나오히토, 나카마 유키에

<용의자 X의 헌신>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하 문제로 보이지만 실은 함수 문제’라는 표현과 함께 본격 추리물의 트릭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즉 이것은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하여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제부터 다시 사유하라는 것. <게임의 이름은 유괴>를 원작으로 한 영화 <게임> 또한 이처럼 발상의 재구성을 요하는 트릭을 숨겨놓은 채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한다. 제안서를 거절당한 광고기획자 사쿠마는 광고주 가츠라기의 집 앞을 서성이다 가츠라기의 딸인 쥬리를 만난다. “나를 유괴하지 않겠어요?”라고 유혹하는 쥬리. 그리하여 가츠라기를 상대로 한 사쿠마와 쥬리의 유괴 자작극 게임이 시작된다.

빈틈없는 유괴 시나리오를 만드는 철두철미한 광고기획자 사쿠마 역은 후지키 나오히토가 맡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그에 대해 “이미지 그대로의 캐스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영화 부문] 입시 비리를 둘러싼 장르 삼중주

호숫가 살인사건 レイクサイド マ-ダ-ケ-ス
2004년 | 감독 아오야마 신지 | 출연 야쿠쇼 고지, 야쿠시마루 히로코

명문 사립중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세명의 학생과 그 학부모들, 그리고 유명 입시 강사가 외딴 호숫가 별장에 모인다. 그곳에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오고, 이어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원작 <호숫가 살인사건>은 세개의 장르가 동거하는 소설이다.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는 이들의 처절한 노력을 다룬 전반부의 스릴러 전개는 어느새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 트릭을 규명하는 본격 추리물로 바뀐다. 그리하여 밝혀지는 진실은 입시제도의 추악한 이면이라는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고발로 가 닿는다. 아오야마 신지가 각색을 통해 방점을 찍은 부분은 그중 세 번째. 원작에 비해 인물의 수도 줄이고 사건 전개도 단순화한 영화판 <호숫가 살인사건>은 범인과 피해자의 행동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등 추리물로서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경쟁을 부추기는 입시제도에 대한 당사자들의 입장을 더욱 첨예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일제고사 실시와 3불정책 폐지 등 뜨거운 감자가 산적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섬뜩하게 상기시킨다.

[영화 부문] 남겨진 자의 고통

편지 手紙
2006년 | 감독 쇼노 지로 | 출연 야마다 다카유키, 사와지리 에리카

시작과 함께 범죄가 일어나고 범인이 체포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관객에게 낱낱이 보여진다. 요컨대 <편지>는 추리물이 아니다. 그 직후부터 카메라는 남겨진 범인의 동생 나오키를 쫓는다.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형의 투옥으로 인해 진학을 포기한 나오키는 직업전선에 뛰어들지만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정통적인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편지>를 각색한 이 영화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가족이 재소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야 하는 나오키의 살얼음판 같은 삶의 궤적에서 나온다. 그리고 연대책임을 중시하는 일본사회의 냉혹한 공기가 그 서스펜스를 더한다. 원작과의 주요한 차이점은 나오키의 꿈을 뮤지션에서 개그맨으로 바꾼 것. 그리고 이 차이는 원작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결말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부문] 원작을 과감히 벗어난 걸작

백야행 白夜行
2006년 | <TBS> | 출연 야마다 다카유키, 아야세 하루카

각색에서 원작과 철저히 다른 노선을 견지한 드라마. 그런 이유로 방영 당시 원작의 팬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소설 <백야행>이 15년 전 발생한 전당포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사사가키와 목격자들의 시점을 중심으로 서술된 반면 드라마 <백야행>은 줄곧 범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에 관해서는 작품의 자유로운 각색에 대해 열린 입장인 히가시노 게이고조차 부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는데 “원작이 미스터리라면 드라마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이 제작진의 입장이었다. 어쨌든 이같은 각색을 통해 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해는 떠 있으되 밤과 다를 바 없는 날들을 살아야 하는 주인공들의 내면과 원작의 주제의식은 더욱 부각되었고, 마침내는 가도카와의 TV매거진 <더 텔레비전>이 매년 주최하는 드라마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 드라마가 논쟁의 중심에 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캐스팅에 있다. 주인공, 즉 범인 역할을 맡은 야마다 다카유키와 아야세 하루카는 2004년에 방영된 멜로드라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남녀 주인공이었던 까닭이다. 전작의 잔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이전 드라마와는 판이한 범죄물의 주인공으로 나란히 캐스팅된 터라 몰입할 수 없다는 시청자의 의견이 줄을 이었다. 게다가 15년간 두 사람을 쫓는 형사 사사가키 역의 배우는 다케다 데쓰야. 일본 시청자에게는 학원물의 대명사 <3학년 B반 긴파치 선생>의 긴파치 역으로 각인된 인물이다. 마치 학원 멜로물의 주인공이었던 두 학생을 쫓는 선생님의 구도인 셈인데, 이 또한 제작진들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범인들을 괴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작가와 연출가의 변이다. 참고로 드라마 <백야행>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같은 작가(모리시타 요시코)와 연출가(이시이 야스하루)에 의해 만들어졌다.

[드라마 부문] ‘논리 괴물’ 과학자의 첫 등장

갈릴레오 ガリレオ
2007년 | <후지TV> | 출연 후쿠야마 마사하루, 시바사키 고우

2007년 4분기 게쓰구(<후지TV>의 간판인 월요일 9시 드라마) 히트작. 천재 물리학자 탐정 유가와 마나부가 등장한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의 에피소드들을 각색했다. 그러니까 제작 순서로 보자면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은 드라마 <갈릴레오>의 스핀오프가 되는 셈이다. 얼핏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과학으로 규명한다는 매회의 전개는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캐릭터에는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유카와의 인간적인 측면은 한층 배제되었고 ‘논리 괴물’로서의 면모는 강화되었다. 특히 원작에 없었던 유카와의 “실로 재미있군”과 같은 말버릇이나 사건의 실마리가 떠오른 순간 홀린 듯 수학식을 풀어대는 모습 등은 탐정드라마로서 <갈릴레오>의 개성을 확고히 각인시켰다.

유카와에게 자문을 구하는 형사 캐릭터를 남성인 쿠사나기에서 여성인 우쓰미(시바사키 고우)로 바꾼 것도 각색상의 변화. 하지만 단순히 성적 긴장을 활용하기 위한 이같은 드라마상의 설정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2008년에 발표한 신작 <갈릴레오의 고뇌>에서는 우쓰미 캐릭터를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쓰미가 등장한 원작 <갈릴레오의 고뇌>의 드라마판인 <갈릴레오 제로>(2008)에서는 거꾸로 유카와의 파트너로 쿠사나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의 현지 개봉 직전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였던 <갈릴레오 제로>에서는 장차 영화에서 맞붙게 될 유카와의 최대 라이벌 이시가미의 학창 시절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 부문] 개그 퍼래디로 각색한 사기행각

유성의 인연 流星の絆
2008년 | <TBS> | 출연 니노미야 가즈나리, 니시키도 료, 도다 에리카

사자자리 유성군을 관측하고 돌아온 어린 세 남매는 부모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모습을 발견한다. 자라서 범인을 찾아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그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나 어느덧 시효의 만기가 눈앞인 때, 남매 사기단으로서 사기행각을 벌이며 새로운 타깃을 물색 중이던 그들은 부모를 죽인 범인의 단서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유성의 인연>은 방영 전부터 화려한 라인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드라마계의 명콤비 구도 간쿠로(작가)와 이소야마 아키(PD) 제작, 그리고 주연으로 자니스의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니시키도 료를 내세운 이 작품은 금요드라마로서는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세 남매의 사기행각을 액자식의 개그 패러디로 각색한 에피소드들은 ‘대사의 십자포화’로 불리는 작가 구도 간쿠로의 재기가 빛을 발한 대목. 다소 무겁게 진행되는 살인사건의 메인 플롯과 요소요소에 끼어드는 사기 트릭 에피소드의 발랄한 구성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롤러코스터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고수와 손예진의 <백야행>

앞으로 TV와 스크린에서 만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먼저 2009년 2분기 드라마로 <명탐정의 규칙>(名探偵の掟)이 편성되었다. <아사히TV> 금요드라마로 4월17일부터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자신이 소설상의 탐정 캐릭터라는 것을 인지하는 주인공을 통해 본격 추리물의 공식을 풍자하는 유머러스한 시리즈. 마쓰다 류헤이의 동생인 마쓰다 쇼타와 오다기리 조의 배우자인 가시이 유우가 주연을 맡았다.

국내에 출간된 <방황하는 칼날>(さまよう刃)도 현재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끔찍한 범죄를 통해 외동딸을 잃었지만 정작 범인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형벌을 받는 현실에 분개하여 스스로 복수에 나선 아버지 역할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데라오 아키라가 캐스팅되었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영화도 있다. 바로 <백야행>으로, ‘하얀 어둠 속을 걷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남녀주인공 역은 고수와 손예진이, 형사 역은 한석규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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