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쇼]
[박영진] 내가 얄밉다고? 그건 니 생각이고~
2009-04-30
글 : 장미
사진 : 오계옥
<개그콘서트> ’뿌레땅 뿌르국’ 주역, 개그맨 박영진

나쁜 남자에게 빠져드는 여자 심정이 이럴까. 춘배에게 분무기로 물을 주거나 “너 오바마 알지? 오바마는 왜 널 몰라? 오바마한테 돈 받은 거 아냐”라고 큰소리치던 황당한 그 사람, 자기 어깨보다 한뼘은 더 큰 촌스러운 외투를 걸치고 나타나 “그건 네 생각이고! 화장실 갔다가 손 안 씻으면 물을 아낄 수 있다”고 우기더니, 대통령이 됐다가 경찰청장으로 변신하고 담임선생님 흉내까지 내는 이 정신분열적인 인물을 잊을 수 없다니. 분장실의 여배우들보다 덜 그악스럽고, 황현희 PD보다 덜 지능적이며, 생명존중의 달인 ‘백정’ 김병만 선생님보다 덜 뒤집어진다 해도, 이 남자 정말 인상적으로 얄밉지 않은가.

하필 매섭게 기온이 곤두박질친 4월21일 저녁. 새 코너 ‘뿌레땅 뿌르국’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KBS <개그콘서트>의 박영진을 만났다. ‘춘배야’, ‘박 대 박’, ‘봉숭아학당’에서 밉살맞은 4차원 캐릭터를 연기한 바로 그 개그맨 말이다. 개그의 매력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듯 보이는 그는 실상 만나기 전보다 후가 훨씬 좋은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 찬바람 휘몰아치는 야외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불평 하나 없는가 하면, 팬이 건넨 조각케이크를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아, 물론 그렇다 해도 팬 서비스를 의식한 전문가의 말투로 ‘허경환이 몸 때문에 20주는 거저먹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잊지는 않았지만.

-소속사 홈페이지에 한달 스케줄이 올라와 있더라. 지난 일요일엔 강원도에 다녀왔던데.
=태백 말인가. 달인 코너의 김병만 선배를 필두로 해서 함께 지방공연을 다니고 있다. 전국에 있는 도시들 많이 다닌다.

-어땠나.
=태백은 처음 가봤다. 지방에서 개그맨을 직접 볼 기회가 거의 없잖나. 많이 좋아해주시더라. 지방공연의 묘미는 카메라가 없다는 거다. 더 다양한 개그를 보여드릴 수 있다. NG라든가 편집도 없어서 실수 역시 개그 소재가 될 수 있고.

-실수를 거의 안 하는 편 아닌가.
=대사를 까먹어서 다시 한 적은 있다. 한번은 대학로 공연에서 무대로 못 나가기도 했고. 너무 피곤해서 구석에서 잠자고 있었거든. 암전인 상태에서 불이 탁 커졌는데 내가 없으니까 상대 배우가 당황했다고 하더라.

-혼 많이 났겠다.
=혼도 많이 났는데 상대 배우가 개그스럽게 잘 넘겼다. 그렇게 짜여 있는 것처럼, 대사 치듯이, 영진아 어디 갔니! 그래서 뛰어나갔다.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방송 촬영이 수·목에 몰려 있는 것 같던데 주간지 마감과 같아서 그런지 동질감이 느껴지더라.
=방송 스케줄은 그렇지만 <개그콘서트>의 시스템상 일주일 내내 회의를 해야 한다. 부족한 게 있다 싶으면 주말에도 모여서 자체적으로 회의를 한다. 잠자는 시간, 이런 게 많이 부족하고. 수요일이 녹화인데, 화요일이면 대충 완성된 코너가 나와야 한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녹화 전까지 계속하는 거고. 수요일 두번, 월요일 한번, 화요일 한번, 네번의 리허설을 거친다.

-팀은 어떻게 짜나.
=자유롭다. 어떤 코너를 구상했는데 저 캐릭터가 필요하다 싶으면 같이 하자고 제안하고. 감독님, 작가분들도 코너에 대한 준비를 해온다. ‘박 대 박’도 감독님이 나와 성광이가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제안한 케이스다. 그전에 다른 선배님이랑 어떤 코너를 했는데 잘 안 터졌다.

-그게 뭐였나.
=‘파워인터뷰’였다. 신인이기도 했고 잘 안 맞아떨어진 것 같더라. 근데 박성광은 캐릭터상으로도 약간 우스꽝스럽고. ‘집중토론’이라고 황현희 선배를 주축으로 같은 코너를 했는데 성광이가 좀 당하는 캐릭터였다. 나는 우기고, 그 친구는 당하고. 그 그림을 생각하신 모양이더라.

-어떤 사람은 ‘박 대 박’ 보면서 너무 얄미웠다고 하던데. (웃음)
=주변에서 그러더라. 너 웃기는 것도 중요한데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다. 표정도 딱딱하고 웃지를 않으니까. 나는 29년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몰랐거든.

-잘 안 웃는 편인가보다.
=남들 웃기는 일은 많았는데 정작 내가 웃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웃기는 아이였나.
=경북 김천 출신인데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선 재미있는 아이로 통했다. 나도 저건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다 싶었고. 내가 친구들 사이에선 조금 힘이 셌거든. 일단 키가 크니까. 쟤는 힘이 있으니까 재미있다고 해야지,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웃더라고.

-얼마 전부터 시작한 ‘뿌레땅 뿌르국’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아이디어를 내가 생각해낸 건 아니다. 어찌 보면 숟가락을 얹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코너에 김기열 선배랑 이종훈 선배, 그리고 정태호씨, 이렇게 세명과 담당 작가님이 먼저 있었다. 넷이서 거의 만들어놨는데, 제정신이 아닌 캐릭터가 필요했던 거다. 누구를 할까 하다가 나를 선택한 거지. 나도 그냥 밥숟가락 얹은 게 아니라 조금 기여한 부분은 있다. (웃음)

-거기서 제일 터지는 캐릭터는 당신이잖나.
=그래서 운이 좋았다고 할까. 선배들이 이 코너를 하면서 나를 염두에 뒀단다. 김기열 선배가 그러더라. 내가 너를 스타로 만들어줄 거야, 이거 하면 스타가 될 거야. 선배님들한테 굉장히 감사한다.

-<개그콘서트> 무대에 처음 선 게 언제인가.
=2007년 4월 즈음이었다. 보디가드였고, 대사도 없었다. ‘착한 녀석들’이었을 거다. 친구들한테 소문을 냈다. <개그콘서트>에 나온다고. 근데 안 믿더라. 나 개그맨 한다, 하고 올라온 게 스무살 때였거든. 벌써 7년이 지났다.

-떨었나.
=어느 자리든 열명 이상 있으면 무조건 떨린다. 사실 무대공포증이 좀 있다. 막 이야기하고 있는데 눈이 마주치면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웃기다고 생각할까, 미친놈이라고 생각할까. 그러면 벌써 망가지는 거다. 대학교 때까지 그걸 못 고쳤다. 고등학생 땐 음악실기 시험으로 앞에 나가서 교가를 불러야 했는데 빵점을 받았다.

-심각한 수준이다.
=굉장했다.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어서 대학교 실기시험도 봤는데 이건 불 보듯 뻔하지. 시험장 문 열고 들어가는 순간 심사위원들 얼굴 보고 어어어어 하다가 나왔다. 나중에는 연극영화과를 안 갔지. 스탭이든 뭐든 방송국에 들어가서 박영진이 재미있다는 소문만 나면 무조건 된다 생각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그러다 개그동아리에서 박성광을 만났다. 그 친구 아니었으면 개그맨이 안됐을 거다. 그 친구가 옆에 있으니까 눈을 마주쳐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거야, 가 아니라 사람들이 박성광을 싫어할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좌중 웃음)

-<개그콘서트>를 볼 때면 모두들 자신의 역할에도 충실하지만 다른 개그맨이 연기를 할 때 이를 북돋워주려 노력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개그콘서트>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저 친구가 잘하면 나한테도 도움이 된다. 나 역시 한번이라도 더 봐줄 것 아닌가. 프로그램이 잘되면 뒤에서 가만히 서 있는 역할이라도 기분이 좋다. 처음 보디가드로 나갔을 때도 그랬다. 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 게 처음이었는데, 그 천명이 동시에 팡 하고 웃을 때 사자후처럼 하하하하 그 기운이 막 밀려온다.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경쟁이 심한 걸로 아는데 스트레스도 있지 않나.
=눈에 안 보이게 있다. 좁게는 감독님한테, 넓게는 시청자한테 내가 어떤 개그맨인지 보여줘야겠다는. 나는 ‘달인’이니 ‘분장실의 강선생님’이니, 잘되는 코너들이 고맙더라. 이때를 노려야 하거든. 뿌레땅을 쓱. 뿌레땅 뿌르국이라는 정확한 명칭을 모두가 알 때까지. 더 재미있게.

-궤변개그랄까. 우기는 개그를 많이 했는데.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 그런데 중간에 ‘춘배야’라는 코너도 했거든. 그건 그냥 4차원적인 놈들 둘이 나오는 코너다. 나도 그런 데서 탈피하고 싶어서 새로운 개그를 준비하고 있다. 분장 개그나 슬랩스틱 코미디도 하고 싶다.

-개그의 소재는 어떻게 얻나. ‘인터넷 유머, 화장실 벽에 써 있는 낙서’를 참고하기도 한다고.
=재미있는 게 있으면 그걸 분석한다. 세상에는 정말 웃긴 사람들이 많구나 싶다. 나랑 생각이 비슷한 개그가 많거든.

-예를 들면.
=유머 책을 보면 이런 게 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을 확 끼얹는다. 그럼 물을 함부로 뿌리면 어떡해 그런다. 그러면 물 뿌린 사람이 이런 이야길 한다.

-거기 있으면 어떡해, 뭐 이런 식으로?
=내가 물 뿌리는 걸 봤으면 피해야지.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그러면 그런다. 내가 봤어야 피하지. 그럼 또 한번 받아친다. 내가 뿌리는 걸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나한테 따져! (좌중 웃음) 정말 논리적으로 잘 썼더라고. 어떻게 여기서 한번 더 꺾을 생각을 했지? 내가 물을 맞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말해서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을까. 그렇게 내 개그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한다.

-KBS 공채 개그맨 시험은 스물일곱 때 합격했잖나. 스무살부터 개그맨 시험을 계속 쳤고.
=스무살 땐 원서만 넣었다가 안됐을 거다. 스무한살 때 실기까지 갔다가 떨어졌다. 그해 가을 군대에 갔다가 스물네살 때 돌아와서 그때부터 시험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계속 떨어졌지만 포기 안 하고 계속했다.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되더라고. 스물아홉 평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가장 절실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가졌을 때 눈물도 안 났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키호티즘’이라는 단어를 써놨더라. 돈키호테의 행동에서 나온 말인데 어떤 의미가 와닿아 적어뒀나.
=나랑 비슷한 것 같더라. 남들이 보면 바보 같잖나. 풍차랑 싸운다고, 자기가 기사라 그러고. 나도 무턱대고 도전하진 않거든. 안전하겠다 싶으면 가는 편인데 그게 이상향처럼 보이더라. 닮고 싶어서 적어놓은 거다.

-서른 넘어가기 직전인데 미래에 대해 고민이 많을 시기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꾸준히 활동하고 싶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게 매력있다. 옛날부터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 다음 계단을 올라가기가 힘들고 부담스러울 것 같더라. 차근차근 오래하고 싶다. 얇고 길게. 굵고 길게 가면 더 좋겠지. (웃음)

-선배 개그맨 중에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나.
=롤모델이라는 말을 몰랐던 시절부터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분이 이경규 선배님이다. 정말 기복없이 오래하셨다. 배울 점도 많고. 물론 다른 개그맨 선배님들한테도 배울 게 있다. 김병만 선배님의 슬랩스틱 개그나 디테일한 연기력, 이수근 선배님의 재치있는 입담처럼. 내 개그맨 동기가 스물한명인데 그들에게서 나보다 잘하는 걸 한 가지씩 꼽으면 스무개가 되잖나. 그걸 다 배우고 싶다.

-참, 가끔 춤추는 걸 보면 몸 쓰는 데 능하지 않아 보이더라.
=몸치다. 춤 잘 추는 사람 보면 굉장히 부럽다. 사람들이 나한테 박영진씨는 말을 참 잘해요, 그러는데 솔직히 그건 안 좋은 것 같다. 개그맨은 오락적인 직업이기 때문에 뭐든 배워놓으면 개그가 100개 정도는 나올 수 있거든. 그러고 보면 허경환이 나보다 하나 정도는 낫다. 몸 때문에 20주는 그냥 가잖나. 그거 없었으면 20주 전에 벌써 단명했지. 부럽더라고. (좌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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