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여전히 그대로네요.”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들어선 원빈이 생각에 잠긴 듯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얼마 전 있었던 <마더>의 제작보고회가 전부니, 군입대 이후로 오늘 인터뷰가 5년 만의 첫 복귀다. 원빈을 보자마자 ‘오늘 참 예쁘다, 귀엽다’를 연발하는 엄마 김혜자의 시선을 잔뜩 받으며 그는 오랜만의 인터뷰에 응했다.
<마더>의 시작은 김혜자다. 김혜자를 향한 봉준호 감독의 구애는 이 영화가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살인 누명을 쓴 아들, 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엄마의 사투. 이 영화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엄마’에 찍혀 있다. 엄마 뒤로 꽁꽁 숨어버린 원빈의 선택은 그래서 조금은 의아하다. 그의 말대로 ‘봉준호 감독과 대선배인 김혜자와의 공연, 그걸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가 어쩌면 정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거인’에게 가려졌을 그의 심적 부담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해서 감독님, 선생님의 명성에 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모든 면에서 부족하니까요. 작품 하기 전부터 그걸 감당하는 게 이번 영화의 숙제였죠.”
처음엔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다. 남들 보기엔 분명 한참은 모자란, 사회성이라고는 1%도 없는 도준을 연기하기 위해서 원빈은 백번이고 이백번이고 도준의 행동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답답한 아이예요. 항상 답답한 말만 해요. 그런데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보는 아니에요. 너무 순수한 사람이죠.” 도준은 마음으론 이렇게 이해가 가는데 잡으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데 해답은 의외로 쉽게 다가왔다.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도준이 노상방뇨를 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감독님이 ‘이 친구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냐’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아, 이 아인 아무렇게나 해도 되겠구나 했어요. (웃음)” 원빈은 그 순간부터 도준이라는 아이의 틀을 깼다. 도준을 정의하기보단 그를 닮아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시골 생활을 했기에 도준의 순수함이 제법 와닿았다. 촬영 동안은 될 수 있으면 사람들과의 접촉도 피했다. 또 촬영이 없는 날이면 며칠이고 혼자 시골에 가서 복잡한 도심을 털어내고 도준의 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도준을 연기하는 동안 그는 매일매일이 행복했다고 한다. 어느덧 햇수로 10년차 배우가 됐지만, 작품 편수가 많지 않은 그에게 도준은 다시 신인 같은 도전이었다. “전 한 작품 들어가는 게 남들보다 배는 힘들어요. 온전히 그 인물에 빠져들었다, 다시 나오는 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거죠.” 잠깐 동안 주어진 배우의 휴지기, 그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역할이 아닌, 꽃미남 원빈이 아닌, 이젠 남자답고 강인한 모습도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보호받는 역할인 도준이, 그리고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진 도준이 싫지 않다. “여전히 전 연기자로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낯도 많이 가려서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편이고 제 또래 남자들보다 경험도 적은 편이에요. 그런데 선배들과 함께하면 배울 것도 많고, 마음이 놓여요.” 배우 2라운드를 앞두고 있지만 그래서 그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무대인사가 다 끝나야 그때쯤 도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그냥 느리게 하려고요. 기계적으로 빠르게 쌓는 것보다 이게 저한텐 잘 맞는 방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