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공개됐다. 5월16일 칸영화제에서 첫 막을 열었고, 한국에서도 20일 기자시사회를 통해 첫선을 보인 <마더>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감각이 곳곳에서 번득이면서도 그의 이전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문제작이다. <마더>의 첫인상과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 칸 현지의 반응을 소개한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현장에서 틈틈이 찍은 사진과 짧은 이야기를 담은 ‘포토 코멘터리’는 <마더>의 이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괴이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이다. 펼쳐진 갈대밭. 아무렇게나 차려 입은 한 중년의 여인이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화면의 중앙에 서자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처음에는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춤이고 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냥 몸을 슬프고 우스꽝스럽게 놀리는 것 같다. 이 여인의 기이한 춤사위에 어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혹은 그 음악 때문에 그 몸짓이 더 기이하다. 그런데 음악은 갈대밭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스크린 바깥에서 들려오므로 이 여인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여인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 음악은 없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음악은 이곳에서 들려오고 춤은 저곳에서 춘다. 둘은 서로 다른 곳에서의 행위와 출현이며 그걸 하나로 묶어 합당하다고 보는 것은 우리이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마더>를 보는 방법에 관한 영화적 머리말이며 제안으로 읽힌다. 이 여인은 무슨 이유로 지금 이곳에서 이러는가, 여기는 어디일까, 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밝혀질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그런데 보고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믿을 것인가. <마더>에서는 그 질문이 더 중요하다.
김혜자의 얼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카메라
지방의 어느 작은 마을. 형사들의 말을 빌리자면 몇년 만에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문아정이라는 여고생이 폐가의 지붕 옥상에 귀신 같은 형상의 시체로 널려 있다. 형사들은 둔기로 맞아 살해된 것 같다고 말한다. 용의자는 그날 밤 문아정의 뒤를 쫓아가며 술 한잔하자고 조르던 도준(원빈)이다. 도준은 그날 밤 친구 진태(진구)를 허름한 술집 맨하탄에서 기다렸지만 진태는 오지 않았고 술집 주인의 증언에 따르면 발정난 개처럼 헉헉거리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는 길에 그가 여고생 문아정을 쫓으며 술 한잔하자, 남자가 싫으냐며 농짓거리를 한다. 도준은 행동이 어리숙하고 판단이 명확하지 않고 미숙아 같다. 하지만 대체로 착하고 순박한 녀석이다. 선천적으로 좀 부족한 도준의 말을 여고생 문아정은 무시한다. 폐가의 어두운 샛길로 숨어버리더니 도준에게 위협적으로 커다란 돌을 던진다. 도준은 겁을 먹은 표정이다. 도준의 어머니(김혜자)도 여기까지 들어 아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음을 믿을 수가 없다. 천금 같은 내 아들이 살인자라니. 경찰이 나 몰라라 하자 어머니는 스스로 탐정이 된다. 아들의 유일한 친구였던, 하지만 어딘가 음흉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진태부터 의심한다. 하지만 진태가 범인일까.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한참을 더 나아간다. 하지만 같은 자리, 그날 밤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김혜자는 여기서 깊이를 알 길 없는, 모성애의 조물주다. 그런데 그녀는 <마더>에서 눈알의 희번덕거림과 입술의 삐죽거림으로 통곡을 전달하는 엄마다(어딘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머니보다는 엄마라고 쓰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때로 그 표정에서 광기까지 읽을 수 있다. 아주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때문에 <마더>는 모성의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모성의 집착과 광기에 관한 영화라고 말해야 더 적절하다. 어쨌든 카메라는 김혜자의 얼굴에서 그런 모든 인상이 다 나온다는 걸 알고 있다. 얼굴 클로즈업이 얼마나 많은지 세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엄마가 아니라 김혜자라고 말하는 건 적어도 카메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비추는 것 같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김혜자를 비춘다기보다 종종 카메라가 김혜자의 얼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한 묘사일 장면들도 많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카메라가 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다. 하지만 실은 같은 효과다. 엄마의 집착은 그녀의 고립과도 연관된다. 그러니까 최대한 가까이 또는 최대한 멀리. 때로 카메라는 멀찌감치 떨어져 커다란 벽 앞에 작은 점으로 엄마 김혜자를 세운 뒤 그녀가 얼마나 고립되고 힘겨운지 구도적으로 알려주려 한다. 모자란 아들이 백주에 길거리 벽 아무 데나 오줌을 싸고 떠나버린 흔적을 엄마는 슬며시 무언가 종이판으로 가려놓아 뒤처리를 한다. 그때 벽은 크고 엄마 김혜자는 한 귀퉁이에 작게 보이지만 엄마의 행위는 좀더 분명하다. 이 엄마만이 이 아들의 유일무이한 보호자다.
‘엄마’라는 말의 이물감과 공포
아무도 아들을 도우려 하지 않으니 보호자가 수사관이 되는 과정은 너무 자연스럽다. 엄마는 주변부터 조사한다. 물론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하나씩 알아간다. 그런데 엄마가 탐문을 시작했을 때 이상하게도 이 마을의 많은 사람이 다 그녀를 어머니 또는 엄마라고 부른다. 형사 제문도 도준의 친구 진태도 그렇게 부른다. 물론 작은 마을에서 모두가 알고 지냈고 아주머니보다는 어머니나 엄마가 더 친근한 표현이라는 걸 우리는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그 말을 잊지 않고 대사 속에서 각인하듯 되풀이할 때 그건 일종의 덫으로서 장애의 효과를 노린다. 말하자면 그들이 엄마, 어머니라고 말하는 순간에 늘 느끼던 친근감이 아니라 이물감이나 공포심이 피어난다.
말의 이물스런 어감뿐 아니라 말의 오인도 작동한다. 여자하고 자봤냐는 진태의 말에 도준은 “나는 엄마하고 잔다”고 말한다. 진태는 섹스를 물었지만 도준은 말 그대로 엄마 옆에서의 수면을 말한다(하지만 둘이 섹스 파트너가 아니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이 말은 몇번 더 등장하고 그때마다 같은 말의 다른 뜻이라는 이 쓰임이, 무언가 영화가 우리에게 분명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작은 장치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느낌의 정체는 ‘헛돈다’는 것이다. 말의 어감이나 오도로서의 헛돌기. 실은 영화 속 어떤 장면 구성이나 장소의 문제를 둘러싸고도 그 헛도는 느낌은 주요하게 전달된다.
봉준호는 블랙홀을 아낀다. 검은 굴의 존재와 그것이 불러오는 미궁의 힘을 놓고 지금 우리와 대결 중이다. 봉준호는 그 영화를 대변하는 장소적 기호를 찾아내 그것으로 영화의 테마를 압축하기를 즐긴다. 예컨대 <살인의 추억>에서 등장한 검은 터널과 마찬가지로 <마더>에서 여고생이 숨어버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 검은 골목길은 중요하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굴의 반대편 의미에서 훤히 마을이 내다보이는 폐가의 옥상도 중요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거나 누구라도 보이는 이 장소들을 주목하자.
<마더>를 봉준호의 전작들과 연관해서 생각해도 흥미롭다. 어머니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배두나가 맡았던 역할을 당연히 상기시킨다. <살인의 추억>에서 유약하면서도 싸늘해 보이는 박해일이 용의자를 맡는 것과 같이 원빈은 명석해 보이는 표정을 뒤로 감추고 어수룩함을 강조한다. 그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처럼 표현되지 않는다. 믿음을 유도하는 얼굴이다. 그리고 <마더>가 아들을 구출하려는 엄마라는 점에서 이미 <괴물>을 설명할 때 봉준호가 말한 보호와 양육의 모티브를 떠올리게 된다. <마더>에서 형사들이 치매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사는 문아정에 관해 흘리듯 말한다.“그러니까 얘가 보호자네. 할머니는 보호받고.” 알다시피 보호자는 한명 더 있고 그게 도준의 엄마다. <마더>에서는 어떤 보호자가 죽었고 다른 보호자가 그 죽음을 탐문하는 중이다. 그리고 보호와 양육의 이그러진 테마는, 목격이라는 장치와 탐문이라는 동선, 이 둘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보고 듣기.
목격과 탐문의 과정이 주는 장르적 즐거움
봉준호는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선호하는 창작자가 아니다. 굵은 서사의 길이 있지만 샛길들이 있고 다시 만나는 지점들이 있다. 마더는 그 길을 따라가며 충분한 장르적 즐거움을 준다. 게다가 그 길, 즉 신들의 트임과 막힘의 산술적 배치에 능한 감독이 봉준호다. 그의 장르적 도전이 지루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그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되었을 영화, 농촌추리극에 만약 형사가 아니라 엄마가 탐정이라면? 과정은 이렇게 옮겨간다. 그런데 엄마는 힘이 없지 않나. 그녀는 누굴 때려잡을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일은? 남몰래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 그의 능력이다. 그래서 <마더>의 엄마는 늘 숨어서 보고 꾀어서 듣는다.
오프닝 시퀀스가 지나고 두 번째 시퀀스, 바깥에서 놀다가 차에 살짝 치이는 아들을 약재상 안에서 작두질을 하다가 엄마가 보는 장면이 있는데 긴장감 넘치게 구성되어 있다. 신의 밀도를 터져나갈 만큼 높인다. 그때 엄마는 손을 다친다. 이 장면은 하나의 인장으로 남으며 후반부 엄마가 다시 작두를 썰 때 급기야 아무도 다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사회에서 관객의 비명 소리를 끌어냈다. 즉, 안에서 바깥을 목격하기의 첫 번째 장면이다. <마더>는 안에서 바깥을 보는 장면들이 많다. 그게 목격의 시선이다. 또는 그렇게 안에서 바깥의 이야기를 숨어서 듣는 장면들도 꽤 있다. 대체로 이 영화의 순도가 고조되는 때가 그때다. 영화 속 중요한 목격담을 진술해줄 고물상 할아버지의 출현 역시 이 안과 바깥 사이에 선 사람으로서 등장한다. <마더>는 이런 목격과 탐문의 과정, 더러는 커다란 사건을 거친 뒤 후반부 어느 지점에 도착하여 마침내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 믿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마더>가 소문으로 들어온 것 이상으로 더 놀랍지는 않다. 실은 좀 석연찮은 구석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 힘이 있다면 그건 이야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팽창력을 극도로 높이는 그 분위기에서 온다. 소문처럼 이야기가 좋다기보다는 신의 밀도와 관계된 장점들이 대개 더 많다. 음악과의 결속력도 큰 몫을 한다. 봉준호는 그렇게 다재다능한 장르적 결속력으로 <마더>를 풀었다. <마더>는 봉준호의 가장 큰 욕심이 영화적 발명이기보다는 장르영화의 이런 잘 짜인 주조와 자체의 순도를 지키는 것에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또한 뽕짝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엄마의 춤처럼, 뽕짝처럼 사연 많고 우스꽝스럽지만 종종 서늘하기까지 한 봉준호의 흥미로운 장르영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덧붙여야 할 말. “엄마가 직접 잡아, 범인을. 다 필요없고. 아무도 믿지 마”라고 진태는 엄마에게 말한다. 그건 <마더>를 보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당부하고 싶다. 부디, 아무도, 믿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