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게임에 비유해야 할까,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견해야 할까. 조민호 감독의 어드벤처 스릴러 <10억>은 관객에게도, 그리고 배우들에게도 짜릿한 도전이다. 여기서 박해일과 신민아는 제각기 차갑거나 뜨거운 온도로,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여준 적 없던 새로운 면모를 쏟아냈다.
<10억>의 박해일
“<극락도 살인사건>을 찍었던 가거도와 <10억>을 찍은 호주의 퍼스(Perth)는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여기서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섬을 떠날 수가 없다. (웃음)” 바다와 사막과 밀림과 강이 이어지며 섭씨 40도의 더위와 0도의 추위가 하루에 공존하는 곳, 퍼스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인천공항에서 싱가포르를 경유, 호주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도 뻑뻑한 봉고차에 전부 끼어타고 여섯 시간을 더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악전고투를 거쳐 조민호 감독의 <10억>이 완성됐다. 박해일은 단호하게 말한다. “짧은 시간, 빠듯한 제작조건 아래에서 인적 자원 하나만으로 최대치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짧았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더 많이 생겼던 것 같다.”
<10억>은 영화를 직접 보기 전까지 한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 없다. 10억 상금 서바이벌 게임쇼에 수십만명이 신청하고, 그중에서 단 8명의 참가자만이 호주로 초대된다. 그러나 곧, 이 게임쇼의 목적이 ‘이기는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상금을 차지하는 무시무시한 함정이었음이 밝혀진다. 여기에는 미스터리와 스릴러, 성장영화, 청춘물의 공식이 골고루 섞였으며, 장르적 공식을 조금씩 뒤틀면서 예측 불허의 스토리 진행을 해나가는 엇박자의 즐거움이 있다.
박해일은 이중에서 냉소적인 다큐멘터리 PD 한기태를 연기했다. 언뜻 <질투는 나의 힘>이라든가 <살인의 추억> <극락도 살인사건>의 역할들이 겹치는 듯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 너머로 사연을 감춘 듯한 모호한 눈빛, 한기태는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클로즈업 장면들은 대체 이 사람이 상대방을 도와주려는 건지 아니면 해를 끼칠지 불분명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몇초간을 보여준다. 박해일은 처음부터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밝힐 수 없는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외부의 고난뿐 아니라 내면적 고뇌까지 끌어안아야 하는 기태의 내면을, 비밀스러운 속내를 자신으로부터 길어내려고 노력했다. “속도감 있게 찍는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배우가 최대한 자기 것을 활용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걸 뜻한다. 조민호 감독님 역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역할과 겹치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기태와 내가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10억>의 촬영은 예상을 뛰어넘는 고난의 연속이자 의외의 행복이었다. 박해일은 “내 팔자가 워낙 고생하는 영화들만 하게 돼 있다”고 푸념하다가도 “결국엔 즐겁게 버텨냈다”라며 웃었다. 그러니까 조민호 감독이 원했던 대로, 배우들은 촬영에 필요한 일체의 육체적 훈련을 따로 받지 않은 상태로 상황에 ‘내던져졌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배역처럼 특정 미션을 매일매일 완수해야 했다. 디지털 테크닉이 최소인 채 배우들이 전부 카메라 앵글을 채워야 하는 쉽지 않은 도전, 보는 이에게 배우들의 물리적 고통이 생생하게 전달될 만큼 그들의 수고는 그야말로 ‘리얼리티 쇼’를 방불케 한다. “촬영 준비하면서 카누 만드는 법을 대충 배웠다. 그리고 숙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카메라가 돌아갔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완벽한 매무새가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연기가 어설픈 것과 상황이 어설픈 건 다르다. <10억>에선 어설픈 상황이 그대로 담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감독님 또한 매끈하게 흘러가는 걸 워낙 경계하기도 했고. 다른 동료들로부터도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발산하는 순간이 느껴질 때는 정말 짜릿했다.”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관객과 처음 만난 이후 이제 9년째다. 초반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갈 무렵 주변에서 ‘다양한 걸 경험하는 게 좋다’고 충고할 땐 그런가보다 했다. 이제 와서는 ‘넓어지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부분들을 깊이 파들어가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슬슬 들고 있다고 했다. “무모하다고 하겠지만, 그쪽이 더 깊이가 생기지 않을까.” 그 고민은 <10억>을 지나 지금까지 ‘박해일표 이미지’의 집대성이자 업그레이드 버전임을 예감케 하는 차기작 <이끼>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엄청난 밀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척 힘들 것이라는 정확한 예감, 전투가 시작될 것이라는 각오”로 그의 몸은 진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