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괜찮다고 말해요
2009-07-23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레인>의 자연에 비친 아녜스 자우이적 관계의 기상도

‘성공한 여성’의 표본 아가테 빌라노바가 젖은 셔츠 사이로 하얗고 긴 팔을 내민 채 식탁에 앉아 있다. 유독 하얀 팔이 돋보이는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치 <최후의 만찬> 속 예수처럼 시퀀스 전체의 균형을 잡는 한 여성을 비춘다. 긴 팔, 마치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이 중심에 아녜스 자우이가 앉아 있다. 화가의 인상을 통해 실제보다 더 늘어난 팔의 길이가 어색하지 않은 세잔의 그림마냥 아녜스 자우이가 스스로 분한 ‘아가테’의 캐릭터는 영화에서 묘한 자신만의 균형을 이룬다. 그녀의 일상은 어느 부분은 과장되고 늘어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 놀라우리만치 안정적이어서 기이하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일상이 솟아나다

<레인>은 대사에 초점이 맞추어진 영화지만 그렇다고 딱히 인물에 중심을 두지는 않는다. 알다시피 영화는 알피유 지역의 작은 호텔에서 시작된다. 비오는 날 그곳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느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 톰 행크스를 미국 중산층의 아이콘이라 부른다면 이 남자-장 피에르 바크리는 프랑스 중산층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연기한 ‘미셸’ 옆엔 그를 돕고자 나선 자멜 드부즈-북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 2세 ‘카림’이 있는데, <아멜리에>를 통해 해외에서도 유명해진 이 배우는 프랑스의 유명 앵커 멜리사 도리오와의 결혼이 일러주듯 조금 유별난 성공 스토리가 있다. 실제로 모로코 이민 2세이고 말을 더듬지만 묘하게 성공했고 또 굉장히 파워있는 그에게 카림은 적역인 듯 보이는데, 아무튼 이 두 사람이 비를 맞으며 아가테를 자신들의 다큐멘터리에 끌어들일 궁리를 한다. 하지만 아가테, 이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인 아가씨는 조금 다르다. 파리를 떠나 잠시 고향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미셸과 카림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계획에 차질을 빚는데, 그 결과 그녀는 비에 흠뻑 젖어버리고 만다. 야만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팔을 들여다보는 이방인의 시선, 그리고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로 둘러앉은 이들의 모습은, 어느 순간 인간이 불안의 시간을 지나 자신을 꼬집으며 변화를 경험할 바로 그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화 <레인>이 지향하는 변화의 시간이다. 바라보되 시선의 방향이 다르며, 같이 있되 각자의 카테고리에 갇힌 인간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절망적인 시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레인>은 오히려 긍정의 빛으로 가득 찬 영화다.

<타인의 취향> 혹은 <룩앳미>가 그랬듯 자우이의 최근작은 타입화된 인물들이 얽혀 실소를 자아내는 상황을 만들고 사건을 발전시킨다. 자우이-바크리 커플은 언제나처럼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대사로 채우는데, 그러니 이들 영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대신 상황을 이끄는 대화에 집중하자.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레인>의 시나리오를 쓰며 자우이와 바크리는 7, 8개월을 하루 15시간 이상 맹렬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이들은 상대방의 대사에 자신의 대사로 응수했고, 또 상대의 생각에서 응집된 일상적 순간을 끄집어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이 <레인>의 작은 우주다. <한여름밤의 꿈>이 생각나는 이 따스한 희극은 따라서 자우이의 전작들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순 없다. 냉소적 유머로 점철된 <룩앳미>를 상기할 때 <레인>의 마무리는 오히려 <러브 액츄얼리>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결과가 성공적이라 단언하긴 어렵겠지만 더욱 따스해졌단 인상만큼은 확실히 성공했다. 게다가 이런 시선은 비내리는 과정뿐 아니라 비가 온 뒤의 상황이 더 중요하다는 역설을 일깨운다. 여기에 원제 <비에 대해 이야기해줘>가 가세해 리드미컬하게 주제를 강화한다.

‘비에 대해 말해줘’란 문구는 조르주 브라상의 노래 <폭우>(L’orage)에 나온 가사다. 전후 샹송을 대표하는 남부 출신의 가수가 부른 이 노래는 영화의 주요 장면, 특히 비가 내리는 부분의 정서와 정확히 일치한다.

스크린에 가득한 남프랑스의 정서

사실 ‘비’를 그린 영화가 남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왠지 수상쩍다. 프랑스 남부는 비가 귀한 곳이고 그곳의 정서는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배경이 아니라 주제를 바라보게 되는 것, 한여름의 바캉스, 유독 꿈결 같은 이 시간을 비와 함께 노래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흥겹고 또 주목해야 한다. 영화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잠시 비가 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번민과 불안을 행복으로 바꾸는 폭우에 집중하는데, 여기에 덧붙여 화면 곳곳에 숨은 남프랑스의 정취를 읽는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전경을 비추는 앵글이나 소품을 통해 알 수 있듯 고흐의 생 레미 시절, 혹은 세잔의 프로방스 화랑을 떠올릴 때 기억나는 회화의 이미지가 영화 속 배경에 겹친다. 세 사람이 함께 오른 산봉우리는 생 빅투아르 산 혹은 생 레미의 산을 떠오르게 하고, 앞서 말한 흰 팔 외에도 농부의 집에서 쏟아지는 사과의 이미지는 세잔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프로방스 특산 로제와인이 더해지며 스크린은 남프랑스의 정서로 가득 찬다. 자칫 무거워질 만한 주제를 경쾌하게 만든 밑거름인 이 전경은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의 촬영 뒤 왜 존 말코비치가 액상-프로방스에 자리를 잡았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괜찮아’란 대사를 자연스럽게 내뱉게 하는 자연의 힘, 이는 ‘미무나’의 모습과도 겹치는데 그런 면에서 그녀는 자연을 닮았다.

중산층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레인>은 <여름의 조각들> 같은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 <악의 꽃> <8명의 여인들> 등 극단적 성향의 영화가 더해진다면 이 리스트는 훨씬 풍요롭겠지만 여기서 멈추고,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둔 자우이의 언어유희에 대해 잠시 살피자. 처음부터 끝까지 <레인> 속 공기의 경쾌한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반면 사회의 동일 계층을 다룬 다른 영화 <히든>에서 ‘지식인의 불안’은 엄숙하고 삼엄하기만 한데, 이에 비해 자우이의 캐릭터가 불안을 느낄 때 그들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 선에서 머쓱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돌이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당연하게 만든 가벼운 대사의 주고받음, 아녜스 자우이적 관계의 기상도는 아무리 그 관측이 우울하다 할지라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일러주는 듯하다. 비갠 뒤의 오후, 분명 다시 밝아질 것임을 그녀는 말한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일어나면서 우리가 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이제 명확해졌다. 비는 곧 멈출 것이란 사실, 명쾌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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