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동시에 대중영화의 단련된 장인인 마이클 만이 매력적인 갱스터영화 <퍼블릭 에너미>를 만들었다. 마이클 만이 대공황 시대의 갱단을 주인공으로 갱스터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쏟을 만하다. 그의 영화세계 안에서 <퍼블릭 에너미>는 과연 어떤 자리에 놓인 것일까. 그가 역점을 둔 건 무엇일까. <퍼블릭 에너미>의 매력을 탐구해본다. 더불어 오랜만에 찾아온 갱스터영화를 계기로 1930년대를 풍미한 실제 대도적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갱스터영화의 지칠 줄 모르는 매혹의 계보를 정리해본다. 잊을 수 없는 두 갱스터 스타 제임스 캐그니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배우론까지 읽는다면 당신은 이미 갱스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W. S. 반다이크가 연출하고 클라크 게이블이 출연한 1934년작 갱스터영화 <맨해튼 멜로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블래키(클라크 게이블)가 사형대로 향하며 주지사인 그의 동생(윌리엄 파웰)에게 쓸쓸하고도 매력적인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끝난다. 블래키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명령하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주지사 동생에게 괜찮으니 어서 사형장으로 가자고 스스로 재촉한다. 클라크 게이블이 분한 블래키라는 이 역할은 영화 속에서 그가 저지른 범죄나 패배에도 어딘가 시대의 법 집행을 향해 당당하게 대응하는 면모가 배어 있다. <맨해튼 멜로드라마>의 이 주인공이 1930년대 초 당대를 휩쓸던 전설의 은행강도 존 딜린저에게서 큰 영감을 얻었다는 지적이 많은데 마이클 만 역시 그렇게 믿고 있다. “존 딜린저는 굉장한 민속 영웅이 됐고 당시 할리우드는 그들의 캐릭터화에 딜린저라는 인물의 어떤 면모를 각인해 넣기 시작했다. <맨해튼 멜로드라마>는 ‘딜린저식’이었다! 이건 정말 기이한 고리다. 그가 영화를 베끼자 할리우드는 영화를 베낀 그를 베꼈던 것이다.” 미국의 대공황기란 현실의 갱스터와 할리우드의 갱스터영화가 서로를 베끼는 데 매혹되어 있던 때였다.
갱은 영화를 베끼고, 영화는 갱을 베끼고
마이클 만의 새 영화 <퍼블릭 에너미>에는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맨해튼 멜로드라마>를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1934년 7월22일 바이오그래피 극장. 갱스터영화를 즐겨보고 더군다나 클라크 게이블을 좋아했던 존 딜린저는 쫓기는 위협 속에서도 극장을 찾아 <맨해튼 멜로드라마>를 보았고 극장 문을 나서자 수사국 요원들의 총에 사살됐다. 그로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갱스터영화를 본 것이며 더구나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을 본 것이 됐다. 영화 속 블래키의 죽음을 잔영으로 안고 극장을 빠져나오던 그때 존 딜린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 몇분 안에 은행을 털지만 그곳에 있는 시민의 돈은 빼앗지 않고 여성 인질 앞에서는 절대로 욕설을 쓰지 않으며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도 호방하게 검사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었던 대공황기의 대도. 어쩌면 영화를 현실로 착각한 사내. 마이클 만이 미치광이 같은 삶을 산 공황기 대도적의 삶을 놓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실화를 조사하여 글로 써낸 브라이언 버로의 논픽션 <공공의 적들: 미국의 최대 범죄증가와 FBI의 탄생>을 원작으로 삼았다. 마이클 만에게 오기 전 이 논픽션에 먼저 관심을 보인 건 HBO였다. 책이 출판되기도 전이었지만 버로의 리서치를 토대로 텔레비전 시리즈를 완성하자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끝내 실패했다.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를 만들기 전 이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하여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위해 일하던 사립탐정의 이야기를 구상했다(<퍼블릭 에너미> 역시 주인공으로 조니 뎁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갔다는 말이 있지만 마이클 만은 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당대의 또 다른 열차 및 은행 강도 앨빈 카피스에 관해 오래전 각본을 쓴 적도 있다. 또 1970년대부터 존 딜린저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 그가 버로의 원작을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버로가 마이클 만의 제안을 듣고 가장 끌렸던 건 존 딜린저의 러브스토리가 영화의 한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범죄의 시대, 전설의 갱단, 무법의 반영웅, 그의 사랑, 그의 파멸의 이야기가 마이클 만 식으로 완성된 것이다.
반영웅적 행위에 대한 우아한 환상
영화는 존 딜린저(조니 뎁)가 무법천지로 은행을 털다가 쇠락해가는 흥망성쇠의 몇 개월을 보여준다. 문득 클럽에서 코트를 받아주는 아가씨 빌리 프리쳇(마리온 코티아르)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FBI의 전신인 수사국(Bureau of Investigation)에 “공공의 적 1호”로 지목된 뒤 쫓긴다. 국장 에드거 후버(빌리 크루덥)는 냉철한 요원 멜빈 퍼비스(크리스천 베일)에게 존 딜린저 사건을 전담시킨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신처를 옮겨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던 존 딜린저 일당은 조금씩 수사의 압박을 느끼며 동료를 잃고 궁지에 몰린다. 조니 뎁, 마리온 코티아르,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는 각자의 명성에 걸맞게 흠잡을 데가 없다. 조니 뎁은 외양뿐 아니라 연기에서도 할리우드 갱스터 주인공의 거칠면서도 중후한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마리온 코티아르는 <라비앙 로즈>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하층민 여성의 단단한 면모를 완성해낸다. 크리스천 베일은 어쩌면 <배트맨>보다 멜빈 퍼비스(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이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어 창조됐다)에 더 어울려 보일 정도다.
정교한 구축과 훤칠한 이음으로 빛이 나는 장면들도 많다. 오티스 테일러의 노래 <텐 밀리언 슬레이브>가 울리며 멜빈 퍼비스가 범죄자 프리티 보이를 사살하는 장면, 같은 음악이 흐르며 존 딜린저 일당이 은행 안으로 들어가 총을 뽑아들고 은행을 터는 장면은 말 그대로 활극적인 위용을 뽐낸다. 혹은 자신을 잡으려는 경찰국 안으로 들어가서는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듣는 경찰관들을 향해 “지금 몇 대 몇이냐”고 점수를 묻는 장면에서는 음악과 연기와 카메라의 움직이는 속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어떤 반영웅적 행위에 대한 우아한 환상의 쾌감을 실어준다.
그런데 의외로(?) <퍼블릭 에너미>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존 딜린저라는 악당이 있었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며 그를 시대의 적으로 삼아 처단하려는 정부의 집행이 있었고 그는 결국 패배했다는 진술 이외에 더 덧붙일 만한 것이 실은 없다. 아니 마이클 만의 영화는 처음부터 복잡한 이야기에 기대오지 않았으며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많은 걸 걸어왔다. 그의 영화 중에서 그나마 가장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췄다고 할 만한 <맨 헌터>나 <히트>, <콜래트럴>에서조차 대개 독보적인 장면은 그것의 서사화보다 심리적 긴장감이 돌출되는 순간들이다(그의 영화에서 종종 아주 긴 대화신이 그 자체로 긴장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마이클 만이 <퍼블릭 에너미>에서 좀더 주목하는 것이 있다면, 혹은 좀 더 치중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인 것 같다. 그의 관심은 파멸하는 남자들의 심리를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심리를 어떻게 육체를 통해 묘사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게 <퍼블릭 에너미>의 새로운 성취점이다.
지금 그곳에 ‘입회해 있는 카메라’
“갱스터영화의 궁극적인 갈등은 갱스터와 그의 환경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갱스터와 경찰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갈등은 갱스터 자신 내부 속의 모순되는 충동에 있다. 이런 내적인 갈등- 개인적인 성공과 공동선 사이, 남자의 이기성과 공동체의 본능 사이, 야만성과 이성적인 윤리 사이- 은 사회에 투사된다”고 영화사가 토머스 샤츠는 말한 적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마틴 스코시즈의 많은 갱스터영화들에도 충분히 적용된다.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는 토머스 샤츠의 말의 영화화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혹은 마이클 만의 몇몇 영화는 그 말에 충분히 화답한다. 하지만 <퍼블릭 에너미>는 개인 내부의 비틀린 심리적 좌충우돌을 다루되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 짓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카메라에 담는가, 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때 데뷔작 <도적>에서는 거친 욕망으로 엿보였고 <히트>에서는 잘 짜인 이야기와 어울렸고 <알리> <인사이더>에서는 심리극과 어우러졌고 디지털을 만난 뒤 <콜래트럴>과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분명해진 그것, 좀더 가까이 인물들의 그 자리에 있으려는 카메라의 욕망이 <퍼블릭 에너미>에서 정점에 이른다. 디지털로 갱스터의 심리극을 만든다고 할 때 마이클 만이 영화 속 육체와 사물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한눈에 드러난다. 이를테면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편집장 닉 제임스는 <퍼블릭 에너미>를 가리켜 “디지털 베리테”라는 표현을 쓰며 “심지어 주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는 만의 기준을 따라 훨씬 감소됐다”고 지적하는데, 그만큼 육체의 묘사쪽으로 더 과감하게 기울었다는 말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적 환경을 거의 끌어들이지 않고 오로지 주인공이 처한 그 자리의 환경에 집중한다.
마이클 만은 그러므로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를 일부분 저버린다. 미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갱스터무비가 만들어진다고 할 때, 그 시대를 풍미한 은행 갱단의 삶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고전적으로 풍요로운 비극의 서사시를 보고 싶어 하는 기대가 있다. 그걸 보는 쾌감을 어떻게 마다할까. 마이클 만은 그런데 <퍼블릭 에너미>에서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초대하는 것 같다. 지금 그곳에 ‘입회해 있는 카메라’. 이 점에 그는 온 힘을 쏟는다.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카메라는 시대의 전반을 말할 만큼 전지적이지 않으며 전지적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더 구체적이고 육체적이며 신랄하다.
올해 가장 중요한 영화일지도…
“나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가치있는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존 딜린저)를 조종한 심리, 특정한 시대의 심리에 관심이 있었다.” 마이클 만의 이 말은 그가 인물의 심리묘사에 여전히 매진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1930년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퍼블릭 에너미>를 만든 그의 방식의 적극적인 변호가 될 것이다. 도덕을 거부하고 심리를 그리되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그들의 육체 옆에 카메라가 있음으로써 심리가 드러나게 하는 방식. 그것에의 재현이 아니라 ‘체화’에 매진하는 디지털-갱스터영화. 이 때문에 <퍼블릭 에너미>는 더할 나위 없이 건조한 갱스터영화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다만 그 매혹의 건조함을 근거로 말한다면, <퍼블릭 에너미>를 올해의 영화 중 가장 중요한 한편으로 예고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