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직후부터 미국 언론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놀라운 걸작’이거나 ‘SF의 미래를 보여준 작품’ 등의 호평이 경쟁하듯 쏟아져내렸다. <디스트릭트9>은 과연 SF영화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일까? 일견 익숙한 플롯, 낯선 공간과 인물의 조합, SF의 진입장벽을 능란하게 조절하는 감독의 솜씨 등은 이 ‘인디 SF영화’의 장점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일까? SF작가 배명훈이 <디스트릭트9>을 꼼꼼하게 읽었다.
국내에 몇 되지도 않는 SF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자고로 SF는 참신해야 한다. 재기발랄하고 톡톡 튀며 기발하고 기상천외해야 한다. 데뷔하자마자 나의 글에는 곧 그런 수식어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발칙한 상상력’, ‘도발적인 젊은 신인’. 젊고 새롭다는 것은 언제나 좋다.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데뷔한 지 햇수로 5년이 지났을 때, 나에게는 이런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발칙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무서운 신인.’ 그렇게 5년째 신인으로 활동했다.
아마도 국내에 밀입국해서 살고 있는 외계인 숫자보다 적을 게 분명한 SF작가 중 한명으로서 말하는데, 사실 SF가 참신하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다. SF의 나이는 대한민국보다 한 세대 정도나 많아서 어떤 이상한 상황을 떠올리든 미국 어딘가에는 그것과 똑같은 설정의 글을 쓴 사람이 적어도 대여섯명은 있다. 그리고 얄밉게도 한국 어딘가에는 그 이상한 글을 읽어본 사람이 적어도 세명 정도는 있다. 무조건 참신해야 하지만 결코 참신할 수 없는 세계, 그것이 바로 SF 창작물의 세계다. 그리고 <디스트릭트9> 역시 이 참신함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대량이주, 하층계급 외계인… 새롭진 않아
<디스트릭트9>은 해외에서 이미 엄청난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그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외계 비행선, 그 안에서 발견된 하등한 외계인, 그리고 격리 수용. 누군가는 외계인이 침략자가 아니라 소외된 계층으로 등장하는 설정이 참신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SF작가의 감각으로 판단하건대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나타났다는 설정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런 비슷한 걸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나 자신이 그 비슷한 설정의 단편을 쓴 적도 있다. 동양의 고대 왕조시대 어느 지방 중심도시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비행접시와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난 비행접시 중 어느 쪽이 더 참신할까? 내 생각에는 전자가 더 참신한데, 사실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결국 둘 다 참신하지 않은 게 되기 때문이다. SF는 종종 이 덫에 빠져서 별 의미없는 작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른 창작물도 다 그렇겠지만, 참신함에 대한 평가가 작품성에 대한 평가를 대체할 정도로 참신함이 유난히 강조되는 SF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더 자주 발생한다. 그런 사정을 아니까 하는 말이다. 5년째 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SF작가의 결론은 이렇다. “이런 영화가 어떻게 새롭지 않을 수가 있지?”
<디스트릭트9>의 매력은 설정의 간단명료함에 있다. 영화의 모든 설정이 ‘요하네스버그의 외계인’이라는 단 한마디로 요약되기 때문에 초반 진입장벽이 낮은데다 광고도 용이하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참신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설정 자체가 특이할 게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SF의 원형 자체가 원래 대량이주라고 말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외계인에 비유하는 것은 SF가 아닌 곳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상투적 비유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평범한 소재 여럿을 다룬다고 해서 그게 항상 평범한 결과에 머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외계인’은 프랑스식 코스 요리의 샐러드 자리에 들어간 백김치처럼 평범하다. 그리고 새롭다.
관건은 큰 틀이 아니라 세부 묘사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런 영화의 작품성은 참신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완성도에서 비롯된다. 이런 구조를 취할 경우 창작자가 작품의 완성도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참신함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 왕조시대 어느 지방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나타난 상황에 관한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은 쉽다. 우리는 사극을 본 적이 있고, 대도시 상공에 비행접시가 떠 있는 미국 SF영화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별로 낯설지 않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창작자는 곧바로 난관에 부딪힌다. 외계인을 상대하는 인류를 그리는 미국식의 뻔한 플롯이 중국식 고대 왕조시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대로 뒀다가는 작품성이 떨어질 게 뻔하다. 작품성을 끌어올리려면 어쩔 수 없이 창작을 시도해야 한다. 일단 서술 자체가 예스럽게 바뀌어야 하고, 고대 제국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 무렵에 간주 관찰사가 상소하여 괴물체가 민가에 앉아 사람과 재물이 상한 사정을 보고하자 임금께서 이자합이 찾아낸 것이 참으로 신통하다 하시며 장수들에게 명하여 철기창 병장고를 열고 병 2만1400명을 변방으로 보내셨다.
대장군 니금은 키가 6척 장신에 다리가 뭉툭하고 배가 불룩하여 완전히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수염이 가지런하여 장부다운 용모로 온 도성의 귀족이 흠모했다.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난 외계인을 상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괴물이 튀어나오고 어디에서 나쁜 놈이 나타나고 누가 언제 죽을지까지 화면에 빤히 나타나는 할리우드식 시선으로는 남아공 인종분리구역의 ‘행정절차’를 서술할 수 없다. 만약 관객이 요하네스버그의 인종격리구역을 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뉴스 아니면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디스트릭트9>은 정확히 그 방식으로 ‘디스트릭트9’이라는 외계인 격리구역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디스트릭트9> 초반부를 장식하는 다큐멘터리 기법이 <클로버필드>에서 본 장면과 비슷하다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개인과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아공에서는 네이비실이 투입되거나 대통령이 인류를 대표해서 외계인과의 첫 접촉에 나서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민간군사기업의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고, FBI나 CIA 혹은 MIB(Man in Black) 같은 기관의 ‘요원’이 폼나게 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소심한 주인공 비커스가 외계인들의 판잣집 문을 두드리며 이주동의서에 일일이 사인을 받으러 다녀야 한다. 진짜 창조적인 작업은 큰 틀을 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외계인의 존재가 더 전형적일수록 세부의 참신함은 빛을 발하게 된다.
국적을 바꾸니 새로운 재미가 생기네
똑같은 상황을 한국에 가져와도 마찬가지다. 미국영화에서 CIA가 하던 일을 국정원 요원이 그대로 따라한다고 상상해보자. 그 영화의 완성도는 얼마나 높을까. 만약 감독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 있다면, 그는 새로운 디테일을 구상해야 한다. 똑같은 임무를 수행할 다른 인적자원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사회의 구조가 비틀리고, 평화로운 상황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그 사회의 뒤틀린 단면이 드러난다. <디스트릭트9>의 민간군사기업 MNU에 해당하는 폭력조직이 영화 <괴물>에서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자. 답은 주한미군이다. 만약 1980년 5월의 광주에 외계인의 모선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어떤 폭력조직이 그들을 상대했을까?
SF의 현지화는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다. 인간이 우주왕복선을 타고 대기권으로 나가는 흔해 빠진 SF 설정에서 등장인물 이름을 한국 사람 이름으로 바꾸는 단 한 가지 작업을 하기 위해, 작가는 주인공을 최소 10년간 세계 각지로 유학을 보내는 지난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디스트릭트9>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외계물질에 노출된 뒤 서서히 외계인으로 변해간다는 뻔한 설정에서 단지 주인공 이름 하나가 비커스 반 데 메르바(Wikus Van De Merwe)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해도 그 작업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또한 아무나 완성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런 현지화를 통해 미국 SF에 익숙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외계인이 꼭 하필 뉴욕 상공에 나타나서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는 설정이 보편적이고 뻔한 상황이기는커녕 너무나 독특한 미국적 시각이라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트랜스포머들이 차로 변신하는 것도 너무나 미국적이지 않은가. 한국에서라면 변신로봇들은 분명히 부동산으로 변신했을 텐데 말이다.
다시 처음에 던진 문제로 돌아가서 SF의 참신함과 식상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트랜스포머>를 본 적이 있고 외골격을 가진 외계인을 본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외계인의 형태를 쏙 빼닮은 외계인들의 거대 병기가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변신로봇들처럼 멋들어진 액션을 펼치는 장면이 상투적이고 재미없는 장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촉수가 뻗어 있는 거대 병기의 안면부는 너무나 참신한 이 영화만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SF적 원형이 <디스트릭트9>의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국 SF영화다. 남아공의 문제점을 시사하는 수많은 단면들이 노출되기는 하지만 닐 블롬캠프 감독은 결국 액션과 볼거리에 충실한 대중영화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다. 또 다른 비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SF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이 점은 전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블롬캠프 감독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으로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를 선택하지 않았다. <디스트릭트9>의 힘은 SF적인 원형에서 나오고 있다. 캐릭터 개인으로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모자란 주인공 비커스는 민간군사기업을 등에 업고 관료주의적인 방식의 권력을 통해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힘으로 내리누른다. 그리고 외계물질에 접촉하면서 그 힘을 상실한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나약한 개인이 강인한 육체를 얻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적들을 좀더 강한 힘으로 제압하는 과정으로, 바로 이 뼈대가 광고에는 나오지 않는 이 영화의 진짜 플롯이다.
(스포일러 주의!) 이 과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비커스는 결국 완전히 외계인의 모습을 띠게 되고, 그를 구하기 위해 ‘3년 뒤에’ 크리스토퍼와 외계인 군대가 지구로 돌아올 것이다. 즉 원래 속해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돌아간 다음, 변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속하게 되는 SF 특유의 가슴 벅찬 구조가 이 영화를 배후에서 떠받치고 있다는 말이다.
비록 크리스토퍼가 약속한 ‘3년 뒤’가 끝내 실현되지 않는 바람에 속편 소식을 기웃거리게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감독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참신하든 식상하든 상관없이 아무튼 재미있는 SF 한편을 보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