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도취의 영화, 도발의 예술
2009-12-09
글 : 홍성남 (평론가)
‘어느 사랑의 노래: 장 콕토·장 주네 특별전’ 12월15일부터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다양한 예술 분야를 탐했던 ‘르네상스 맨’ 장 콕토의 위대함은 영화예술로 인해 더 빛날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그는 영화가 조금 더 위대한 매체가 되는 데 기여했다고 이야기된다. 그런데 그는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조차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예술 활동을 시의 이름 아래 통합하려 했던 그는 무엇보다도 시인이었다. 시인의 표현력과 에너지, 유희 정신을 동원해 카메라를 가지고 관객의 눈과 귀를 자극할 몽환적인 시를 쓴 이가 콕토였다. 장 주네는 콕토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 지성들이 문학적 천재 혹은 성인이라고 칭송한 인물이다. 그의 세계에서 키워드가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구원인데, 흥미로운 것은 순수함의 환상을 없애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야수적인 면을 껴안음으로써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처럼 위반을 찬양하는 태도로 인해 그는 이후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서울퀴어아카이브에서는 콕토의 대표작과 주네와 관련된 영화들을 상영하는 자리를 갖는다. 콕토의 ‘오르페우스 3부작’과 주네가 만든 <사랑의 찬가> 등 모두 9편이 상영되는 ‘어느 사랑의 노래: 장 콕토·장 주네 특별전’은 ‘도취’와 ‘도발’의 영화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다(12월15일부터 2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

시인의 피
Le Sang d’un poete | 감독 장 콕토 | 1930년 | 흑백 | 50분

“물속에 빠지면 수영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수영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야 영화의 세계로 진입한 장 콕토는 영화예술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당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비유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영화의 테크닉과 스타일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가 돌아갔던 것은 해맑은 동심(童心)이었다. 콕토는 자기에게 주어진 장난감을 가장 유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슬로모션, 리버스 모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을 활용하면서 이 영화의 ‘아마추어’는 영화에다 꿈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몽환적인 세계를 구축해놓는다. 영화는 그 세계 속에서 경험하고 관찰하는 기이한 에피소드들을 보여준다. <시인의 피>를 통해 콕토가 무언가 정확한 분석을 행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우리는 이 영화에서 스스로의 삶을 비춰보고 여하한 ‘상처’ 혹은 죽음과 창작과정의 관련성을 질문하며 시인의 처지를 숙고하는 콕토의 존재를 본다. <시인의 피>는 콕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는 여러 모티브나 아이디어 측면에서 그의 나중 영화들의 스케치를 제공한 영화로, 영화사적으로는 이후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ete | 감독 장 콕토 | 1946년 | 흑백 | 94분

장 콕토에게 18세기의 동화를 영화로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한 사람은 콕토의 연인이자 그의 중요한 협력자인 장 마레였다고 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콕토는 <시인의 피> 이후 대략 16년 만에 영화의 땅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영화 가운데 (최고작인지 여부는 상관없이) 가장 사랑받게 될 작품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이야기는 우리도 이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건 끔찍하게 생긴 야수와 함께 지내게 된 벨이 결국에는 그에게 끌리게 되고 마법이 풀린 그와 결합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콕토는 이 이야기에다 동화적 상상력을 제대로 불어넣는다. 결국 콕토의 <미녀와 야수>는 세트, 의상, 촬영 등의 요소가 훌륭하게 어울린 리얼한 영화적 동화가 되었다. 이와 함께 <미녀와 야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야수에 대한 콕토의 태도와 묘사다. 그는 털이 얼굴을 뒤덮고 있고 송곳니가 삐죽 나온 야수를 매력적이면서도 공감이 가게 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영화에서 벨이 야수의 슬픈 눈을 볼 때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에게도 보일 정도이다. 콕토는 종종 시인 폴 엘뤼아르가 <미녀와 야수>에 대해 이야기했던 말로 자기 영화를 정의하곤 했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자동차보다는 개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오르페우스
Orphee | 감독 장 콕토 | 1950년 | 흑백 | 95분

<오르페우스>는 주지하다시피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콕토의 영화에서 이 이야기는 현대로 자리를 이동한다. 당연히 영화는 현대적 복장을 한 인물들에 대한 멜로드라마이자 미지의 세계를 통과하는 스릴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적이거나 마술적인 요소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사후 세계나 ‘죽음’ 같은 요소들이 지하 세계나 팜므파탈 같은 다분히 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콕토는 “미스터리에 더 가까이 갈수록 리얼리즘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르페우스>는 구체성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비합리의 세계를 그려낸다고 하는 콕토의 이같은 원칙을 예증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르페우스>는 콕토가 평생 매혹되어 있던 주제를 잘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가 이야기하길 시인은 일련의 죽음을 겪고 난 뒤에야 진짜 자신에게 더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시인의 피>가 그 주제를 이야기하는 영화이고, <오르페우스> 역시 그런 영화이기에 두 영화는 20년의 격차를 두고도 관련을 맺는다. 다만 20년 전에는 그 주제를 한 손가락으로 연주했을 뿐이지만 이제는 합주를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콕토는 말했다.

케렐
Querelle |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 1982년 | 컬러 | 106분

영화에서 잔 모로가 맡은 유일한 여성 리지안은 주인공 케렐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장 주네의 소설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역시 자신의 영화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주네의 소설에 감화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파스빈더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연히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성장영화가 아닐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아름다운 선원인 케렐은 살인을 저지르고, 그 구실을 찾기 위해 생전처음 동성 섹스를 함으로써 고통받으려 하지만 도리어 쾌락을 느끼고, 연인을 고발함으로써 구원을 찾으려 한다. 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려 하는 주인공 주위로 다른 사람들을 배치해 영화는 욕망과 착취의 그물을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 파스빈더는 더블의 문제, 형제와 연인, 배신과 부인이 어지럽게 뒤섞인 도발적인 게임을 실행한다. <케렐>은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의 축조 방식으로도 보는 이의 눈길을 끄는 영화다. 파스빈더는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인공성이 두드러지는 세트를 만들어놓고는 그 위로 해질녘의 색조를 드리운다. 이것이 이 파스빈더의 마지막 영화에 퇴폐적 관능성을 더해준다.

포이즌
Poison | 감독 토드 헤인즈 | 1990년 | 컬러/흑백 | 85분

토드 헤인즈의 데뷔작 <포이즌>은 미국 개봉 당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보수 인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오히려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위반적인 태도를 껴안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영화의 한 에피소드가 장 주네의 <도둑 일기>에 기초한다는 점 말고도) 바로 그런 점에서 장 주네의 정신과 동조하는 도발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형식 면에서도 대단한 야심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세개의 상이한 이야기 가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창밖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린 일곱살 어린이의 이야기, 자신이 개발한 성 충동 혈청을 마시고 전염성의 괴물이 된 과학자의 이야기, 동료 수감자에게 매혹되는 수감자의 이야기가 서로 꼬여 있는 형태로 영화가 전개된다. 양식상으로도 구분되는 (가짜 다큐멘터리, 50년대식 SF, 어두운 감옥 드라마) 세 이야기들은 별 관련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깊이 살펴보면 그것들은 모두 주위로부터 버림받고 ‘괴물’ 취급을 받는 사람들, 그들의 폭력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죽음을 다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포이즌>은 이 세계가 어떻게 위반과 일탈을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박해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영화적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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