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이 로알드 달의 <멋진 여우씨>를 원작으로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만들었다. 독창적인 두 예술가가 왜 이제야 만났냐고 항의라도 하고 싶다. 이 기묘하게 우아하고 기겁하게 웃긴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은 지금껏 만들어진 가장 훌륭한 로알드 달 원작 영화인 동시에, <러쉬모어>에서 <다즐링 주식회사>까지 이어져온 전형적인 웨스 앤더슨표 영화다.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10 영화 중 한편인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는 12월24일 개봉한다. 대체 웨스 앤더슨이 어떤 물건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버린 것인지 프로덕션의 뒷이야기들을 캐내봤다.
로알드 달의 아동용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를 보며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왜 로알드 달의 책들이 아동용 코너에만 놓여 있는 거지? 생각해보라. 로알드 달의 몇몇 소설은 주인공 아이의 부모가 죽으면서 시작한다. 곱게 죽는 것도 아니다. 동물원에서 도망친 코뿔소에 받혀 죽고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홀로 남은 아이들은 이 짐덩이를 얼마나 빨리 죽일 수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 학대하는 친척이나 학교에 맡겨진다. 아이의 부모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들은 천박하고 비열한 인간 말종이거나 가난하고 무능력해서 아이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인간들이다.
지금 로알드 달의 소설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이야기하는 거냐고? 그럴 리 있겠는가. 로알드 달 소설은 특유의 잔인한 유머감각과 현실감각 덕분에 아동문학으로서 불멸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로알드 달의 주인공들은 잔인한 세상의 뻔뻔한 속성에 부딪히며 한 단계 성장해나가는 인물들이다. 전세계 아이들이 로알드 달의 책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아이들 역시 세상의 진실이 담겨 있는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물론 그에 동의하지 않는 부모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고, 덕분에 로알드 달은 여전히 가장 논쟁적인 아동 문학가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갈가리 찢어진 가족들의 관계에 대한 우화
<멋진 여우씨>(한국 출간 제목) 역시 로알드 달스러운 기운이 짐짓 서려 있는 걸작 중 하나다. 세 명의 농장주가 닭과 오리를 훔쳐가는 여우를 씨까지 말려 박멸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거대한 굴착기로 여우굴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영리한 여우는 죽을힘을 다해 굴착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굴을 판다. 언제나처럼 <멋진 여우씨>는 여우씨의 멋진 승리로 끝난다. 주제를 아동문학평론가처럼 정리하자면 ‘무능력하고 권위적인 자본가 어른에 대항하는 아웃사이더들의 승리’ 정도가 될까. 성인 세계와 사회적 규범을 향한 로알드 달식의 조소는 비교적 짧고 간결한 <멋진 여우씨>에서도 근사하게 살아 있다. 이쯤되면 덜 자란 어른이 등장하는 영화를 줄곧 만들어온, 어딘가 좀 덜 자란 어른 같은 웨스 앤더슨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선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텍사스 휴스턴(그렇다. 그는 날 때부터 뉴요커 여피는 아니었다)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로알드 달의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처음으로 읽었단다. “그건 제가 처음으로 읽은 로알드 달 소설이었고, 제가 난생처음으로 가진 제 책이기도 했어요.” 그가 어린 시절 이 책에 푹 빠진 이유는 “영웅적이고 약간은 허영심이 있는 미스터 폭스란 캐릭터가 정말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흠. 아무리 조숙한 아이었기로서니 캐릭터가 영웅적이고 약간은 허영심이 있어서 좋아했을 리는 없고, 진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저도 땅파는 걸 좋아했어요. 제 형제들은 땅속 세상, 터널, 요새 같은 것에 푹 빠져있었거든요.” 이것도 정말 웨스 앤더슨답다. 그가 <스티븐 지소와의 해저생활>과 <다즐링 주식회사>를 만들었던 진정한 이유가 기억나시는가. 그는 오로지 ‘잠수함’과 ‘인도의 기차’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고 싶었을 따름이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멋진 여우씨>는 장편영화로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간결하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나 <마틸다>처럼 각색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낼 만큼 충분한 이야기의 결이 <멋진 여우씨>에는 그닥 많지 않다. 웨스 앤더슨은 “그 때문에 새로운 창작작업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로알드 달의 창작물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로알드 달이 직접 생각해낸 것 같은 유머를 만들어낼 순 없겠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개성을 부여해야 했어요. 결국 우리의 목표는 로알드 달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었죠.” 그럼 웨스 앤더슨이 원작의 핵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뭘 했느냐. 그는 새로운 캐릭터를 더하는 동시에 미스터 폭스와 동물들을 좀더 인간답게 의인화했다. 바뀐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미스터 폭스 부부(조지 클루니와 메릴 스트립)은 아들 애쉬(제이슨 슈워츠먼), 어린 조카 크리스토퍼슨(웨스 앤더슨 감독의 동생인 에릭 앤더슨)과 함께 멋진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지역 동물신문의 기자로 일하는 미스터 폭스는 지난 12년간의 삶이 여우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는 로알드 달과 똑같은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바로 앞 문단의 문장을 좀 바꿔야겠다. 웨스 앤더슨은 동물 캐릭터를 인간답게 의인화한 게 아니라 아예 웨스 앤더슨 스타일의 인간으로 바꿔버렸다. 주인공 미스터 폭스는 이제 중년의 위기를 극복해보려 노력하는 중년의 지식인 가장이다. <스티븐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스티븐 지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로알드 달의 원작에서 미스터 폭스에게는 네 마리의 이름없는 새끼들이 있다. 앤더슨은 네 마리 새끼를 제거하고 애쉬라는 아들을 만들어냈다. 코믹북을 좋아하는 애쉬는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는 친척 크리스토퍼슨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동시에 아빠의 기에 어쩐지 좀 눌려 있는 소심한 모범생이다. <러쉬모어>와 <다즐링 주식회사>의 제이슨 슈워츠먼이 떠오르는 이 캐릭터의 목소리를 슈워츠먼이 연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제가 연기하는 애쉬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고 아버지처럼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죠. 아버지가 절 인정해주길 바라요. 그러니까 제 캐릭터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자아를 찾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게 바로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라는거죠. 내가 다르다는 것은 바로 내가 특별하단 거예요.” 결국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이야기는 그가 모든 작품에서 반복해온 주제, 갈가리 찢어지고 해체된 가족들의 관계에 대한 우화다. 제이슨 슈워츠먼 역시 동의한다. “장르만 빌려왔다 뿐이에요. 그는 또 다른 웨스 앤더슨식 영화를 창조해냈어요.”
컴퓨터그래픽보다 스톱모션
기술적인 선택에서도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는 딱 웨스 앤더슨 영화다. 앤더슨은 처음부터 이 영화를 스톱모션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길 원했다(그는 이미 <스티븐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몇 장면을 스톱모션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바 있다). 앤더슨이 손쉬운 CG애니메이션을 제쳐두고 굳이 만들기 까다로운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선택한 이유? 제작자 제레미 도슨은 말한다. “웨스는 컴퓨터 이미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만드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스톱모션은 미적인 다양한 질감을 사용하고 디테일까지 직접 만들어야 하거든요. 웨스의 이번 작품은 디자인적인 요소가 뛰어나고 조그만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웨스 앤더슨이 컴퓨터그래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언이다. 그건 웨스 앤더슨의 친구들(새로운 단어를 하나 창조해보자면 ‘키덜트(Kidult) 감독 세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미셸 공드리, 스파이크 존즈 같은 웨스 앤더슨의 친구들은 고전적이고 물리적인 특수효과에 큰 애착을 갖는 공통점이 있는데, 말하자면 그건 이 덜 자란 남자들이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시절의 기억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했을 것이다).
심지어 웨스 앤더슨은 발전한 현대적 스톱모션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거부했다. 최근 스톱모션애니메이션들은 훨씬 정교해진 인형(Puppet) 조종 기술, 필름이 아닌 디지털 스틸카메라의 이용, 컴퓨터그래픽의 힘을 입은 후반작업을 통해 거의 CG애니메이션에 맞먹는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팀 버튼의 <유령신부>나 헨리 셀릭의 <코렐라인>을 떠올려보시라).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손으로 움직여서 만든 느낌이 강하게 드러나는 고전적인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 “저는 오리지널 <킹콩>의 모양새가 좋았어요. 킹콩의 털이 보여주는 느낌 말입니다. 애니메이터들은 그걸 보일링(끓는다)이라고 하더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야말로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마법 같은 장점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는 애니메이터들에게도 자유를 선사했던 것 같다. 대부분 <유령신부>와 <코렐라인>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스탭들의 가장 큰 근심은 제멋대로 흩날리는 캐릭터들의 털을 통제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그걸 말쑥하게 통제하는 대신 거칠게 ‘보일링’하는 고전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질감을 원했다. 애니메이션 감독인 마크 구스타프슨이 말한다. “감독은 깔끔한 화면을 원하지 않았어요. 관객이 애니메이션의 질감과 작동법을 알아챌 수 있기를 원해요. 절대 CG애니메이션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애니메이터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했던 또 다른 영화적 특징은 캐릭터의 인간화였다. 원작의 주인공들은 결코 완벽하게 인간화된 동물이 아니다. 웨스 앤더슨은 동물들을 좀더 인간에 가깝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캐릭터들이 눈을 깜빡이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애니메이터들에게 지시했다. 최근 등장한 대부분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들은 카메라가 재빨리 움직이고 클로즈업도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캐릭터가 눈을 깜빡이도록 만드는 건 필수적이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에 참여한 한 애니메이터가 말한다. “인형에게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는 눈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형이 가만히 서 있더라도 눈을 깜빡여주면 사람들은 거기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지 않으면….”(웨스 앤더슨에게 품었던 그들의 불만은 이하 삭제) 여하튼 애니메이션 감독 마크 구스타프슨은 웨스 앤더슨의 주문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전작들을 공부해야만 했다고 증언한다. “많은 것들이 실사영화 감독으로서의 웨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됐어요. 그는 마스터숏을 애호하고, 클로즈업은 최대한 간결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가까이서 찍기 때문에 눈을 깜빡이는 걸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웨스 앤더슨이 전작들과 다름없이 실사영화를 찍는 느낌으로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연출했다는 또 다른 증거다.
그 패션에 반하다
마지막으로, 역시 패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웨스 앤더슨을 비롯한 키덜트 세대 감독들은 패션에 대한 취향을 자랑스레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소피아 코폴라는 심지어 루이비통과 손잡고 백도 하나 내놨다. 이름하야 ‘소피아 코폴라 백’. 가격은 묻지 마시라. 지금 보고 계시는 잡지 1천권을 팔아도 반개밖에 못 산다). 그중에서도 웨스 앤더슨은 손꼽히는 멋쟁이다. 그는 현장에서도 디자이너 슈트와 고급 수제 구두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치장하는 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그는 각 캐릭터가 입을 의상을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부터 염두에 두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쯤되면 그가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캐릭터들을 극단적으로 인간화한 것도 원하는 의상을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의심해볼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미스터 폭스가 입는 코듀로이와 트위드 양복은 앤더슨 자신이 즐겨 입는 슈트를 그대로 축소한 의상이다. 프로덕션디자이너들의 증언도 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재단사에게 직물 견본을 얻어서 색깔을 똑같이 매치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내려도 앤더슨은 전혀 괘념치 않으리라.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인형놀이라고 말이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남자의 모든 에센스가 1/20로 축소된 세계 속에 스며든, 아주 끝내주는 인형놀이.
목소리 출연한 배우들
구덩이 파면서 목소리 녹음했지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이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는 독창적인 배우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영화다. 앤더슨은 미스터 폭스 역할로 처음부터 조지 클루니를 점찍었다고 말한다. “당연한 선택이었죠. 그는 이 역을 위해 태어났어요. 캐리 그랜트와 클라크 게이블을 합쳐놓은 배우죠. 그랜트의 예의바르고 신사적인 면과 게이블의 동물적이고 섹시한 면을 다 갖췄어요. 조지 클루니는 실제로도 닭을 훔칠 줄 알걸요.”
미세스 폭스 역은 메릴 스트립, 변호사인 오소리 역할은 이미 세편의 영화에서 웨스 앤더슨과 작업한 적 있는 빌 머레이가 맡았다. 나머지 역할들은 당연하게도 웨스 앤더슨 사단의 배우들에게 돌아갔다. 아들 애쉬 역의 제이슨 슈워츠먼, 코치 스킵 역할의 오언 윌슨, 악당 시궁쥐 역은 윌렘 데포, 카메오 쥐 리케티는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맡았다.
앤더슨은 자신과 뜻이 맞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그저 빌리는 데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좀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녹음 작업을 했어요. 배우들이 모두 모여서 즐겁게 녹음 작업을 한다면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 바깥에 있을 때와 같은 소리가 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강이 나오는 장면이 있으면 실제 강가로 가서 녹음을 했고, 지하터널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하실에서 녹음했어요.” 애쉬 역을 맡은 제이슨 슈워츠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실제로 숨이 차서 헐떡이는 것과 서로의 대사가 겹치는 것도 함께 녹음했어요. 사실 애니메이션에서는 배우들이 따로 녹음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아주 드문 경우예요. 여우들이 구덩이를 파는 장면에서 웨스는 진짜로 저희에게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