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당신이 즐긴 것은 무엇입니까? [1]
2010-01-28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나는 어째서 <아바타>에 환호하는 대신 자본을 중심으로 한 기술결정주의를 근심하게 되었는가

…(모든 글에 이어서) 결국 나도 <아바타>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다. 지금 열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영화. <아바타>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영화를 본다, 라기보다는 차라리 목격하러 간다, 는 태도로 참을성을 갖고 기다려서 3D 극장(의 중앙 뒷자리좌석)으로 향한다. 줄거리도 잘 알고 있고, 엔딩은 예상한 그대로이지만 아무도 실망을 늘어놓지 않는다. 오로지 테크놀로지의 경이를 즐기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간다. 여기에는 어떤 다른 기대도 없다. 그런 다음 갑자기 다들 영화의 미래에 대해서 찬양하거나, 혹은 근심한다. 하지만 우리는 열광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찬사와 근심의 미래로부터 간극지어진 실재의 제자리로 되돌아와야 한다.

요점은 간단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의 오래된 질문. 왜 영화는 미학이 아니라 기술이 미래를 결정짓는가? 물론 대답도 잘 알고 있다. 이 바보야, 영화는 결국 돈이 결정하는 거라고! 2억6천만달러짜리 영화와 비평적 싸움을 벌이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 나는 좀더 시간적 거리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포기했다. 이것은 나의 임무이다. 곤란한 임무. 그러나 하스미 시게히코는 단호하게 말했다. 영화가 나빠지는 걸 구경한 다음에는 세상이 나빠지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가장 따분한 비판은 저들은 그저 자본을 앞세운 (문화) 제국주의자들일 뿐이지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역겨운 찬사는 저들 없이 영화의 진화가 이루어진 적이 있나요, 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놓인 자리, 제국의 주변. 영화를 둘러싼 생산과 확산과 분배와 착취와 기만과 매혹의 여러 국면들. 그리고 비평가들의 처세술. 혹은 그들 (각자)의 비평적 전술. 대중의 환호와 일시적인 변덕. 자신의 습관적인 영화관람 행위를 전시하고 그것을 즐기는 블로거들. 자신을 갱단처럼 여기는 악동들. 비평적 테러. 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영화가 공격당할 때 전투를 불사한다. 새로운 시네필의 지도. 말하자면 영화 인텔리겐차라는 새로운 관객의 형성. 여기에서 분화되어나온 영화 룸펜 지식인들. 그들은 자신을 비평가와 동일시한다. 점점 기민하게 대처하고 냉소적으로 대꾸하는 영화담론의 ‘사이버’ 세계. 마술처럼 일시적으로 한자리로 몰려든 담론의 폭발. 하지만 이것은 좋은 결론인가? 동의하지 않는다. 자본이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논쟁이라면 이것은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새벽없는 밤을 준비하는 황혼이다. 미네르바 따위는 여기에 없다. 지칠 줄 모르는 밤. 이것은 비관주의자의 탄식인가? 포기하면 안된다. 비평이라는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영화는 주어진 선택이라는 수동적 구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라는 가련한 단서의 애처로움. 낙관주의자들도 웃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의 믿음이 사실이라면 당신들도 영화의 미래 안에서 예외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음산한 논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논의가 어쩌면 영화의 역사에서 군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바타>에 대해 지금 여기의 시장과 영화의 미래 사이에서 진행되는 우리의 비평적 담론을 방해하는가? 왜 동일한 사건이 다양성의 가면을 쓰고 핵심을 회피하게 만드는가?

3D 효과는 미래의 ‘시네마틱한’ 경험인가?

약간의 우회. 나는 지난해 12월14일 이후 모든 자리에서 내내 <아바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 자리가 공적이건 사적이건, 모임이건 두 사람의 만남이건, 강의실이건 카페이건, 눈 구경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건 눈 걱정을 하면서 술을 마시건, 내내 <아바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없었다. <아바타>는 보는 내내 지루했고, 3D 안경은 너무 불편했다. 나는 안경을 쓰기 때문에 두개를 껴야만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질문의 요지는 간단하다. <아바타>는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내 대답은 없다는 것이다. <아바타>의 줄거리는 거의 바보에 가깝다. 만일 누군가가 이 영화의 서사를 분석한다면 나는 그게 <트랜스포머>를 분석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바타>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가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스탠리 큐브릭이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그저 (스필버그의) <우주전쟁>과 비교했을 때 <아바타>는 2시간41분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평면적인 서사와 매력없는 주인공들의 신파에 가까운 멜로드라마가 진행된다.

그렇다면 <아바타>라는 태풍의 눈은 무엇인가? 당연히 3D 효과의 경험이다. 좋다. 알겠다. 하지만 왜 그 다음 질문을 하지 않는가? 3D 효과는 미래의 ‘시네마틱한’ 경험인가? 나는 <아바타>가 창조적인 예술품이라기보다는 혁신적인 발명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발명을 경험하는 것. <아바타>를 보러가는 것과 3D영화를 경험하러 가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의 차이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변증법적 긴장도 없다. 동일한 현상의 두개의 측면. 두개의 태도. 예술적 경험을 문화적 체험으로 환원할 때 둘 사이의 차이는 영화를 보는 우리의 형식적 조건들을 완전히 다른 자리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바타>를 둘러싼 비평담론들은 잠시 그 차이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구경의 덫에 걸렸다. 예술적 경험의 기쁨을 기술적 발명의 놀라움과 맞바꿔칠 때 영화관객은 감상을 포기하고 카메라의 자리에 가게 될 것이다. 내가 아니라 베냐민이 한 말이다. 이때 왜 그 경험을 갈망하고 움켜쥐려고 하는가?

여기서 신기한 것은 <아바타>를 둘러싼 대중의 열광이 아니라 비평담론의 실패이다. 나는 지금 <아바타>를 지지하느냐, 혹은 비판하느냐를 놓고 입장을 가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문제제기를 이해한다면 당신은 사태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비평이란 영화를 견딜 수 없는 관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아바타>를 둘러싼 논쟁에서 무효화되었다. 그러기는커녕 비평가들의 <아바타>에 대한 열광에는 무언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태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 3D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예언하는 일. 그러면서 한결같이 영화의 미래를 예언한다. 3D는 영화의 ‘유일한’ 미래인가? 나는 비평담론이 예언가의 역할에서 비평가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바타>를 지지하는 그렇게 많은 비평담론 중에서 ‘혁명이 찾아왔다’고 열광하는 사실상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험)의 핵심인 3D 기술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글은 정작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영화가 너무 가까이 있(거나 3D 기술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영화비평의 수사학을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아바타>의 3D 기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최양현의 글이 거의 유일했다(‘최후의 승리까지 한뼘 더 필요해’ <씨네21> 736호). 이 글에서 지적한 대로 0점 지정을 한 숏들의 패럴렉스 미장센 디자인(mise-en-parallax-scene)을 설명하지 않으면 <아바타>에서 미학적 논쟁과 경험의 미래학은 고스란히 남겨질 수밖에 없다.

3D와 2D의 영화적 경계는 어디냐

나는 종종 <아바타>를 보다가 안경을 벗었고 많은 숏들은 2D로 진행되다가 3D로 옮겨갔다(반대로 3D 화면들은 인물을 중심에 놓고 원경은 스크린 프로세스처럼 보였다). 이때 즉각적으로 궁금해진 것은 3D와 2D의 영화적 경계는 어디냐는 것이다. 둘 사이의 경계는 시선과 동선 양쪽 모두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두개의 영토. 이차원의 공간을 삼차원으로 활용하는 것과 가상 삼차원을 놓고 이차원을 배경으로 설정할 때,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오차를 만들어내는 뇌신경의 스크린에서 물리적으로 투사될 때,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무엇으로 영화와 봉합(縫合, suture)되어야 하는 것일까? 질문의 핵심은 <아바타>의 3D 프레임과 관객의 시각적 투사의 관계에서 영화를 보는 나의 자리는 어디냐는 것이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시각적 네트워크와 관객의 지각 사이의 거리(perceptual distance)를 재구성하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시청각적 기호들을 재배치할 것인가? 3D는 영화의 구성을 새로운 조합의 집합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단지 새로운 소여에 불과할 것인가? 이 질문을 과학적 용어로만 설명할 때 <아바타>의 3D 효과는 관념적 상태에 머물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을 다시 영화적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제임스 카메론과 로버트 저메키스는 어떤 다른 목표를 갖고 있는가?(이상하게도 <아바타>와 거의 동시에 개봉된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

좀더 단순하게 질문해보자. <아바타>의 표면은 3D 안에서 만들어내는 굴곡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가? 이때 표면의 맹점이라는 문제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프레임의 굴곡이 선형진행의 구조 안에서 암흑지점을 만들어내는 지점. 0점 지정의 영화에서 존재하는 것은 맹점인가, 아니면 과잉된 두개의 자리인가? 거기 있다고 가정된 대상을 정말 거기서 볼 때, 나는 이 말의 방점이 본다,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라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거기라는 지점은 이제까지 영화에서 가정하지 않았던 암흑지점이다. 3D 효과는 바로 이 암흑지점의 페티시즘에 다름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저메키스와 다른 점은 패럴렉스 디자인을 하면서 미장센을 일종의 인스톨레이션에 가까운 방식으로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임의 내용을 전시할 때 서사의 진행은 둔해지고 감정은 산만해진다. <아바타>를 보았을 때 내가 즉각적으로 느낀 것은 필요 이상으로 음악이 과잉하고, 대사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 대부분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바타>의 모든 시청각적 기호들은 지금 프레임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궁금증. 제임스 카메론은 이렇게 바보 같은 서사를 진행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바보같이 단순한 서사가 필요해진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타이타닉>을 3D로 진행한다고 가정해보자. 타이타닉이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대부분은 무효가 될 것이다. 왜? 프레임을 전시할 때 화면 안의 요소들 사이의 집합 안에서 운동과 그 관계는 정보가 된다. 감정선의 포기. 시선 네트워크의 단순화. 동선의 평면성. 영화 안에서 (마주)본다는 것과 영화 바깥에서 (쳐다)본다는 것 사이의 차이. <타이타닉>은 전자의 영화이며, <아바타>는 후자의 영화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무효라는 문제가 있다. 이때 3D의 문제점을 단지 입체효과 때문에 영화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단순해진다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가설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소박한 결론이다(더 한심한 가설은 <아바타>가 비싼 영화이기 때문에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는 예술영화인가?). 제임스 카메론에게 질문하고 싶은 핵심은 3D라는 전시효과에 매달리게 될 때 부딪치는 한계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가 이미지의 전시효과에 집중하게 될 때 영화의 존재론은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빈곤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발명은 창조가 아니다

약간의 우회. 다소 산만해 보이는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미지는 ‘하드 보디’(hard body)다. 이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수잔 제퍼드이다. ‘소프트 보디’가 성병, 부도덕성, 마약, 공해에 오염된 기형, 게으름, 위험에 빠진 태아를 담고 있는 잘못된 몸이라면 힘, 노동, 결단력, 충성심, 용기를 감싸고 있는 표준적인 몸을 ‘하드 보디’라고 불렀다. 이 ‘하드 보디’는 국가 혹은 사회, 몸담고 있는 커뮤니티, 상황이 요구하는 몸을 위해서 종종 국가적 표준을 이상화할 수 있는 판타지를 끌어들였다. 국가적 몸과 할리우드 영웅의 몸의 동일화. 이를테면 ‘매파’ 레이건의 도착과 ‘하드 보디’ 람보의 등장. ‘비둘기파’ 지미 카터의 퇴장과 ‘소프트 보디’ 트래비스의 자멸(<택시 드라이버>). 제임스 카메론은 ‘하드 보디’를 아이러니하게 비틀었다. <터미네이터>와 그 속편은 타임머신에 관한 (역설적) 이야기(의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계-인간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다. 한번은 악당으로, 그 다음에는 도움을 주는 선인으로 ‘동일한’ 터미네이터 T800이 찾아온다. <에이리언2>에서는 리플리에게 로봇 신체를 제공함으로써 ‘여성 하드 보디’를 제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편의 <터미네이터> 사이에 끼어 있는 <어비스>이다. 심해 속의 ‘낯선 존재’를 만나기 위해 인간은 무시무시한 수압을 견딜 수 있는 ‘하드 보디’ 잠수복을 입는다. 그러나 잠수복은 수압을 견디지만 호흡 곤란을 가져온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 <트루 라이즈>는 제임스 카메론 버전의 제임스 본드 액션이다. 차이가 있다면 ‘하드 보디’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유머이다. 그런 다음 환유로서의 ‘하드 보디’인 호화로운 여객선 타이타닉에 두 연인을 태운 다음 추운 겨울바다 한복판에서 그것을 다시 빼앗는다. 부서져버린 육체. 애매하지만 남겨진 감정. <타이타닉>은 제임스 카메론의 결론이다. 20세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리고 14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말하자면 기다림.

미래를 앞에 놓고 예언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거나 잡담이다. 역사는 변수가 많고 상황은 수시로 변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싶다. <아바타>는 영화사에서 어느 자리에 놓일 것인가? 질문을 약간만 비틀어보자. <아바타>의 3D는 토키인가, 딥 포커스인가? 비유적으로 질문을 바꿀 수도 있다. <아바타>는 <재즈 싱어>인가, <시민 케인>인가? 김혜리는 (사석에서) 좀더 간단하게 질문했다. <아바타>는 (상업적) 이벤트인가, (예술적) 혁명인가? 내 대답은 둘 다이다. 문제는 폭스사는 <재즈 싱어>라고 생각한 것이고, 제임스 카메론은 <시민 케인>이라고 믿은 것 같다는 사실이다. (영화적으로) 결과는 <재즈 싱어>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이 남아 있다. <아바타>는 <재즈 싱어>인가, <성의>인가? 무성영화로부터 토키영화에로 옮겨온 1929년 ‘이후’처럼 기술적 전환뿐만 아니라 영화문법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아니면 1953년 시네마스코프 ‘이후’처럼 새로운 스크린 사이즈의 추가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여기서 잠깐 영화사의 기술적 ‘혁명’에 관한 몇 가지 기록을 환기하고 싶다. 이십세기 폭스사의 대표였던 윌리엄 폭스는 와이드 스크린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집착했었다. 워너영화사가 사운드를 영화에 끌어들였을 때 폭스는 영화의 미래가 와이드 스크린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미 1929년에 두편의 70mm영화를 만들었다. 불행히도(다행히도?) 영화관은 폭스의 요구에 맞는 스크린을 준비하지 않았다. 워너영화사는 폭스의 70mm에 대항해서 65mm 바이타스코프를 개발했다. MGM은 폭스 사이즈를 받아들였고,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는 워너 사이즈를 받아들였다. 폭스는 이때 좀더 나아가고 싶어 했다. 폭스는 진지하게 ‘이미’ 1929년에 3D 화면을 테스트했다. RKO는 이 시기를 영화에서 일종의 전환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3D 효과가 나는 내추럴 비전을 <댄저 라이트>에서 실험했다. 이들은 운이 나빴다. 무성영화에서 토키로 넘어오면서 사운드 레코딩 문제는 극장에 1.33 사이즈 영사기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사운드와 스크린 사이의 기술적 경쟁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관계로 전화하였다. 사운드는 영화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지만 와이드 스크린은 관객에게 단지 화면에 커졌다는 이상의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는 와이드 스크린에 맞는 장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운드는 뮤지컬과 갱스터무비를 만들어냈다. 춤과 총소리, 노래와 비명. 한 가지 더. 1929년 할리우드영화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라디오와 경쟁하는 시대였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갑자기 라디오의 미디어 기능을 동시에 갖추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미디어 사이의 잡종교배였다. 발명은 창조가 아니다. 그렇다면 3D는 무엇과의 교배인가? 즉각적으로 당신은 온라인 게임을 떠올릴 것이다. <아바타>를 경험하면서 느끼는 낯선 반응은 어쩌면 내가 전혀 게임을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바타>는 게임에 익숙한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 사이에서 서로 다른 친화성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논의를 하기에 이 자리는 적절치 않다.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예술적 야심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기록. 시네마스코프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 영화기술적 핵심은 ‘안경을 쓰지 않고 보는’ 3D영화였다. 그래서 1953년 2월17일자 <버라이어티>의 <성의>에 대한 소개는 “안경을 쓰지 않고 보는 현대의 기적을 보라”였다. 그렇다면 시네마스코프는 3D영화로 가기 위한 매우 긴 장기적 이행기의 중간 단계 사이즈였던 것일까?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고 관객은 3D영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일까? <아바타>는 시네마스코프의 21세기 버전인가? 나는 화면비에 관한 지루한 역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냥 간단하게 폭스사는 전통적으로 끈질기게 화면이 결국 영화의 미래라고 믿었다.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인 <성의>는 폭스사의 ‘혁명’이었으며, 지금 3D영화 <아바타>도 폭스사의 영화이다. 이것을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화’ 산업에서 미래를 선점한다는 문제. 미래의 독과점. 어쩌면 이런 논쟁을 당신은 따분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3D에 환장하는 모습도 고작해야 이런 기술적 ‘환영’(幻影/歡迎) 논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바타>가 영화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라기보다는 외설적 판본처럼 보인다. 우리는 영화의 새로운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위해서 무엇을 건너가야 하는가? <아바타>는 분명하게 대답한다. 응, 그건 미학이 아니라 돈이야.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건너가서 만날 수 있는 미래는 무엇인가? 이때 자본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예술적 야심에 찬 비전은 역사적으로 모두가 실패한 3D 효과라는 물신주의의 성공에 대한 열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희극에 가까운 프로젝트가 정말 성공했을 때 사태는 2D영화의 전면적인 파국이 될 것이다. 그때 무엇이 전도될 것인가? 혹은 무엇을 전도시킬 것인가? 나는 논쟁의 초점을 어떤 각도에서 들어가도 3D로부터 벗어날 때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아바타>를 수정주의 서부극이나 문화이론의 패러다임을 빌려온 이데올로기 판본으로 읽는 것은 사실상 이 영화의 기술적 쇼크를 문화적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충격으로부터 방어하려는 보수적 오독(misreading)이다. 만일 오로지 <아바타>를 문화적 판본으로만 읽는다면 이건 가장 나쁜 형태의 매우 지루한 뉴 에이지 아류의 동어반복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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