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당신이 즐긴 것은 무엇입니까? [2]
2010-01-28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나는 어째서 <아바타>에 환호하는 대신 자본을 중심으로 한 기술결정주의를 근심하게 되었는가

나비족이 곤충을 연상시키네

우선 <아바타>를 보았을 때 나의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즉각적인 감각적 반응(말하자면 이 네 가지 느낌의 혼란스러운 상태). 먼저 마음의 준비. <아바타>는 처음으로 카메라의 관계가 아니라 보는 나와 스크린의 거리가 문제가 되는 영화였다. 내가 만날 스크린은 상상이 아니라 질료의 물질성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인상은 3D영화를 보았다기보다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공존의 상태, 차라리 어느 지점(zone)에서 둘 사이의 경계를 정지시킨 상태에서 매우 불균질적인 지각의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들의 샘플의 집합을 보았다는 느낌이 더 컸다. 사실 이것은 예고편을 보았을 때 너무 인상이 커서 오히려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 간극이 조금씩 좁혀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 간극은 마지막 장면까지 지속되었다. <아바타>는 인간과 나비족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 이미지와 실사 이미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처럼 전개되었다. 나는 이것이 3D 기술의 현재 단계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제임스 카메론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많은 비평과 찬사와 달리 의도적으로 카메론은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실사 이미지에 가깝게 보이게 만들기는커녕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과시한 다음 유지시키고 있다. 명백히 제임스 카메론의 목표는 3D 효과의 실감(實感, l’effet de reel)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비족은 사람과 닮지 않았으며, 그들은 인간과 유사한 삶을 살지도 않으며, 게다가 우리와 신체적으로 동일한 사이즈도 아니다. 그런데 그들의 체격이 크다고 해서 특별하게 전투 수행 기능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며, 그 커다란 육체가 영화 안에서 특별한 서사적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다.

허문영의 글은 내게 이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허문영은 제이크 설리에서 제이크-나비에로 옮겨가는 것을 변형(transformation)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생물학적 뉘앙스의 변태(metamorphosis)라고 해야 맞을 것”이라고 지적했다(‘놀라운 현실감을 갖춘 퇴행적인 동화’ <씨네21>, 제737호). 나는 이 지적을 좀더 밀고 나가고 싶다. 변태가 이루어질 때 여기에는 곤충에 대한 은유가 들어 있다. 나비족은 이상하게 (그 호칭은 ‘Na’vi’이기 때문에 ‘butterfly’와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그들의 생존방식을 보고 있으면 곤충의 무리가 연상된다. 곤충은 나무와 공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종종 그들은 우리에게 중력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해파리처럼 공기 속을 떠다니는 ‘신성한’ 나무 이와크의 홀씨를 보면서 나비족은 계시를 받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네이티리는 나무 홀씨의 첫 번째 계시에 따라 제이크 나비를 살려준 다음 두 번째 계시에 따라 기꺼이 섹스를 한다. 나무와의 생물학적 네트워크.

카메론이 ‘아바타’로 만들고 싶은 건 우리들

곤충에 대한 비유는 수도 없다. 나비족은 잠을 잘 때 나무 사이에 매달아놓은 누에고치처럼 생긴 나뭇잎에 몸을 감싸고 수면을 취한다. 그때 나뭇잎이 나비족을 감싸는 모습은 누에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유충처럼 보인다. 이때 제이크 설리는 단지 새로운 다리를 얻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충에서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그래서 새로운 육체로서의 아바타를 얻었을 때 (이미 허문영이 지적한 대로) 그는 뛰고 싶다, 가 아니라 날고 싶다, 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아바타>의 대립은 인류와 외계인, 혹은 화이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와 인디언 사이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벌레 같은’) 인간과 곤충(‘같은 휴머니즘’) 사이의 대립에 더 가깝게 보인다. <아바타>는 즉각적으로 <스타쉽 트루퍼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두편의 영화는 서로를 거울에 비친 전도된 버전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스 카메론과 폴 버호벤의 차이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인간과 기계 사이의 ‘하드 보디’를 다룬 각자의 판본 <터미네이터>와 <로보캅>을 만든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할리우드의 어떤 경향. 새로운 육체라는 도착적 열망. 그때 제임스 카메론은 새로운 육체의 영토를 영화 안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화 바깥에서도 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제임스 카메론이 선와 악을 단순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구분하면서 전도된 자리에 놓는 이유의 핵심일 것이다. 카메론이 궁극적으로 ‘아바타’로 만들고 싶은 대상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당연히 영화를 보는 우리다. 변태의 목표는 제이크를 경유한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이다. 첫 장면을 블랙아웃으로부터 판도라 행성을 공중 비행하면서 가로지르는 몽환적인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시작할 때 <아바타>는 영화와 게임 사이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제임스 카메론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첫 이미지로 우리를 판도라 행성에 초대한다. 게이머의 뇌의 스크린 속으로의 설정숏. 이 영화에는 단 한 장면의 지구 이미지도 없다. 버추얼한 삶. 그런 다음 제이크 설리의 눈 클로즈업으로 옮겨간다.

물론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아바타>는 목소리의 자리가 약간 에매하다. 영화 전체가 플래시백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제이크 설리의 일인칭 화자로 진행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이크 설리가 안 나오는 신은 거의 없을 정도로 이야기는 주관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제이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의 동선은 모호하고(심지어 이야기 전개의 필요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한다는 의심마저 들 정도이다), 종종 인물들의 비중은 균형을 잃고 있다. 우리는 제이크를 따라가면서만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핵심은 이때 제이크가 두명이라는 사실이다. 장자의 나비에 대한 진부한 비유처럼 제이크는 제이크 설리와 제이크 나비로 분화된다. 여기서 우리의 동일화의 초점은 변태에 맞춰져 있다. 이때 이 변태는 서사의 결과가 아니라 테크놀로지 전시의 목표처럼 보인다. 결과와 목표를 혼동하면 안된다. 제임스 카메론은 3D 효과를 인스톨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영화기술의 이행과 <아바타> 서사 안의 인물의 변태를 겹쳐 보이게 만들어서 프레임의 구경과 서사의 감상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

영웅적인 <어비스>와 불장난같은 <아바타>의 차이

물론 지금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바타>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아바타>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때 핵심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장 우리의 토픽에서 영화를 본다는 문제가 환영(幻影)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신체적 확장의 문제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이 논점을 좀더 밀고 나가고 싶다.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 할리우드는 지속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신체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기술적 확장은 단순하게 대중적 구경거리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좀 따분하긴 하지만 비전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힌 것은 데카르트적 전통의 결과이다. 주체를 구경꾼의 자리에 가져다놓음으로써 이 논쟁을 고정시키려고 했다. 베르그송은 이때 육체를 매개로 한 지각과 기억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반문했다. 영화는 결국 지각과 기억의 매체이다. 들뢰즈라면 이것을 운동과 시간의 세트라고 불렀을 것이다. 댄서란 무용이라는 메커니즘에 맞춰 춤을 추는 기계의 일부이다. 같은 논리의 영화적 판본. 관객은 영화란 메커니즘에 맞춰 뇌가 운동하는 기계의 일부이다. 물론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이 베르그송의 진지한 독자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할리우드의 테크놀로지 진화는 명백히 신체적 확장을 꿈꾸고 왔다.

나는 제임스 카메론이 <어비스>에서 내렸던 예술적 결단의 순간을 기억한다. 오로지 단 하나, 제임스 카메론은 <어비스>에서 영화는 접촉(touch)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우리를 끝까지 밀고 간다.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저 생명체와 벌이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혹은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문화이론적 요설을 전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핵심을 벗어난 지루한 설명이다. 카메론은 영화의 감각이 오로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열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래서 시각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접촉의 영화’(haptic cinema)의 가능성을 시도한다. 물론 이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그 시행착오는 제임스 카메론의 비전을 영웅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바타>는 자기의 비전에 대한 과잉반응이거나 ‘지나치게’ 멀리 가볼 수 있다는 물신적 유혹의 제스처로 보인다. 그래서 <어비스>는 영웅적으로 보이지만 <아바타>는 불장난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고 15분이 되었을 때 ‘아바타’를 만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제이크 설리가 제이크 ‘아바타’로 변태하는 장면은 <아바타>에서 제임스 카메론의 (비전과) 목표를 야심적인 동시에 순진하게 보여준다. 제이크 설리가 제이크 ‘아바타’로 ‘트랜스포트’되자 과학자들이 누워 있는 제이크 ‘아바타’에게 하는 첫 마디는 “들려요?”이다. 그들은 눈을 뜬 제이크 ‘아바타’에게 “보여요”라고 묻는 대신 “들려요”라고 묻는다. 다음 숏은 제이크 ‘아바타’가 다리를 움직이는 장면이다. 하반신 불구인 제이크 설리가 제이크 ‘아바타’가 되자 다리를 움직이는 것을 먼저 보여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좀더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신체기관 중에서 유일하게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설정한 다음 다시 운동의 영역을 확장하게 되면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그때 제이크 ‘아바타’가 발을 바닥에 닿는 촉감을 보여준다. 일어서자마자 제이크 ‘아바타’는 비틀거린다. 그는 균형감각을 잃은 것처럼 휘청거린다. 이때 휘청거리는 모습은 절대적으로 3D 스크린 안으로 들어온 관객의 시각적 균형감각의 상실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제이크 ‘아바타’는 실험실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마치 거기가 원래의 고향인 것처럼 숲속으로 달려간다. 제이크 설리는 제이크 ‘아바타’가 되자마자 단지 ‘트랜스포트’된 것이 아니라 나비족의 본능마저 획득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에서 한껏 숨을 들이쉬면서 냄새를 맡는다. 이 장면은 기괴하게 느껴진다. 제이크 설리는 하반신 불구였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으며, 숲 한가운데에서 얼마든지 숨을 들이마시면서 냄새를 만끽할 수 있었다. 왜 이런 행동이 그에게 그렇게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일까?(이걸 산소마스크를 벗은 기쁨이라고 설명하면 얼마나 우스워지는가) 혹시 이것은 시각으로 이루어진 2D 영역에서 해방되어 3D 공간으로 온 해방감의 표현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제임스 카메론의 기분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다음 제이크 ‘아바타’의 행동은 더 이상하다. 그는 과일을 입에 베어 물면서 만족감을 표명한다. 하지만 그는 얼마든지 과일을 먹을 수 있었고 그것은 금지된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이때 과일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다는 행동에 방점을 찍고 싶다. 과일을 바라보는 대신 그것을 손으로 쥐는 촉각의 느낌, 그런 다음 입으로 베어 물고 삼킬 때 손에 흐르는 과즙의 촉각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카메론이 서사를 부차적인 문제로 돌리면서까지 집중하는 것은 전쟁장면이 아니라 3D영화가 ‘나는 본다’라는 (영화에서 금기시된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하면서) 행위만으로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고 자문자답한다. <아바타>는 이 과정에서 이상할 정도로 만지고, 냄새를 맡고, 듣고, 붙드는 장면들로 충만해 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대신하는 ‘터치’(touch)에 집중되어 있다.

3D 이미지 자체가 포르노그래픽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비전과 터치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전은 보는 사람을 대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래서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터치는 그것을 만지는 사람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혹은 터치는 신체적 확장이다. 3D에는 전혀 다른 감각이 요구된다. 이때 여기에는 이중의 거리가 발생한다. 하나는 비전의 거리이다. 아무리 3D로 다가가도 우리는 여전히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이며, 판도라 혹성이 불바다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안전하게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뇌의 스크린 안에서 그것을 만질 수 있을 때 스크린과 우리 사이는 무효가 된다. 이중의 거리가 발명되었을 때 모순의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때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해야 한다. 3D영화에서 터치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를 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를 터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경이롭게 만들고 계속해서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이 관계가 역전되면 <아바타>는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 되는 것이다. 혹은 여기가 <아바타>가 여전히 영화의 존재론 안에 머물러 있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이때 3D가 가장 효과적인 장르는 포르노라는 음란한 예언의 차원을 넘어서서 3D 이미지 자체가 포르노그래픽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여기서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 포르노‘그래픽’하다고 썼다. 3D영화가 지닌 2D영화와의 차이는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네 이웃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영화 안의 등장인물과 영화 바깥의 구경꾼 사이의 간극의 최소화이다. 말하자면 프레임이라는 담장은 무너졌다. 하지만 이것이 하이퍼 리얼리즘을 실현했다고 곧장 답을 구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3D는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영화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로크에 더 가까워 보인다. ‘불완전함’이라는 원래의 의미 그대로. 왜냐하면 아무리 더 밀고 나아가도 3D 효과는 영화 안에서만 활동할 것이다. 3D의 궁극적 결말은 ‘불완전함’이다. 물론 영화를 무효화시키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내 관심이 아니다. 아무리 게임이 ‘시네마틱’하다고 해도 그건 내 토픽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관심은 영화가 ‘게임 같을 때’까지이다. 이미 오래 전 루돌프 아른하임은 영화를 예술로 만든 것은 그 기술적 한계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영화는 자기를 예술로 만든 한계를 무효로 만드는 도전에 열중하고 있다. 여기서 비평이 난 지금 즐기고 있어요, 라고 말할 때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좋아, 그런데 무얼 즐기고 있는 건데? <아바타>는 역설적으로 비평담론 각자에 이제까지 당신이 영화에서 무얼 즐기고 있었는지를 물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각자의 비평적 전술과 수사학으로 위장한 채 영화에 관한 자기의 즐거움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내게 반문하였다. 위험하다고? 어떤 위험을 말하는데? 우리는 3D를 놓고 영화의 가상 역사에 관한 미래학을 각자 제시하였다. 그러나 예언의 슬픈 효과는 내가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나를 선택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아바타>를 놓고 영화의 미래를 논할 때 어느 쪽의 진영을 선택하건 이미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기술결정주의의 역사에 스스로 투항하는 것이다.

자본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어디서 선을 그을 것인가? 그러나 3D는 거의 폭력적으로 그 선을 넘었다. 이것이 비평담론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뻔하다. 3D는 영화에서 무엇을 대신할 것인가? 뇌의 스크린에서 새롭게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선이 아니라 오감의 활용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영화에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바뀔 것인가? 나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아바타>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사이에도 <아바타>는 박스오피스에서 매주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극장은 임대업이기 때문에 이윤이 발생한다면 기꺼이 3D 기술을 위해 상영방식을 바꿀 것이다. 자본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3D는 영화의 혁명이 아니라 (내 생각에) 영화의 확장이다. 이때 확장이 가져올 영화적 기호들의 변화는 영화를 보는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지성에 어떤 요구를 할 것인가? 우리가 영화에 대해서 가지는 능력들은 3D의 이미지 앞에서 새로운 구도의 차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단절을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좀더 시적인 비유. 우리는 나비가 되어서 영화 스크린 안과 바깥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을까? 영화적인 사례. 인간과 파리가 뒤섞였을 때 감각과 지성은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플라이>). 나는 내기를 걸고 싶어진다. 제임스 카메론의 비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악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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