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웃길 뿐
2010-03-11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홍콩 현지에서 본 성룡 제작·기획·무술·출연의 코믹액션사극 <대병소장>

중화권 최대의 명절이라는 춘제 연휴의 막바지, 2월19일의 홍콩은 흐리고 차가웠다.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1년 중 가장 화려하고 호들갑스러운 행사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의 피로와 여운이 행인들의 표정 속에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콩의 밤거리는 불야성이었다. 그곳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대 쇼핑몰의 위용과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은 또 다른 축제를 예고하는 듯 이방인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다.

실제로 이곳에는 작은 축제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맥스 영화관 입점으로 침사추이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쇼핑몰 아이스퀘어에서 성룡과 왕리홍(<색, 계>)이 주연을 맡은 코믹액션사극 <대병소장>의 홍콩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린 것이다. 이 영화는 주로 할리우드와 홍콩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성룡이 중국에서 제작, 기획, 무술에 출연까지 맡은 첫 번째 작품이다. 무려 20여년 전 이미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했으나 영화화에 적합한 분량의 시나리오로 발전시키지 못해 지금에야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룡 개인에게 무척 애틋한 작품이라고 한다.

<대병소장>은 각국 제후간의 전쟁이 치열하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가슴에 가짜 화살촉을 붙이고 적이 다가올 때마다 죽은 시늉을 해 오랫동안 살아남은 양나라의 노병(성룡)이 주인공이다. 그는 병사들이 전멸한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위나라의 장군(왕리홍)을 발견한다. 장군을 포로로 삼아 고향에 데려가면 다시 농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노병은 장군을 이끌고 양나라로 향한다. 한편 위나라의 황권을 노리는 장군의 동생 문공자(유승준)는 형을 죽이기 위해 노병 일행을 뒤쫓고, 길 위에서 살아가는 거친 유목민이나 굶주린 전쟁 난민들, 군인을 증오하는 여성(린펑) 등이 노병의 여정을 방해한다.

성룡의 새로운 액션은 줄행랑술?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성룡의 변화다. “스스로를 액션영화의 틀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누누이 밝혀왔던 성룡은 <대병소장>으로 그 말을 실천하려 한다. 양나라 노병을 연기하는 그는 영화 속에서 도망다니기에 바쁘다. 혹자는 “방어하는 무술이야말로 성룡의 주특기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병소장>에서 그가 선보이는 액션은 방어술이라기보다는 줄행랑술에 가깝다. 노병이 가장 자주 취하는 행동은 길 위의 무법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며, 그가 행하는 가장 그럴싸한 액션장면은 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처리된다. 성룡이 도맡던 액션은 장군 역의 왕리홍을 비롯한 후배 연기자들의 몫이 됐다. 액션이 줄어든 자리를 채우는 건 성룡의 표정 연기와 대사다. “집으로 향하는 널따란 길, 양산 밑의 나의 집”을 열창하는 성룡의 천진무구한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부한 깊이를 담고 있다. 그렇게 느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주로 액션영화에 출연한 까닭에 성룡은 종종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역할을 소화해내야 했다. 그런 작품들이 성룡에게 요구했던 것은 “액션, 파이팅, 그리고 스턴트”였다. 에너지와 활력을 과시하는 액션영화에서는 나이에 걸맞은 연륜을 보여줄 기회가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병소장>의 노병은 다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피로와 축 늘어진 눈가의 주름살이 그의 얼굴에 아로새겨져 있다. 훨씬 더 관리를 잘했지만, 올해 55살을 맞이한 성룡의 얼굴에서 이러한 나이듦의 징후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노병 캐릭터를 통해 성룡은 액션스타 그 이후의 행보를 예행연습한 것은 아닐까. 짐작이 맞다면 <대병소장>은 성룡 필모그래피의 전환을 알리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다.

역시 ‘따거’의 티켓파워는 막강

다만 영화의 만듦새는 아쉬운 점이 많다. 전쟁사극과 로드무비를 결합한 듯한 구성은 신선했으나 길 위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몇몇 인물은 너무 급작스러운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영화의 힘을 뺀다. 각목과 도끼, 밧줄 등을 이용한 액션 시퀀스는 무난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다. 떼신으로 압도하는 여타 중국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으나, 그 아기자기한 매력을 살리지 못한 점이 가장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병소장>은 개봉 첫주인 춘제 연휴 일주일 동안 8천만위안(134억원)의 흥행수익을 벌어들이며 <아바타>에 이어 중국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다. 역시 ‘따거’(홍콩 현지에서 중국 사람들은 성룡을 이렇게 불렀다)의 티켓 파워는 여전히 유효한 걸까. 한국에서도 이 공식이 적용될지는 <대병소장>이 개봉하는 3월11일 이후에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를 향한 중국인의 열광적인 반응은 <대병소장>의 시사 직전 아이스퀘어 야외 무대에서 열린 무대인사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 무대 주변 펜스와 백화점 입구를 빼곡히 채운 관객은 ‘청룽’을 외치며 성룡을 비롯한 출연진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이 행사에는 왕리홍을 제외한 주요 출연진 10여명(성룡, 린펑, 중국 아이돌 그룹 러키7 등)이 참석했다. 새해 인사를 겸하는 의미에서인지 홍콩의 구정 풍습 중 하나인 사자춤 공연이 펼쳐졌고, 무대를 가득 메운 배우들은 샴페인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 풍경 속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문 장군 역할로 배우로의 첫발을 내디딘 한국 출신 가수 유승준이다. 200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한 그는 병역기피 혐의로 현재 한국 입국이 금지된 상태이며, 2007년부터 성룡의 소속사인 JC그룹에 소속돼 중국에서 활동해왔다. 다소 긴장한 표정의 유승준은 무대 주변을 가득 메운 홍콩인에게 제법 능숙한 중국말로 새해 인사를 건넸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성룡의 곁을 지키는 그에게 홍콩인들은 존중의 박수를 보냈다.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는 <대병소장>으로 연기자 신고식을 치른 유승준의 인터뷰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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