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유승준] “어떻게든 성룡 형님과 일하고 싶었다”
2010-03-11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대병소장>에서 문장군 역 맡은 유승준

레이밴 선글라스를 끼고 인터뷰 장소로 성큼성큼 들어온 그는 피곤해 보였다. 성룡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영화제에서 19일 아침 막 돌아왔다고 했다. 앞선 인터뷰에서 세번이나 울음을 삼켰다는 유승준은 다소 진정된 모습이었다. 영화에 관한, 또는 성룡에 관한 질문에는 차분하게 대답하던 그는 한국과 관련된 질문이 나올 때면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목소리가 얇아졌다.

-한국 언론과 오랜만의 만남이다.
=솔직히 지면 인터뷰는 나름대로 많이 했다. TV가 많이 민감했지. 처음엔 내가 언론에 마음을 열면 한국이 나를 용서해줄까 싶었지만 늘 결과가 가슴아팠다. 처음엔 사정해서 인터뷰하자고 하고, 그래서 했더니 나만 두번 죽고. 그 이후로는 마음을 많이 비운다. 영화 인터뷰를 하는 거라 생각하고 배우로서 진솔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생각한다.

-첫 영화로 베를린영화제에 갔다. 기분은 어떤가.
=좋았다. 형님(성룡을 지칭) 전용 비행기도 타고, 출세했지 뭐. (웃음)

-현지에 가서 본인을 뭐라고 소개했나.
=내가 나를 소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른 사람들이 주로 소개해줬는데, 보통은 한국의 가수라고 한다. 한국 가수인데 이번에 연기자로 입문하게 된 유승준이라고.

-2007년부터 성룡의 소속사인 JC그룹에 소속되었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
=중국이 현재 아시아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콩, 대만의 모든 연예 자원이 중국으로 다시 흘러들어온다. 게다가 아시아의 국제적인 스타들- 주윤발, 공리, 이연걸, 성룡- 은 모두 중화권 출신이다.

-성룡은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
=그가 먼저 나를 찾았다. 당시 <포비든 킹덤: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를 찍고 호텔 방에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내가 나온 걸 봤다고 했다. 2002년에 월드컵 조 추첨 시 내가 한국 대표로 무대에서 노래했었다. 형님이 그때의 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중국 와서 고생하고 있다니 얼마나 안돼 보였겠나. 그래서 친구인 JC그룹코리아의 이미선 대표에게 내 사정을 자세히 듣고는 이 친구 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나보다. 어느 날 전화를 받았는데 재키 챈(성룡의 영어 이름)이라는 거다. 같이 밥 한번 먹자고. 그래놓고 연락이 없었다. 나는 어땠겠나. 한달, 두달, 세달이 지나고 나자 전화 건 사람이 재키 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누구 사칭하는 전화를 그동안 많이 받았거든. 그런데 6개월이 지나서 다시 연락이 왔다.

-6개월 뒤엔 어떤 일이 있었나.
=“내가 리츠칼튼 호텔에 있는데 그쪽으로 오라”고 하더라. 그때만 해도 솔직히 “와라”였지 “같이 일하자, 도와주겠다”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형님과 같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형님이 오후 6시에 만나자고 했는데 내가 8시30분에 갔다. 알고보니 리츠칼튼 호텔이 두개였던 거다. 6개월 기다려서 겨우 만났는데, 두 시간이나 늦다니 내 속이 어땠겠나. 그런데 내가 도착하자마자 형님의 첫마디가 “배고프지? 밥 먹어”였다. 자기는 나를 기다리면서 밥도 먹었는데 너는 오면서 얼마나 긴장했겠냐고 하더라. 그런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만나서는 무슨 얘기를 했나.
=앞으로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기에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도와줄게”라고 하더라. 그리고 앞으로 남들에게 성룡 회사 다닌다고 얘기하라고 했다. 이전에 형님도 말실수해서 대만에 3년 동안 못 들간 적이 있다. 그런 상황을 통해 본인도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 젊을 때는 말실수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좌절하고 실패할 수 있지만 어떻게 그 문제를 이겨내고 일어서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나도 더 노력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라고 말해줬다. 근데 그렇게 말만 하고 시간은 또 계속 흘러갔다. 나는 좀 빨리 도와주면 좋겠구먼…. (웃음)

-그럼 기다리다가 <대병소장>의 출연 제의를 받은 건가.
=제안을 받았다기보다는 내가 막 노력했다. 형님은 나에게 더 큰 영화를 주고 싶었다더라. 하지만 내가 이미 안달이 난 거지. 난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 인기 가수로 활동할 때는 해보지 못한 일에 도전하기보다는 내가 이뤄놓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때 같았으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이 많았을 거다. 형님과 첫 작품을 함께하면서 많이 배웠다. 형님이 하라는 거, 감독님이 하라는 것만 들으며 신인의 모습으로 촬영에 임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오히려 내가 더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달라졌나.
=일단 카메라 앞에 가수 유승준이 아닌 배우 유승준으로 서게 됐다. 멋지게 보이는 걸 포기하고 자존심도 많이 버렸다. 처음에 중국에 왔을 때는 주위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른다. 웬만한 무대엔 안 선다고 하고, 이동할 땐 무슨 차 타야 하고, 백댄서는 한국에서 데려오라고 하고…. 지금 여기 올 때는 혼자서 택시 타고 왔다. 내 짐 들고. 예전에 배웠어야 하는 걸 지금 배우고 있는 거지. 내 자신을 2년 동안 많은 부분에서 깨나가는 중이다.

-그럼 이제 연기자로 전업하는 건가.
=아니다. 다만 앞으로는 영화에 비중을 많이 둘 생각이다.

- 연기자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마흔이 되기 전에 나를 대표할 수 있을 만한 영화를 한편 하고, 마흔다섯 전에 성룡의 <러시아워> 같은 국제적인 영화를 한편 하는 것. 난 그것만 꿈꾸고 있다. 준비하는 사람에게 기회는 온다고 생각한다.

-목표를 들어보니 앞으로 국제적인 활동에 주력할 생각인 것 같다.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없나.
=한국은… 내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다. 일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유승준이라는 이름을 준 게 한국이고, 내가 다시 일어나야 할 곳이 한국이므로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현재 한국 땅을 밟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볼 생각은 없나.
=가장 큰 문제는 한국과 너무 멀어져 있다는 거다. 내가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 만한 매개체가 없다. 방송에는 아직도 못 나가고, 한국 땅을 못 밟잖나.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나. 그 일이 있고나서 맨 처음 2년간은 이러한 상황이 억울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들을 낳으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내가 국민이 원하는 만큼 성숙한 공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내가 공인으로서 누리는 혜택만큼 중요하게 지켜야 할 의무에는 많이 소홀했던 것 같다. 가슴이 아픈 건 그 일이 있고 나서 사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다시 논란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긴 침묵 뒤) 결정은 당연히 달랐겠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다른 결정을 했을 거다.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무도 모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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